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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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wseo21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2년 8월 6일 (토) 10:18 판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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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후기 양주심찰어사, 충청도관찰사, 대사간 등을 역임한 문신. 대구 서씨 시조 서한 시제는 충남 예산군 대흥면 하탄방리에서 음력 10월1일에 거행된다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서씨(大丘達城徐氏)(달성 서씨 대구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공조전서.정3품 .장관)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서씨일가연합회 [[1]] [[2]]

개설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순오(舜五). 영의정 서종태(徐宗泰)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좌의정 서명균(徐命均)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서지수(徐志修)이며, 어머니는 이덕빈(李德彬)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72년(영조 48) 정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1775년 양주심찰어사(楊州審察御史)가 되어 군기(軍器)를 점검하고, 이어서 겸보덕(兼輔德)·승지·충청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773년 세자시강원에 재직할 당시 박종갑(朴宗甲), 이의준(李義駿)과 함께 세손을 잘 보좌해 ‘삼춘방(三春坊)’으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당시 서연 자리에서 “노성중(盧聖中)이라는 인물이 임오년(1762) 사도세자 사건 이후 13년간 벼슬에 나아가지 않다가 근래에 와서 벼슬에 나와 포부를 펴보려고 한다.”는 말을 하였다.

1776년(정조 즉위) 정조가 즉위하고 영남 유생 이응원이 상소를 올려 사도세자 사건을 거론하며 흉역을 징토할 것을 요구하자 정조는 이응원을 친국(親鞫)하며 영조대의 의리를 해치는 것으로 단정하였고, 서연 자리에서 당시의 사건을 언급하였던 서유신, 박종갑, 이의준 등도 모두 같은 무리라고 비판하였다. 결국 1777년 서연 자리에서의 발언 문제로 인해 세 사람은 향리로 방출되었다. 하지만 이는 표면적인 이유일 뿐, 실제로는 세도가 홍국영(洪國榮)의 모략이었다.

1784년 정조는 대사령(大赦令)을 통해 세 사람의 죄를 사면 받고, 1789년 풍기군수(豐基郡守)에 제수되었다. 1794년 홍문관·예문관의 대제학이 되고, 이듬해 대사간·대사헌을 거쳐 1796년 호군(護軍)을 역임하고 봉조하(奉朝賀)로 있다가 죽었다.

선조 때부터 대대로 문형(文衡: 대제학의 다른 이름)을 지낸 명문가에 태어나 품행이 방정하고 성품이 고결하였으며 학문에 열중, 특히 경사(經史)에 능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참고문헌 『정조실록(正祖實錄)』 『순조실록(純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일성록(日省錄)』 『극원유고(屐園遺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