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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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비'''==
 
=='''탑비'''==
[[귀부|귀부(龜趺)]]와 [[이수|이수(螭首)]]는 화강석, 비신은 대리석으로 되어 있다.<ref>"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비", ''두산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02494&cid=40942&categoryId=33380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인용.</ref> 선사가 입적한 뒤 4년 만인 884년에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사리탑(보물 제157호)]]과 함께 조성되었다.<ref>"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3310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온라인 서비스]에서 인용.</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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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부|귀부(龜趺)]]와 [[이수|이수(螭首)]]는 화강석, 비신은 대리석으로 되어 있다.<ref>"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비", ''두산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02494&cid=40942&categoryId=33380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인용.</ref> 880년 선사가 입적한 후, 신라 [[헌강왕]]이 시호와 탑호를 추증하였고 탑비는 884년에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사리탑(보물 제157호)]]과 함께 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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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중화(中和) 3년(883, 헌강왕 9년) 봄 3월 15일에 문인 의차(義車) 등이 행장을 엮어 멀리 왕경(王京)에 나아가 비명을 세워 불도를 빛나게 할 것을 청했다. 임금이 진종(眞宗)의 이치를 흠모하고 스승을 높이는 마음을 갸륵히 여겼다. 이에 담당 관사에 명하여 시호를 정하여 보조(普照), 탑호를 창성(彰聖), 절이름을 보림(寶林)이라 하니, 이는 그 선종을 포상하는 예(禮)에서이다.<ref>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신라편,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111-112쪽.</ref>}}
  
=='''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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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의 내용'''==
 
비문은 체징의 행적을 기록하였으며, [[도의|도의(道儀)]]-[[염거|염거(廉居)]]-체징으로 법맥이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또한 도의가 신라에 [[남종선|남종선(南宗禪)]]을 전래하였을 때 신라 불교계에서 남종선을 배척하였던 분위기를 전하고 있다.<ref>"보림사 보조선사 탑비 탑본", 국립중앙박물관. [http://www.museum.go.kr/site/main/relic/search/view?relicId=1446# 주요 소장품 검색 상세정보]에서 인용.</ref>
 
비문은 체징의 행적을 기록하였으며, [[도의|도의(道儀)]]-[[염거|염거(廉居)]]-체징으로 법맥이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또한 도의가 신라에 [[남종선|남종선(南宗禪)]]을 전래하였을 때 신라 불교계에서 남종선을 배척하였던 분위기를 전하고 있다.<ref>"보림사 보조선사 탑비 탑본", 국립중앙박물관. [http://www.museum.go.kr/site/main/relic/search/view?relicId=1446# 주요 소장품 검색 상세정보]에서 인용.</ref>
 
{{Blockquote|처음 도의선사가 서당(西堂: 지장선사(智藏禪師)를 가리킴.)에게서 심인(心印)을 전수받고 후일 우리나라에 돌아와 그 선(禪)의 이치를 가르쳤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경의 가르침과 관법을 익혀 정신을 보존하는 법만을 숭상하여 무위임운(無爲任運)의 종(宗)에 모이지 아니하고 허탄한 것으로 여겨 높이어 중히 여기지 않았으니, 마치 달마조사가 양 무제를 만났음에도 뜻이 통하지 못한 것과 같았다. 이로 말미암아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함을 알고 산림에 은거하여 법을 염거선사(廉居禪師)에게 부촉했다. 이에 염거선사가 설산(雪山: 지금의 설악산) 억성사(億聖寺)에 머물면서 조사의 마음을 전하고 스승의 가르침을 여니, 체징선사가 가서 그를 섬겼다. 선사가 맑게 일심을 닦고 삼계(三界)에서 벗어나기를 구하여 목숨을 자기의 목숨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몸을 자기의 몸으로 여기지 않았다. 염거선사가 그 뜻과 기개에 짝할 만한 이가 없고 그 타고난 바탕이 범상치 않음을 알아, 현주(玄珠)를 부촉하고 법인(法印)을 전해 주었다.<ref>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신라편,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106-107쪽.</ref>}}
 
{{Blockquote|처음 도의선사가 서당(西堂: 지장선사(智藏禪師)를 가리킴.)에게서 심인(心印)을 전수받고 후일 우리나라에 돌아와 그 선(禪)의 이치를 가르쳤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경의 가르침과 관법을 익혀 정신을 보존하는 법만을 숭상하여 무위임운(無爲任運)의 종(宗)에 모이지 아니하고 허탄한 것으로 여겨 높이어 중히 여기지 않았으니, 마치 달마조사가 양 무제를 만났음에도 뜻이 통하지 못한 것과 같았다. 이로 말미암아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함을 알고 산림에 은거하여 법을 염거선사(廉居禪師)에게 부촉했다. 이에 염거선사가 설산(雪山: 지금의 설악산) 억성사(億聖寺)에 머물면서 조사의 마음을 전하고 스승의 가르침을 여니, 체징선사가 가서 그를 섬겼다. 선사가 맑게 일심을 닦고 삼계(三界)에서 벗어나기를 구하여 목숨을 자기의 목숨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몸을 자기의 몸으로 여기지 않았다. 염거선사가 그 뜻과 기개에 짝할 만한 이가 없고 그 타고난 바탕이 범상치 않음을 알아, 현주(玄珠)를 부촉하고 법인(法印)을 전해 주었다.<ref>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신라편,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106-107쪽.</ref>}}

2017년 2월 22일 (수) 23:31 판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
(長興 寶林寺 普照禪師塔碑)
대표명칭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
한자 長興 寶林寺 普照禪師塔碑
이칭 보조선사창성탑비(普照禪師彰聖塔碑)
주소 전남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 산10-1번지 보림사
문화재 지정번호 보물 제158호
문화재 지정일 1963.01.21
찬자 김영(金穎)
서자 김원(金薳), 김언경(金彦卿)
승려 체징
승탑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



정의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보림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고승 보조선사(普照禪師) 체징(體澄, 804~880)의 탑비.

탑비

귀부(龜趺)이수(螭首)는 화강석, 비신은 대리석으로 되어 있다.[1] 880년 선사가 입적한 후, 신라 헌강왕이 시호와 탑호를 추증하였고 탑비는 884년에 사리탑(보물 제157호)과 함께 조성되었다.

Quote-left.png 중화(中和) 3년(883, 헌강왕 9년) 봄 3월 15일에 문인 의차(義車) 등이 행장을 엮어 멀리 왕경(王京)에 나아가 비명을 세워 불도를 빛나게 할 것을 청했다. 임금이 진종(眞宗)의 이치를 흠모하고 스승을 높이는 마음을 갸륵히 여겼다. 이에 담당 관사에 명하여 시호를 정하여 보조(普照), 탑호를 창성(彰聖), 절이름을 보림(寶林)이라 하니, 이는 그 선종을 포상하는 예(禮)에서이다.[2] Quote-right.png
출처:


비문의 내용

비문은 체징의 행적을 기록하였으며, 도의(道儀)-염거(廉居)-체징으로 법맥이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또한 도의가 신라에 남종선(南宗禪)을 전래하였을 때 신라 불교계에서 남종선을 배척하였던 분위기를 전하고 있다.[3]

Quote-left.png 처음 도의선사가 서당(西堂: 지장선사(智藏禪師)를 가리킴.)에게서 심인(心印)을 전수받고 후일 우리나라에 돌아와 그 선(禪)의 이치를 가르쳤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경의 가르침과 관법을 익혀 정신을 보존하는 법만을 숭상하여 무위임운(無爲任運)의 종(宗)에 모이지 아니하고 허탄한 것으로 여겨 높이어 중히 여기지 않았으니, 마치 달마조사가 양 무제를 만났음에도 뜻이 통하지 못한 것과 같았다. 이로 말미암아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함을 알고 산림에 은거하여 법을 염거선사(廉居禪師)에게 부촉했다. 이에 염거선사가 설산(雪山: 지금의 설악산) 억성사(億聖寺)에 머물면서 조사의 마음을 전하고 스승의 가르침을 여니, 체징선사가 가서 그를 섬겼다. 선사가 맑게 일심을 닦고 삼계(三界)에서 벗어나기를 구하여 목숨을 자기의 목숨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몸을 자기의 몸으로 여기지 않았다. 염거선사가 그 뜻과 기개에 짝할 만한 이가 없고 그 타고난 바탕이 범상치 않음을 알아, 현주(玄珠)를 부촉하고 법인(法印)을 전해 주었다.[4] Quote-right.png
출처:


비문은 김영(金穎)이 짓고, 글씨는 김원(金薳)김언경(金彦卿)이 썼는데, 첫 줄에서 일곱 번째 줄의 '선(禪)'자까지는 해서(楷書)로 김원이 썼고 '사(師)'자 이하는 행서(行書)로 김언경이 썼다. 이것은 아마도 김원이 중도에 죽었기 때문에 그의 제자였던 김언경이 이어 쓴 것으로 생각된다. 일찍이 청(淸) 말기의 금석연구가 섭창치(葉昌熾)는 이 비에 대하여 그의 저서 『어석(語石)』에서 “일비양인서일칙(一碑兩人書一則)”[5]이라고 평한 바 있다.[6]

갤러리

관련항목

Node Relation Node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長興 寶林寺 普照禪師塔碑) 는 -를 위한 비이다 체징(體澄)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長興 寶林寺 普照禪師塔) 는 -의 승탑이다 체징(體澄)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長興 寶林寺 普照禪師塔碑) 는 -에 위치한다 장흥 보림사(長興 寶林寺)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長興 寶林寺 普照禪師塔碑) 는 -가 비문을 지었다 김영(金穎)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長興 寶林寺 普照禪師塔碑) 는 -가 비문을 썼다 김원(金薳), 김언경(金彦卿)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長興 寶林寺 普照禪師塔碑) 는 -가 비문을 새겼다 현창(賢暢)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長興 寶林寺 普照禪師塔碑) 는 -에 포함된다 보물
헌강왕 는 -의 이름을 지었다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長興 寶林寺 普照禪師塔碑)

참고문헌

각주

  1.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비",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인용.
  2. 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신라편,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111-112쪽.
  3. "보림사 보조선사 탑비 탑본", 국립중앙박물관. 주요 소장품 검색 상세정보에서 인용.
  4. 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신라편,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106-107쪽.
  5. "하나의 비에 두 사람의 글씨가 하나의 법칙을 이루었다"라는 뜻. 문화재청 고객지원센터에서 인용.
  6.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온라인 서비스에서 인용.
  7.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번호: 덕수(德壽)-00577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