서명응
서명응(徐命膺) | |
대표명칭 | 서명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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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徐命膺 |
생몰년 | 1716-1787 |
본관 | 대구(大邱) |
호 | 보만재(保晩齋) |
자 | 군수(君受) |
시대 | 조선 |
국적 | 조선 |
대표직함 | 부제학, 이조판서, 정승 |
부 | 서종옥(徐宗玉) |
모 | 이집(李㙫)의 딸 |
자녀 | 서호수(徐浩修) |
목차
정의
서명응(1716∼1787)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내용
대구 서씨 시조 서한 시제는 충남 예산군 대흥면 하탄방리에서 음력 10월1일에 거행된다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서씨(大丘達城徐氏)(달성 서씨 대구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공조전서.정3품 .장관)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생애
본관은 대구(大邱). 자는 군수(君受). 보만재(保晩齋)라는 호를 정조로부터 내려 받았다. 판서 서성(徐渻)의 5세손이고, 남원부사 서정리(徐貞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참찬 서문유(徐文裕)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서종옥(徐宗玉)이며, 어머니는 이집(李㙫)의 딸이다. 영의정 서명선(徐命善)의 형이다.
활동사항
1754년(영조 30)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부제학(副提學)·이조판서를 거친 뒤, 청나라 연경(燕京)에 사행하여 다녀왔다. 그 뒤 대제학을 거쳐 상신(相臣: 정승)에 오르고 봉조하(奉朝賀)에 이르렀다. 박학강기(博學强記)로 이름났으며 역학(易學)에도 조예가 깊었다. 정조가 동궁에 있을 때 빈객(賓客)으로 초치되어 학문 수련에 큰 도움을 주었다. 정조 즉위 직후 규장각이 세워졌을 때 제학(提學)에 첫번째로 임명되었으며, 죽을 때까지 규장각 운영에 절대적인 찬획(贊劃: 영향)을 끼쳤다.
학문
흔히 북학파(北學派)의 비조(鼻祖)로 일컬어지며,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추구하는 학문 정신은 아들 서호수(徐浩修), 손자 서유구(徐有榘)에로 이어져 가학(家學)의 전통이 세워지기도 하였다. [1]
악보 편찬
조선후기 방대한 분량의 악서를 남겼다. 영조 때 『동국문헌비고』의 악고(樂考)를 지었다. 1759년(영조 35) 당시 왕명으로 진행된 악보 편찬사업을 주관하였으며, 장악원(掌樂院)의 악사들과 함께 세종·세조 때의 궁중음악의 악곡들을 수집·정리하여 『대악전보』와 『대악후보』를 편찬했다. 영조(1724~1776) 때 그는 홍계희(洪啓禧)와 함께 궁중의식을 위한 악장집인 『국조악장』(國朝樂章)을 편찬하였다. 정조대의 『시악화성』(詩樂和聲)· 『국조시악』(國朝詩樂)· 『악통』(樂通)과 같은 음악이론서는 모두 서명응이 정조의 명을 받들어 저술한 악서(樂書)이다. 정조가 악학에 조예가 깊었고, 또한 학문의 여러 분야에 정통한 것은 모두 동궁시절 스승이었던 서명응의 영향에 기인한다.[2]
시각자료
갤러리
지식 관계망
- 대구 서씨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서명응 | 서호수 | A는 아들 B를 두었다 | A ekc:hasSon B |
서호수 | 서유구 | A는 아들 B를 두었다 | A ekc:hasSon B |
서명응 | 규장각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서명응 | 서명선 | A는 형제 B가 있다 | A ekc:hasBrother B |
서명응 초상 | 서명응 | A는 B를 묘사하였다 | A ekc:depicts B |
서명응 | 정조 | A는 B의 스승이다 | A ekc:hasDisciple B |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 ↑ 이태진, "서명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송방송, 『한겨레음악대사전』, 보고사, 2012. 온라인 참조:"서명응",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논문
- 장원목, 「보만재 서명응의 생애와 사상 ; 보만재 서명응의 생애와 학문 -학문적 문제의식을 중심으로-」, 『한국사상과 문화』vol.22, 한국사상문화학회, 2003
- 조창록, 「조선조 개성의 학풍과 서명응 가의 학문」, 『대동문화연구』vol.47,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04
- 조창록, 「여행의 역사 -여행과 한문학1 : 徐命膺(서명응)과 趙嚴(조엄), 두 실학자의 백두산기행 - 「遊白頭山記(유백두산기)」」, 『동방한문학』vol.59, 동방한문학회,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