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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적은 만년에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구인록(求仁錄)』(1550)·『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1549)·『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1553)·『봉선잡의(奉先雜儀)』(1550) 등의 중요한 저술을 남겼다.<ref>금장태,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5123 이언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이언적은 만년에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구인록(求仁錄)』(1550)·『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1549)·『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1553)·『봉선잡의(奉先雜儀)』(1550) 등의 중요한 저술을 남겼다.<ref>금장태,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5123 이언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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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적은 조선시대 성리학의 정립에 선구적인 인물로서 성리학의 방향과 성격을 밝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주희(朱熹)의 주리론적 입장을 정통으로 확립하여 이황(李滉)에게 전해주었다. 또한 사림의 조종으로서, 경주 고향 마을 옆에 그를 향사하는 서원이 건립되었다.. 옥산서원(玉山書院)의 뒤편에는 이언적이 권신 김안로의 전횡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거처하였다는 [[여주이씨 독락당 | 독락당]]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ref>정경희,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69 이언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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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적은 조선시대 성리학의 정립에 선구적인 인물로서 성리학의 방향과 성격을 밝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주희(朱熹)의 주리론적 입장을 정통으로 확립하여 이황(李滉)에게 전해주었다.<ref>금장태,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5123 이언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또한 사림의 조종으로서, 경주 고향 마을 옆에 그를 향사하는 서원이 건립되었다.. 옥산서원(玉山書院)의 뒤편에는 이언적이 권신 김안로의 전횡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거처하였다는 [[여주이씨 독락당 | 독락당]]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ref>정경희,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69 이언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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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1일 (일) 22:47 판


이언적(李彦迪)
대표명칭 이언적
한자표기 李彦迪
생몰년 1491-1553
본관 여강[驪江, 여주(驪州
이칭 이적(李迪)
회재(晦齋), 자계옹(紫溪翁)
복고(復古),
이번(李蕃)
손소(孫昭)의 딸 경주손씨



정의

이언적(李彦迪)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내용

생애

1545년(명종 즉위년)좌찬성이 되었는데 이 때 윤원형(尹元衡) 등이 을사사화를 일으키자 선비들을 심문하는 추관(推官)에 임명되었으나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1547년(명종 2)윤원형 일당이 조작한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많은 저술을 남긴 후 세상을 떠났다.[1]

학문과 저작활동

이언적은 1517년 영남지방 유생들 사이에 토론되었던 무극태극논쟁(無極太極論爭)에 뛰어들었고, 주희의 주리론적 견해를 바탕으로 자신의 학문적 견해를 밝혔는데, 이 논쟁에서 밝힌 그의 학설은 이황(李滉)에게로 계승되는 영남학파의 성리설에 선구가 되었다. 이언적은 만년에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구인록(求仁錄)』(1550)·『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1549)·『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1553)·『봉선잡의(奉先雜儀)』(1550) 등의 중요한 저술을 남겼다.[2]

의의

이언적은 조선시대 성리학의 정립에 선구적인 인물로서 성리학의 방향과 성격을 밝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주희(朱熹)의 주리론적 입장을 정통으로 확립하여 이황(李滉)에게 전해주었다.[3] 또한 사림의 조종으로서, 경주 고향 마을 옆에 그를 향사하는 서원이 건립되었다.. 옥산서원(玉山書院)의 뒤편에는 이언적이 권신 김안로의 전횡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거처하였다는 독락당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4]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이언적 이언적의 처 경주손씨 A는 B의 남편이다
손소 이언적의 처 경주손씨 A는 딸 B를 두었다
이언적 여주이씨 독락당 A는 B와 관련이 있다

주석

  1. 금장태, "이언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금장태, "이언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금장태, "이언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정경희, "이언적",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