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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0년부터 676년까지 7년간에 걸쳐 신라와 당나라 사이의 전쟁이다.
 
670년부터 676년까지 7년간에 걸쳐 신라와 당나라 사이의 전쟁이다.

2017년 11월 16일 (목) 02:26 판

나당전쟁(羅唐戰爭)
Land battle.png
대표명칭 나당전쟁
한자표기 羅唐戰爭
유형 군사/전투
시대 삼국
날짜 670년 3월-676년 11월
관련인물 설오유, 고연무, 당천, 효천, 설인귀, 이근행, 유린궤, 문훈, 김원술, 시득
관련유물유적 매소성


정의

670년부터 676년까지 7년간에 걸쳐 신라와 당나라 사이의 전쟁이다.

설명

신라는 당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삼국통일을 완수하였다.

당나라의 야욕

당은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옛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비롯한 5개 도독부를 두고 1만여 명의 병력을 상주시켰다. 또 고구려 지역에는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비롯한 9개 도독부를 두고 2만 명의 당군을 주둔시켜 한반도를 직접 지배하려 하였다. 이에 그치지 않고 663년(신라 문무왕 13)에는 신라를 계림대도독부(鷄林大都督府)로, 문무왕을 계림주대도독(鷄林州大都督)으로 삼아 신라까지 지배하려는 야욕을 보였다.

영토 탈환

이에 신라는 고구려 왕족 안승(安勝)을 고구려왕으로 삼고 금마저(金馬渚:익산군 금마면)에 도읍을 정해주고 소고구려국(小高句麗國 : 뒤의 報德國)으로 인정, 보호함으로써 고구려 부흥군과 유민들을 대당(對唐)항쟁에 이용하였다. 670년에 신라는 당과 부여 융(扶餘隆:웅진도독)의 백제군대가 머무른 82개 성을 공격하였다. 671년에는 사비성(부여)을 함락시키고 그곳에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하여 직속령으로 삼아 백제 옛 땅을 완전히 되찾았다.
672년(문무왕 12) 신라군은 고구려 부흥군을 진압하던 당나라 장수 고간(高侃)이근행(李謹行)의 군대를 한시성과 마읍성(대동강 하류지역으로 추정)에서 크게 무찌르고 백수성(영월로 추정)까지 진격하였으나, 후퇴하는 고간의 군사와 석문(황해도 서흥 운마산)에서 싸우다가 대아찬 효천(曉川) 등 7명의 신라 장군이 전사하였다.

Quote-left.png 8월에 (당나라 군사가) 한시성(韓始城)과 마읍성(馬邑城)을 공격하여 이겼다. 백수성(白水城)에서 5백 보 쯤 되는 곳까지 군사를 전진시켜 군영을 설치하였다. 우리 군사와 고구려 군사가 (당나라 군사와) 맞서 싸워 수천 명의 목을 베었다. 고간(高侃) 등이 후퇴하자 추격하여 석문(石門)에 이르러 싸웠는데, 우리 군사가 패배하여 대아찬(大阿湌)효천(曉川), 사찬(沙湌) 의문(義文), 산세(山世), 아찬(阿湌) 능신(能申), 두선(豆善), 일길찬(一吉湌) 안나함(安那含), 양신(良臣) 등이 죽임을 당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12년가을8월", 『한국사데이타베이스』 online, 국사편찬위원회.[1]


당나라의 획책 섬멸

674년 당은 문무왕의 관작을 삭탈하고, 그 아우 김인문(金仁問)을 신라왕에 책봉하고서 유인궤(劉仁軌)·이필·이근행에게 많은 군대를 주어 신라를 치려고 하였다. 이에 신라는 675년 설인귀(薛仁貴)의 침공을 격파하여 1,400명을 죽이고, 이근행(李謹行)이 이끈 20만 대군을 매소성(買肖城: 경기도 연천)에서 크게 격멸하였다. 676년에는 당의 수군을 금강 하류 기벌포(伎伐浦 : 충남 장항)에서 패퇴시켰다.[2]
이에 당나라는 676년 안동도호부는 요동성으로, 웅진도독부는 건안성으로 옮겼다. 신라는 임진강에서 함경남도 덕원으로 이어지는 원산 이남의 영토를 차지하였다.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나당연합 나당전쟁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설오유 나당전쟁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고연무 나당전쟁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당천 나당전쟁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효천 나당전쟁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나당전쟁 매소성전투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나당전쟁 기벌포전투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시득 기벌포전투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설인귀 기벌포전투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670년 3월-676년 11월 나당전쟁이 일어났다
670년 3월 신라 장군 설오유와 고구려 부흥군의 장군 고연무가 당나라를 공격하였다
671년 10월 6일 당천이 당 수군을 격파하였다
672년 신라 장군 효천이 당과의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674년 당은 신라 문무왕의 관작이 삭탈하고, 동생 김인문을 신라왕으로 추대하였다
675년 9월 신라 장군 문훈이 당 군대를 격파하였다
675년 9월 29일 신라가 당 군대를 매소성전투에서 격파하였다
675년 11월 시득이 당 설인귀 수군을 기벌포전투에서 격파하였다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1.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12년가을8월", 『한국사데이타베이스』 online, 국사편찬위원회.
  2.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16년겨울12월", 『한국사데이타베이스』online, 국사편찬위원회.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1. 웹 자원
    • 이호영, "나당전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나당전쟁", 『doopedia』online, 두산백과.

더 읽을거리

  1. 단행본
    • 이상훈, 『나당전쟁 연구』, 주류성, 201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