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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사변과 혼란스러운 국내외 정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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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은 1874년(고종 11) 2월 8일 창덕궁의 관물헌(觀物軒)에서 [[조선 고종 | 고종(高宗)]]과 [[명성황후 | 명성황후(明成皇后, 閔妃)]]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척(坧), 자는 군방(君邦)이며, 호는 정헌(正軒)이다. 태어난 지 1년째인 1875년(고종 12) 2월 18일 [[창덕궁 인정전]](昌德宮 仁政殿)에서 순종의 세자 책봉의식이 거행되었다. 9세가 되던 1882년(고종 19) 1월 10일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하는 한편 15일에는 관례를 치루었다. 관례를 치룸과 동시에 세자빈 간택에 들어갔으며 찬성(左贊成) 민태호(閔台鎬)의 딸을 2월 19일 세자빈으로 책봉하여 [[순정 순명효황후 가례 | 가례]]를 행하였다. 민태호의 딸이 바로 훗날 [[순명효황후 |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이다.<ref>정상우"[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276 순종(조선)]",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순종은 1874년(고종 11) 2월 8일 창덕궁의 관물헌(觀物軒)에서 [[조선 고종 | 고종(高宗)]]과 [[명성황후 | 명성황후(明成皇后, 閔妃)]]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척(坧), 자는 군방(君邦)이며, 호는 정헌(正軒)이다. 태어난 지 1년째인 1875년(고종 12) 2월 18일 [[창덕궁 인정전]](昌德宮 仁政殿)에서 순종의 세자 책봉의식이 거행되었다. 9세가 되던 1882년(고종 19) 1월 10일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하는 한편 15일에는 관례를 치루었다. 관례를 치룸과 동시에 세자빈 간택에 들어갔으며 찬성(左贊成) 민태호(閔台鎬)의 딸을 2월 19일 세자빈으로 책봉하여 [[순정 순명효황후 가례 | 가례]]를 행하였다. 민태호의 딸이 바로 훗날 [[순명효황후 |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이다.<ref>정상우"[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276 순종(조선)]",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을미사변과 혼란스러운 국내외 정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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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선포와 순명효황후의 죽음===
*대한제국 선포와 순명효황후의 죽음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 이후 러시아 공사관에서 머물던 고종이 1897년 경운궁(慶運宮, [[덕수궁]](德壽宮))으로 환어하여 황제에 올라 대한제국을 선포함에 따라 순종은 황태자로, 세자빈은 황태자비로 책봉되었다. 그렇지만 황태자비는 1904년(광무 8) 11월 5일 세상을 떠났으며, 이에 2년 후인 1906년(광무 10) [[윤택영 | 윤택영(尹澤榮)]]의 딸을 태자비로 정하고, 이듬해 초 황태자비로 책봉하였으니, 바로 훗날의 [[순정효황후 |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이다.<ref>정상우"[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276 순종(조선)]",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 이후 러시아 공사관에서 머물던 고종이 1897년 경운궁(慶運宮, [[덕수궁]](德壽宮))으로 환어하여 황제에 올라 대한제국을 선포함에 따라 순종은 황태자로, 세자빈은 황태자비로 책봉되었다. 그렇지만 황태자비는 1904년(광무 8) 11월 5일 세상을 떠났으며, 이에 2년 후인 1906년(광무 10) [[윤택영 | 윤택영(尹澤榮)]]의 딸을 태자비로 정하고, 이듬해 초 황태자비로 책봉하였으니, 바로 훗날의 [[순정효황후 |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이다.<ref>정상우"[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276 순종(조선)]",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2017년 10월 5일 (목) 19:21 판

조선 순종(朝鮮 純宗)
대표명칭 조선 순종
한자표기 朝鮮 純宗
생몰년 1874-1926
이칭 이척(李坧), 융희황제(隆熙皇帝), 창덕궁 이왕(昌德宮李王)
정헌(正軒),
군방(君邦),
출생지 창덕궁 관물헌(觀物軒
시대 조선
국적 조선
대표직함
고종
명성황후
전임자 고종


정의

순종(純宗, 1874~1926)은 조선의 왕이자 대한제국의 황제이다.

내용

출생과 성장과정

순종은 1874년(고종 11) 2월 8일 창덕궁의 관물헌(觀物軒)에서 고종(高宗) 명성황후(明成皇后, 閔妃)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척(坧), 자는 군방(君邦)이며, 호는 정헌(正軒)이다. 태어난 지 1년째인 1875년(고종 12) 2월 18일 창덕궁 인정전(昌德宮 仁政殿)에서 순종의 세자 책봉의식이 거행되었다. 9세가 되던 1882년(고종 19) 1월 10일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하는 한편 15일에는 관례를 치루었다. 관례를 치룸과 동시에 세자빈 간택에 들어갔으며 찬성(左贊成) 민태호(閔台鎬)의 딸을 2월 19일 세자빈으로 책봉하여 가례를 행하였다. 민태호의 딸이 바로 훗날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이다.[1]

대한제국 선포와 순명효황후의 죽음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 이후 러시아 공사관에서 머물던 고종이 1897년 경운궁(慶運宮, 덕수궁(德壽宮))으로 환어하여 황제에 올라 대한제국을 선포함에 따라 순종은 황태자로, 세자빈은 황태자비로 책봉되었다. 그렇지만 황태자비는 1904년(광무 8) 11월 5일 세상을 떠났으며, 이에 2년 후인 1906년(광무 10) 윤택영(尹澤榮)의 딸을 태자비로 정하고, 이듬해 초 황태자비로 책봉하였으니, 바로 훗날의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이다.[2]

대한제국 제 2대 황제로 즉위

한편 후비를 맞아들인 이 해 순종은 황제에 즉위하게 된다. 그렇지만 이는 백성들에게는 커다란 비극이었을 뿐만이 아니라 순종 개인적으로도 어머니의 죽음과 부인의 사별에 이은 또 하나의 불행이었다. 즉위의 과정이 순리에 따른 것이 아닌 일제의 강제력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3]

  • 헤이그 특사 사건과 순종의 대리청정

고종이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알리기 위해 벌인 헤이그 특사 파견 사건으로 인해 양위를 강요당했다. 고종은 어쩔 수없이 황위를 순종에게 대리하라는 명을 내렸고 1907년 7월 19일 순종은 고종을 대신해 대리청정(代理聽政)을 시작하였으며, 다음 날 순종은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와 함께 외국 영사를 접견하며 대내외적으로도 순종의 대리청정은 기정사실화 되었다.[4]

  • 순종의 즉위

1907년 8월 27일 순종은 덕수궁 돈덕전(惇德殿)에 나아가 황제즉위식을 치루었으며, 호는 융희(隆熙)로 정하였다. 황제즉위식이 결정되고 난 8월 7일에는 귀비 엄씨(貴妃 嚴氏)의 아들로 순종에게는 이복동생인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을 황태자로 책봉하기로 하고, 한 달 후인 9월 7일 이를 선포하여 만방에 알렸다.[5]

국권 파탈과 최후

일제는 대한제국의 황제로서 순종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과 권위를 침략과 통치에 이용하고자 하면서도 제국으로서의 국권이라고도 할 수 있는 황제로서의 실질적인 권한은 더욱 제한하였다.[6]

  • 기유각서의 채결

1909년 7월 12일 대한제국의 사법과 감옥 업무를 일본정부에게 위탁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기유각서(己酉覺書)가 체결되었다. 이완용과 2대 통감이었던 소네 아라스케(曾禰荒助) 사이에 교환된 이 각서에 의해 대한제국의 법부(法部)와 재판소는 사라지고 통감부의 사법청에서 그 사무를 대신하게 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감옥 사무 역시 일본인들이 장악하게 되었다. 이는 일본인들이 의병을 비롯한 항일 운동이나 반일적인 행위들을 강력하게 규제할 수 있게 됨은 물론 일본인들의 불법적인 경제적․사회적 약탈에 대해서 면죄부를 줄 수도 있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7]

  • 한일합병의 가속화

이처럼 대한제국에서는 사법권을 탈취하던 1909년 7월 당시 본국 일본의 각의(閣議)에서는 ‘한일합병 실행에 관한 방침’을 통과시며 한국의 강제 병합과 대륙 침략을 위한 준비를 진행하였다.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에 의해 사살된 후후 일본은 이토의 저격을 구실삼아 한국 강점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특히 이때는 일진회(一進會)를 앞세워 여론을 조작하여 합방은 한국 백성들이 원하는 것이라며 순종을 더욱 압박하였다.[8]

  • 한일합병조약의 채결

결국 융희 4년(1910년) 8월 22일 한일합병조약(韓日合拼條約)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순종이 아닌 이완용과 당시 통감으로 조선에 주재하던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 사이에서 비밀리에 진행된 것이었다. 조약의 제 1조와 2조에는 한국 황제는 한국 전체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그리고 또 영구히 일본 황제에게 넘겨준다는 것과 일본 황제는 완전히 한국을 일본 제국에 병합하는 것을 승낙한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으며, 이로서 519년간 유지되어 온 조선왕조는 종언을 고하고, 식민지로 전락해 버렸다.[9]

의의

1907년 고종을 이어 대한제국의 2대 황제로 즉위한 이래 1910년 일본이 대한제국의 국권을 강탈하기까지 황제로 재위한 순종은 보통 무능한 군주라고 인식된다. 하지만 순종은 즉위 자체가 일본의 강제에 의한 것이었으며 즉위 직전 일제의 침략기관으로서 통감부가 설치되어 대한제국의 외정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황제로서 운신할 수 있는 여지는 그다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순종 즉위 이후에는 친일관료들과 손잡은 일제에 의해 내정이 잠식당해, 이에 따라 군주권은 제약당하며 별다른 실권을 행사하지 못하였다. 제위에서 물러난 후 이왕으로 격하된 순종은 만년을 창덕궁에서 고독하게 보냈다. 51세가 되던 1924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갈 나이가 되어 이를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지만, 이로부터 2년이 지난 1926년 4월 25일 창덕궁 대조전(昌德宮 大造殿)에서 53세를 일기로 승하하였으며, 남양주시 금곡의 유릉(裕陵)에 안장되었다. [10]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고종 순종 A는 B의 어버이이다
고종 명성황후 A는 B의 남편이다
명성황후 순종 A는 B의 어버이이다
순종 순명효황후 A는 B의 남편이다
순종 순명효황후 가례 순종 A는 B와 관련이 있다
순종 순명효황후 가례 순명효황후 A는 B와 관련이 있다
민태호 순명효황후 A는 B의 어버이이다
을미사변 명성황후 A는 B와 관련이 있다
을미사변 순명효황후 A는 B와 관련이 있다
순종 순정효황후 A는 B의 남편이다
윤택영 순정효황후 A는 B의 어버이이다
아관파천 갑오개혁 A는 B와 관련이 있다
고종 아관파천 A는 B를 주관하였다
을미사변 을사늑약 A는 B와 관련이 있다
고종 을사늑약 A는 B와 관련이 있다
고종 헤이그 특사 A는 B를 주도하였다
을사늑약 헤이그 특사 A는 B와 관련이 있다
헤이그 특사 순종 A는 B와 관련이 있다
조선 순종 영친왕 A는 B의 형제이다
귀비 엄씨 영친왕 A는 B의 어버이이다
순종 기유각서 A는 B에 참여하였다
이완용 기유각서 A는 B를 주관하였다
기유각서 순종 A는 B와 관련이 있다
순종 한일합졍 A는 B와 관련이 있다
이토 히로부미 한일합병 A는 B를 주도하였다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 A는 B를 주도하였다
안중근 일진회 A는 B와 관련이 있다
일진회 송병준 A는 B를 구성원으로 갖는다
일진회 이용구 A는 B를 구성원으로 갖는다
한일합병조약 한일합병 A는 B를 언급하였다

시간정보

시간 내용
1875년 창덕궁 인정전에서 순종의 세자 책봉의식이 거행되었다.
1882년 1월 10일 순종의 작헌례와 관례를 거행하였다
1882년 순종 순명효황후 가례를 거행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었다
1896년 갑오개혁으로 인해 고종이 아관파천을 단행하였다
1897년 고종이 경운궁으로 환궁하였다
1906년 윤택영의 딸을 태자비로 정하였다
1907년 윤태영의 딸(순정효황후)을 황태자비로 책봉하였다
1907년 헤이그 특사파견을 문제삼아 순종이 고종을 대신해 대리청정을 시작하였다
1907년 순종이 경운궁 돈덕전에서 황제즉위식을 치루었다
1910년 한일합병조약이 체결되었다.

주석

  1. 정상우"순종(조선)",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2. 정상우"순종(조선)",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3. 정상우"순종(조선)",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4. 정상우"순종(조선)",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5. 정상우"순종(조선)",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6. 정상우"순종(조선)",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7. 정상우"순종(조선)",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8. 정상우"순종(조선)",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9. 정상우"순종(조선)",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10. 정상우"순종(조선)",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논문
    • 나정원, 「융희황제 재위 시 황실의례의 정치적 의미와 오순탄신 거동」, 『무용역사기록학』Vol.42, 무용역사기록학회, 2012.
    • 이왕무, 「대한제국기 純宗의 南巡幸 연구」, 『정신문화연구』Vol.30, 한국학중앙연구원, 2007.
  • 단행본
    • 허균·고영미, 『왜 창경궁에 동물원이 생겼을까? : 순종 황제 VS 이토 히로부미』, 자음과모음, 2011.
    • 이태진 외, 『대한제국 : 잊혀진 100년 전의 황제국』, 국립고궁박물관, 2010.
    • 이혜경, 『마지막 황실의 추억 : 대한제국 마지막 왕녀 이해경이 밝히는 잊혀진 역사』, 유아이북스, 2017.
    • 윤호정, 『대한제국아 망해라 : 백성들의 눈으로 쓴 살아 있는 망국사』, 다산북스,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