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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필의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군보(君輔), 호는 구천(龜川). 이항복(李恒福)의 증손이며, 이조참판 이시술(李時術)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재질이 뛰어났다.<ref>민백</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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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4년(현종 15) 제2차 복상 문제로 송시열(宋時烈)이 삭직당하자, 그를 적극 옹호하였다. 평소에 송시열을 모르는 사이였지만, 분개하면서 선비들을 설득해 상소하여 송시열의 원통함을 호소하다가 영광에 유배되었다. 적소에 5년 동안이나 있으면서도 문밖을 나가지 않았으며 『퇴계집』을 읽고 느끼는 바가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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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여 이이와 성흔의 위패를 문묘에서 치우려 하자 소를 올려 사직하고 향리로 돌아가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썼다. 1694년(숙종 20) 갑술옥사로 서인이 등용되면서 김제군수에 올랐으며 이듬해 사복시정, 장악원정이 되어 태묘의 악장을 정리하였다.<ref>두산</ref> 1717년 상신 이이명(李頤命)이 독대(獨對)를 전횡하자 상소해 그 잘못을 극론하였다.<ref>민백</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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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 돌아온 뒤부터는 성리학에 전심했는데, 그 중에서도 『대학』을 가장 깊이 연구하였다. 만년에는 예학에 힘을 쏟아 중국과 우리나라의 고금 예설을 두루 연구하였다. 저술로는 경설을 논한 것과 예에 관하여 논답한 것 등 20여 권이 있다. 또한 『악원고사(樂院故事)』 1책이 있는데, 이는 묘악(廟樂)의 전고(典故)를 설명하고, 악장(樂章)에 관한 여러 사람의 논의를 수집해 엮은 것이다.<ref>민백</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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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예학에 밝았으며 연구와 강학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저서로는 《논변경설》, 《답문의체》, 《악원고사》, 《소주서》, 《동호예설》 등이 있다.<ref>두산</ref>  1722년(경종 2) 아들인 호조판서 이태좌(李台佐)의 추은(推恩)에 의하여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가 이듬해에 다시 의정부좌찬성이 내려졌다. 영광의 백산서원(柏山書院)과 김제의 용암서원(龍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ref>민백</ref>
  
 
=='''지식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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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9일 (목) 09:36 판

이세필(李世弼)
대표명칭 이세필
한자표기 李世弼
생몰년 1642-1718
본관 경주(慶州)
구천(龜川), 문경(文敬)
군보(君輔)
시대 조선
대표저서 악원고사
대표직함 형조좌랑, 삭녕군수, 김제군수, 사복시정
배우자 박세모(朴世模)의 딸
이시술(李時術)
홍영(洪霙)의 딸
자녀 이태좌(李台佐), 이정좌(李鼎佐), 이형좌(李衡佐), 이경좌(李景佐)
성격 문신, 학자
유형 인물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내용

이세필의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군보(君輔), 호는 구천(龜川). 이항복(李恒福)의 증손이며, 이조참판 이시술(李時術)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재질이 뛰어났다.[1]

1674년(현종 15) 제2차 복상 문제로 송시열(宋時烈)이 삭직당하자, 그를 적극 옹호하였다. 평소에 송시열을 모르는 사이였지만, 분개하면서 선비들을 설득해 상소하여 송시열의 원통함을 호소하다가 영광에 유배되었다. 적소에 5년 동안이나 있으면서도 문밖을 나가지 않았으며 『퇴계집』을 읽고 느끼는 바가 있었다고 한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여 이이와 성흔의 위패를 문묘에서 치우려 하자 소를 올려 사직하고 향리로 돌아가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썼다. 1694년(숙종 20) 갑술옥사로 서인이 등용되면서 김제군수에 올랐으며 이듬해 사복시정, 장악원정이 되어 태묘의 악장을 정리하였다.[2] 1717년 상신 이이명(李頤命)이 독대(獨對)를 전횡하자 상소해 그 잘못을 극론하였다.[3]

고향에 돌아온 뒤부터는 성리학에 전심했는데, 그 중에서도 『대학』을 가장 깊이 연구하였다. 만년에는 예학에 힘을 쏟아 중국과 우리나라의 고금 예설을 두루 연구하였다. 저술로는 경설을 논한 것과 예에 관하여 논답한 것 등 20여 권이 있다. 또한 『악원고사(樂院故事)』 1책이 있는데, 이는 묘악(廟樂)의 전고(典故)를 설명하고, 악장(樂章)에 관한 여러 사람의 논의를 수집해 엮은 것이다.[4]


특히 예학에 밝았으며 연구와 강학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저서로는 《논변경설》, 《답문의체》, 《악원고사》, 《소주서》, 《동호예설》 등이 있다.[5] 1722년(경종 2) 아들인 호조판서 이태좌(李台佐)의 추은(推恩)에 의하여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가 이듬해에 다시 의정부좌찬성이 내려졌다. 영광의 백산서원(柏山書院)과 김제의 용암서원(龍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6]

지식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조일신 조일신의 난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주석

  1. 민백
  2. 두산
  3. 민백
  4. 민백
  5. 두산
  6. 민백

참고문헌

  • 김재명, "조일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조일신",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