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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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wseo21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2년 7월 30일 (토) 23:12 판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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扶餘孝 생몰연대 미상

[목차]

개요

의자왕의 아들이자 의자왕 말년 시점의 태자.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매년 11월 첫째주 토요일 오전 10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21(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매년 11월 첫째주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공조전서.정3품 .장관)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서씨일가연합회 [[1]]

생애

본래 의자왕의 태자이자 다음 후계자로 내정된 왕자는 부여융이었다. 그런데 백제 멸망 당시의 기록에는 태자가 '부여효'로 바뀌어 있고, 부여융은 태자가 아닌 단지 왕자로 칭하고 있다. 일단 기록상 부여융과 부여효는 서로 다른 사람이라고 명확히 기록돼 있기 때문에 동일인물의 다른 이름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몇 가지 설이 있지만 이는 아무래도 655년 정월에 일어났던 의자왕의 친위 쿠데타의 결과로 보인다. 부여효는 부여융의 배다른 형제로 추측되는데, 백제 말기에 전횡을 일삼았다는 의자왕의 대부인이 왕의 친위 쿠데타를 도와 권세를 잡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대부인 소생인 부여효가 부여융을 몰아내고 태자위를 빼앗아갔다는 설이 유력하다. 한편 이 의자왕의 대부인이 은고부인이라는 설도 있으나 아닐 가능성도 높다.

다만 그러면 또 의문이 있는데 이후 중국의 기록에 의하면 당나라에서 태자급 대우를 받은 것은 부여융으로 보이며 함께 끌려가서 살았을 부여효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 심지어 당나라에 가장 반항적이었던 고구려의 권신 연남건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는데도 말이다. 의자왕은 태자와 함께 현 충청남도 공주시에 위치한 웅진성으로 도망쳤다가 거기서 잡혔다고 하는데 공주시에 있는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인 신원사(사찰)(新元寺)의 부속암자인 고왕암(古王庵)에는 태자 부여융이 거기 있는 '융피굴'에서 잡혔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삼국사기》에는 부여융이 사비성에 있었다고 되어 있다.

660년, 나당연합군이 대대적으로 백제를 공격했고, 웅진강 입구의 전투에서 당군에게, 황산벌 전투에서 신라군에게 패배해 수도 사비성 공격이 눈앞에 다가오자 의자왕은 태자 부여효와 함께 사비성을 탈출하여 북쪽 웅진성으로 피난했다. 웅진성으로 떠난 이유는 웅진성이 지리적으로 수비하기 좋은 지형이었기 때문인 듯하다. 그러나 나당연합군은 부여태가 지키는 사비성을 먼저 함락한 후 웅진성으로 밀려들었고, 예식진의 배신으로 부여효는 의자왕과 함께 포박당했다. 이후 의자왕과 같이 당으로 포로로 끌려갔고 이후의 생애는 알 수 없다.

가족관계

* 아버지 의자왕
* 아들 부여문사 - 삼국사기의 백제멸망전 기록에서 등장. 여기서 효를 태자, 융은 왕자로 기록했고 문사는 태자의 아들이므로 효의 아들로 보인다. 그런데 효를 따라 웅진성으로 떠나지 않고 사비성에 잠시 남았다가 부여융과 함께 뒤늦게 밧줄을 타고 탈출한다. 융과 효의 사이가 좋았을 이유가 없어 의아한 대목인데 그만큼 백제멸망전 당시 상황이 긴박했다는 것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