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비어천가"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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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의 [[조선 목조|목조]](穆祖)부터 [[조선 태종|태종]](太宗)까지 6대에 걸친 사적(事跡)과 그에 대응되는 중국 역대 제왕의 사적을 대구로 하여 읊은 시와 주석을 수록한 책이다. 125장의 한글 가사와 그에 해당하는 한시(漢詩)를 본문으로 하고, 각 장마다 주해를 붙였다. | + | 조선의 [[조선 목조|목조]](穆祖)부터 [[조선 태종|태종]](太宗)까지 6대에 걸친 사적(事跡)과 그에 대응되는 중국 역대 제왕의 사적을 대구로 하여 읊은 시와 주석을 수록한 책이다. 한글 가사 125장의 한글 가사와 그에 해당하는 한시(漢詩)를 본문으로 하고, 각 장마다 주해를 붙였다. |
− | 이 책은 조선의 건국이 천명에 의한 것임을 | + | 이 책은 조선의 건국이 천명에 의한 것임을 역설하여 조선 건국의 정통성을 밝혔다. 임금이 되기 위해서는 피나는 노력으로 덕을 쌓아 천명을 받아야 함을 강조하고 후대 임금은 선조들이 이렇듯 어렵게 쌓아올린 공덕을 헛되이 무너뜨리지 말아야 할 것을 경계하고 있다. 본문에는 한문식 표현과 한자어가 많이 섞여 있어 현대어 문체와 비슷하며, 약 450여 개 정도의 순수 고유어가 사용되었다. |
− | 『용비어천가』는 한글 창제 이후 간행된 최초의 한글 문헌으로 | + | 『용비어천가』는 한글 창제 이후 간행된 최초의 한글 문헌으로 한글의 가장 오래된 용례를 보여주고 있다. 주해 속에 나오는 고유명사, 관직명을 한글로 표기한 것은 국어사 연구의 소중한 자료이다.<REF>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 24쪽.</ref><!-- 해설문 속의 각종 링크 정보는 기록유산스토리사업팀에서 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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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비어천가』 의 주된 내용=== | ===『용비어천가』 의 주된 내용=== | ||
− | 『용비어천가』의 내용은 임금이 되기 위해서는 피나는 노력으로 오랫동안 덕을 쌓아야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후대 왕들은 선왕의 유지를 받들어 공덕을 지키고 이어가야 한다는 | + | 『용비어천가』의 내용은 임금이 되기 위해서는 피나는 노력으로 오랫동안 덕을 쌓아야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후대 왕들은 선왕의 유지를 받들어 공덕을 지키고 이어가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
===『용비어천가』 편찬과정=== | ===『용비어천가』 편찬과정=== | ||
− | 『용비어천가』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진용비어천가전]](進龍飛御天歌箋) | + | 『용비어천가』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진용비어천가전]](進龍飛御天歌箋)」과 끄트머리에 실린 「[[용비어천가발]](龍飛御天歌跋)」에 잘 나타나 있다. 첫머리 글에 따르면 [[권제]](權踶), [[정인지]](鄭麟趾), [[안지]](安止) 등이 조선 군왕의 6대 선조들의 행적을 125장의 노래로 읊었는데 이 때가 바로 1445년(세종, 27) 4월 이었다. 이 때는 한글이 창제 반포된 이후로, 노래는 우리말로 먼저 적고, 거기에 한문시로 번역해 달아 놓았다. 끄트머리의 글을 보면 그 시기가 2년 후 1447년(세종, 29) 2월로 '1445년에 [[권제]], [[정인지]], [[안지]]가 125장의 노래를 지어 올리니 세종이 기뻐하며 이름을 ‘용비어천가’라 지었다'고 적었다. 이어서 '역사적 사실은 역사책에 있다고는 하나 사람들이 다 펴보기 어려우니 [[박팽년]](朴彭年), [[강희안]](姜希顔), [[신숙주]](申叔舟), [[이현로]](李賢老), [[성삼문]](成三問), [[이개]](李塏), [[신영손]](辛永孫) 들에게 주해를 붙이게 하여 10권의 책을 만들었다'고 썼다. 즉 이로 미루어볼 때 1445년에 노래 본문과 한시가 만들어졌고, 역사적 사실을 한문으로 기록된 것은 1447년 즈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F>허웅,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9509 용비어천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최종확인: 2017년 04월 02일--> |
{{연계자원정보 | {{연계자원정보 |
2017년 10월 14일 (토) 17:11 판
용비어천가 | |
한자명칭 | 龍飛御天歌 |
---|---|
영문명칭 | Songs of the Dragons Flying to Heaven, the first work written in hangeul. A book introducing the works of 6 kings of Joseon, from Mokjo to Taejong, and the corresponding kings of China. It is composed of poems and annotations. |
작자 | 권제, 정인지, 안지, 박팽년, 강희안, 신숙주, 이현로, 성삼문, 이개, 신영손 |
간행시기 | 1445년 초간, 1659년 중간본 |
소장처 | 국립한글박물관 |
유형 | 고서 |
크기(세로×가로) | 34.5×22.5㎝ |
판본 | 목판본 |
수량 | 5책 |
표기문자 | 한자, 한글 |
목차
정의
조선의 목조(穆祖)부터 태종(太宗)까지 6대에 걸친 사적(事跡)과 그에 대응되는 중국 역대 제왕의 사적을 대구로 하여 읊은 시와 주석을 수록한 책이다.
내용
장서각 한글특별전 내용
조선의 목조(穆祖)부터 태종(太宗)까지 6대에 걸친 사적(事跡)과 그에 대응되는 중국 역대 제왕의 사적을 대구로 하여 읊은 시와 주석을 수록한 책이다. 한글 가사 125장의 한글 가사와 그에 해당하는 한시(漢詩)를 본문으로 하고, 각 장마다 주해를 붙였다. 이 책은 조선의 건국이 천명에 의한 것임을 역설하여 조선 건국의 정통성을 밝혔다. 임금이 되기 위해서는 피나는 노력으로 덕을 쌓아 천명을 받아야 함을 강조하고 후대 임금은 선조들이 이렇듯 어렵게 쌓아올린 공덕을 헛되이 무너뜨리지 말아야 할 것을 경계하고 있다. 본문에는 한문식 표현과 한자어가 많이 섞여 있어 현대어 문체와 비슷하며, 약 450여 개 정도의 순수 고유어가 사용되었다. 『용비어천가』는 한글 창제 이후 간행된 최초의 한글 문헌으로 한글의 가장 오래된 용례를 보여주고 있다. 주해 속에 나오는 고유명사, 관직명을 한글로 표기한 것은 국어사 연구의 소중한 자료이다.[1]
『용비어천가』 판본에 대해서
『용비어천가』는 목판본 총 10권이 있다. 현재 전해지는 것은 목판본이나 세종(世宗, 1418~1450) 시기 초간본은 활자본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이전에 간행된 판본으로는 가람문고본, 일사문고본, 규장각본이 있다. 원본에 가까운 것은 가람문고본이나 1~2권 밖에 없으며 규장각본도 후쇄본이어서 탈자와 탈획이 많다. 이 밖에도 『세종실록』에 실린 실록본이 있으며 1612년(광해군, 4)에 간행된 만력본, 1659년(효종, 10)에 간행된 순치본, 1765년(영조, 41)에 간행된 건륭본 등이 있다. 이 중에서 만력본은 규장각도서의 태백산본과 오대산본 두 종류가 있다. 일제시대에 경성제국대학에서 오대산본을 저본으로 하여 기타 판본과 비교하고 수정 보완하여 영인한 일이 있었다.
『용비어천가』 의 주된 내용
『용비어천가』의 내용은 임금이 되기 위해서는 피나는 노력으로 오랫동안 덕을 쌓아야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후대 왕들은 선왕의 유지를 받들어 공덕을 지키고 이어가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용비어천가』 편찬과정
『용비어천가』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진용비어천가전(進龍飛御天歌箋)」과 끄트머리에 실린 「용비어천가발(龍飛御天歌跋)」에 잘 나타나 있다. 첫머리 글에 따르면 권제(權踶), 정인지(鄭麟趾), 안지(安止) 등이 조선 군왕의 6대 선조들의 행적을 125장의 노래로 읊었는데 이 때가 바로 1445년(세종, 27) 4월 이었다. 이 때는 한글이 창제 반포된 이후로, 노래는 우리말로 먼저 적고, 거기에 한문시로 번역해 달아 놓았다. 끄트머리의 글을 보면 그 시기가 2년 후 1447년(세종, 29) 2월로 '1445년에 권제, 정인지, 안지가 125장의 노래를 지어 올리니 세종이 기뻐하며 이름을 ‘용비어천가’라 지었다'고 적었다. 이어서 '역사적 사실은 역사책에 있다고는 하나 사람들이 다 펴보기 어려우니 박팽년(朴彭年), 강희안(姜希顔), 신숙주(申叔舟), 이현로(李賢老), 성삼문(成三問), 이개(李塏), 신영손(辛永孫) 들에게 주해를 붙이게 하여 10권의 책을 만들었다'고 썼다. 즉 이로 미루어볼 때 1445년에 노래 본문과 한시가 만들어졌고, 역사적 사실을 한문으로 기록된 것은 1447년 즈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2]
연계 자원 보러 가기 |
• 용비어천가 제2장 |
• 용비어천가 제51장 |
지식 관계망
- 세종의 한글 창제와 서적 편찬에 관한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조선 세종 | 용비어천가 편찬 | A는 B를 명령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용비어천가 편찬 | 용비어천가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집현전 | 용비어천가 편찬 | A는 B를 주관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용비어천가 | 권제 |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
용비어천가 | 정인지 |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
용비어천가 | 안지 |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
용비어천가 | 박팽년 | A는 B에 의해 주석되었다 | A ekc:annotator B |
용비어천가 | 강희안 | A는 B에 의해 주석되었다 | A ekc:annotator B |
용비어천가 | 신숙주 | A는 B에 의해 주석되었다 | A ekc:annotator B |
용비어천가 | 이현로 | A는 B에 의해 주석되었다 | A ekc:annotator B |
용비어천가 | 성삼문 | A는 B에 의해 주석되었다 | A ekc:annotator B |
용비어천가 | 이개 | A는 B에 의해 주석되었다 | A ekc:annotator B |
용비어천가 | 신영손 | A는 B에 의해 주석되었다 | A ekc:annotator B |
용비어천가 | 조선 목조 | A는 B를 언급하였다 | A ekc:mentions B |
용비어천가 | 조선 익조 | A는 B를 언급하였다 | A ekc:mentions B |
용비어천가 | 조선 환조 | A는 B를 언급하였다 | A ekc:mentions B |
용비어천가 | 조선 태종 | A는 B를 언급하였다 | A ekc:mentions B |
조선 익조 | 조선 도조 | A는 B의 아버지이다 | A ekc:hasSon B |
조선 환조 | 조선 태조 | A는 B의 아버지이다 | A ekc:hasSon B |
조선 태종 | 조선 세종 | A는 B의 아버지이다 | A ekc:hasSon B |
조선 목조 | 조선 익조 | A는 B의 아버지이다 | A ekc:hasSon B |
조선 익조 | 조선 도조 | A는 B의 아버지이다 | A ekc:hasSon B |
조선 태조 | 조선 태종 | A는 B의 아버지이다 | A ekc:hasSon B |
조선 도조 | 조선 환조 | A는 B의 아버지이다 | A ekc:hasSon B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
1442년 | 조선 세종이 용비어천가 편찬을 명하였다 |
1447년 | 용비어천가가 완성되었다 |
공간정보
위도 | 경도 | 내용 |
---|---|---|
37.521746 | 126.980956 | 용비어천가는 국립한글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 24쪽.
- ↑ 허웅, "용비어천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허웅, "용비어천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더 읽을 거리
- 논문
- 조흥욱, 「〈용비어천가〉의 창작 경위에 대한 연구」-국문가사와 한문가사 창작의 선후관계를 중심으로-」, 『語文學論叢』, Vol 20, 2001, 143~162쪽.
- 최미경, 「〈용비어천가〉에 나타난 여말선초의 영토전쟁과 변경」, 『古典文學硏究』, Vol 47, 2015, 103~152쪽.
- 이왕무,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의 재발견과 왕업(王業)의 재구성」, 『포은학연구』, Vol 15, 2015, 161~28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