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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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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원의 숫자는 좌·우간의대부[正三品] 각 1원,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 從三品) 1원, 좌·우헌납(左右獻納: 正五品) 각 1원, 좌·우정언(左右正言: 正六品) 각 1원 등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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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국대전』에서는 대사간(大司諫: 正三品 堂上), 사간(司諫: 從三品), 헌납(獻納: 正五品) 각 1원, 정언(正言: 正六品) 2원으로 모두 문관을 임용하였다. 이속(吏屬)으로 서리(書吏) 21인[경국대전에서는 24인을 두었으나 속대전에서는 19인으로 감원했고 대전회통에서는 21인으로 증원], 창도(唱導) 14명[속대전에서 13명으로 감원] 등이 있었다.
1466년(세조 12)에 다시 관제를 정비하여 경국대전에서는 대사간(大司諫: 正三品 堂上), 사간(司諫: 從三品), 헌납(獻納: 正五品) 각 1원, 정언(正言: 正六品) 2원으로 모두 문관을 임용하였다. 이속(吏屬)으로 서리(書吏) 21인[경국대전에서는 24인을 두었으나 속대전에서는 19인으로 감원했고 대전회통에서는 21인으로 증원], 창도(唱導) 14명[속대전에서 13명으로 감원] 등이 있었다.
 
 
간관의 임무가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화요직(華要職)으로 인정되어 학문이 뛰어나고 인품이 강직한 사람 가운데서 선발하였다.<ref>"사간원", 『관직명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온라인 참조:"[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71389&cid=42922&categoryId=42922 사간원]",<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작성일:2011. 1. 7.</ref>  
 
간관의 임무가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화요직(華要職)으로 인정되어 학문이 뛰어나고 인품이 강직한 사람 가운데서 선발하였다.<ref>"사간원", 『관직명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온라인 참조:"[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71389&cid=42922&categoryId=42922 사간원]",<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작성일:2011. 1. 7.</ref>  
  

2017년 10월 24일 (화) 19:37 판

사간원(司諫院)
대표명칭 사간원
한자표기 司諫院
창립시대 조선
해체일 1894년
주요업무 언론
관련기관 홍문관, 사헌부


정의

사간원은 조선시대의 간쟁을 관장하던 관서이다.

내용

조선시대 정삼품아문(正三品衙門)으로 간쟁(諫諍)과 논박(論駁)을 관장한다. 사헌부(司憲府)와 함께 대간(臺諫), 홍문관(弘文館)·사헌부와 함께 삼사(三司), 형조(刑曹)·사헌부와 함께 삼성(三省)이라 하였으나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다.[1]

설립경위

1392년(태조 1)에 관제를 제정하면서 고려시대의 제도를 계승하여 문하부(門下府)의 낭사(郞舍)에게 간관의 기능을 담당시켰다. 그러나 1401년(태종 1)에 문하부를 폐지하고 의정부(議政府)를 두면서 문하부낭사(門下府郞舍)를 독립기게 되었고 이에 사간원을 설치하였다.[2]

업무

첫째 국왕에 대한 간쟁, 신료에 대한 탄핵, 당대의 정치·인사 문제 등에 대하여 언론을 담당했으며, 둘째 국왕의 시종 신료로서 경연(經筵)·서연(書筵)에 참여하였고, 셋째 의정부 및 6조와 함께 법률 제정에 대한 논의에 참여하였으며, 넷째 5품 이하 관료의 인사 임명장과 법제 제정에 대한 서경권(署經權)을 행사하였다.[3]

관제

『경국대전』에서는 대사간(大司諫: 正三品 堂上), 사간(司諫: 從三品), 헌납(獻納: 正五品) 각 1원, 정언(正言: 正六品) 2원으로 모두 문관을 임용하였다. 이속(吏屬)으로 서리(書吏) 21인[경국대전에서는 24인을 두었으나 속대전에서는 19인으로 감원했고 대전회통에서는 21인으로 증원], 창도(唱導) 14명[속대전에서 13명으로 감원] 등이 있었다. 간관의 임무가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화요직(華要職)으로 인정되어 학문이 뛰어나고 인품이 강직한 사람 가운데서 선발하였다.[4]

의의

사간원은 권력이나 당파에 이용되어 폐단이 생기기도 했고, 왕권의 탄압을 받아 그 기능을 상실한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의정부·육조·사헌부 등과 더불어 정치의 핵심 기관으로서 기능이 원만히 수행되면 왕권이나 신권(臣權)의 독주를 막고 균형있는 정치를 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기관이었다.[5]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사간원 홍문관 A는 B와 관련이 있다
사간원 사헌부 A는 B와 관련이 있다
사간원 의정부 A는 B와 관련이 있다
사간원 의금부 A는 B와 관련이 있다
사간원 갑오개혁 A는 B와 관련이 있다

시간정보

시간 내용
1894년 갑오개혁으로 인해 사간원이 해체되었다.

주석

  1. "사간원", 『관직명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온라인 참조:"사간원",『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작성일:2011. 1. 7.
  2. "사간원", 『관직명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온라인 참조:"사간원",『네이버 지식백과』online, 작성일:2011. 1. 7.
  3. "사간원", 『관직명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온라인 참조:"사간원",『네이버 지식백과』online, 작성일:2011. 1. 7.
  4. "사간원", 『관직명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온라인 참조:"사간원",『네이버 지식백과』online, 작성일:2011. 1. 7.
  5. 최승호, "사간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논문
    • 김기중, 「한국의 언론사상 : '대간제도'를 중심으로 본 자유언론의 원류」, 『광주개방대학 논문집』Vol.4, 광주대학교, 1987.
  • 단행본
    • 이성무, 『조선은 어떻게 부정부패를 막았을까 : 목숨 걸고 직언하고 가차 없이 탄핵하다』, 청아, 2009.
    • 김경수, 『언론이 조선왕조 500년을 일구었다 : 조선시대의 언론과 출판』, 가람기획,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