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중손"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ncyves 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영상)
1번째 줄: 1번째 줄:
 
{{인물정보
 
{{인물정보
|사진=민족기록화 유적 배중손 사당 10.jpg
+
|사진=민족기록화 유적 진도 배중손 사당 10.jpg
|사진출처=민조기록화팀(2017년 4월 26일 촬영).
+
|사진출처=민족기록화팀(2017년 4월 26일 촬영).
 
|대표명칭=배중손
 
|대표명칭=배중손
 
|한자표기=裵仲孫
 
|한자표기=裵仲孫
34번째 줄: 34번째 줄:
  
 
=='''내용'''==
 
=='''내용'''==
 +
===삼별초의 대몽항쟁===
 +
1270년 원종의 환도명령에 불복하며 [[삼별초]]가 항쟁을 시작했을 때 배중손은 당시 서반(西班)의 장군으로 가장 유력한 [[삼별초]]의 지휘관이었으므로 수령으로 추대되어 항전을 주도하게 되었다. 배중손 등은 강화도에 보관된 국고를 접수하고, 본토와의 교통을 차단하여 귀족고관의 가족을 포함한 섬 주민들과 병사들의 이탈을 엄중히 방지하며 항쟁하다, 새 정부 수립 3일 후엔 대몽항쟁에 보다 적합한 진도로 본거지를 옮겼다.<br/>
 +
진도에 성곽을 구축하고 웅장한 궁전을 만든 배중손 등은 장기적인 항전태세를 갖추고, 해상으로 수송되는 세공(稅貢)을 노획하여 재정에 충당했다. 이러한 소식은 본토에 전달되어 전라도·경상도 백성들과 멀리 개경의 관노들까지 호응하여 동조했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18651&cid=42957&categoryId=42957 배중손]",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고중세사사전』<sup>online</sup></online></html>, 가람기획.</ref>
 +
{{Blockquote|......
 +
배중손은 야별초 지유(夜別抄 指諭) 노영희(廬永禧) 등과 함께 난을 일으키고, 사람을 시켜 도성[國中]을 돌아다니면서 외치게 하기를, “몽골군이 대거 와서 인민(人民)을 살육(殺戮)할 것이니, 무릇 나라를 도우려는 사람들은 모두 구정(毬庭)으로 모여라!”라고 하였다. 잠시 뒤 나라 사람들이 많이 모였으나,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가거나 앞 다투어 배를 타고 강을 건너다가 물에 빠져 죽는 사람도 많았다.<br/>
 +
(이에) 삼별초는 사람들의 출입을 금지하고, 강을 따라가면서 큰 소리로 외치기를, “무릇 양반(兩班)으로 배 안에 있으면서 내리지 않은 사람은 모두 목을 베리라!”라고 하니, 듣는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서 배에서 내렸다. 혹 배를 띄워서 개경으로 가고자 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적(賊)들이 작은 배를 타고 쫓아와서 활을 쏘므로 모두 감히 움직일 수 없었다.
 +
......|출처="[http://db.history.go.kr/KOREA/item/level.do?itemId=kr&bookId=%E5%88%97%E5%82%B3&types=r#articleList/kr_130r_0010_0120 고려사 열전 권제43, 배중손]",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데이타베이스』, <sup>online</sup></online></html>국사편찬위원회.}}
  
 +
===진도에서 항쟁하다===
 +
조정에서는 참지정사 신사전(申思佺)을 전라도 토적사(全羅道 討賊使)에 임명해 토벌하게 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단독으로 [[삼별초]]를 진압할 능력이 없었던 고려 조정은 몽고군과 연합해 공략했지만 번번이 실패하였다.<br/>
 +
여몽연합군을 결성할 때 고려군의 지휘관은 [[김방경]](金方慶)이었으며 몽고군의 지휘관은 처음에는 아해(阿海)였으나 뒤에는 흔도(忻都)로 바뀌었다. 흔도는 몽고 세조(世祖)의 조서를 배중손에게 전달하면서 항복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러자 배중손은 몽고군이 철수하면 전라도를 자기의 영토로 삼아 몽고에 내부(內附)하겠다고 하였다.<ref>"[http://jindo.grandculture.net/Contents?local=jindo&dataType=01&contents_id=GC00500622 배중손]", <html><online style="color:purple">『디지털진도문화대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진도 함락과 최후===
 
+
[[김방경]](金方慶)을 지휘관으로 하는 고려 정부군은 몽골와 연합하여 여러 차례 진도를 공략했으나 번번이 실패했으며, 몽골의 지휘관인 흔도(欣都)는 세조(世祖)의 조서를 전달하여 항복할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여·몽연합군이 진도공략에 여러 번 실패하자 이듬해인 1271년 5월, 홍다구(紅茶丘)가 이끄는 몽골군이 대군을 이끌고 출동하여 이에 합세, 격전 끝에 진도를 함락시켰다.<br/>
 
+
이때 승화후 온은 홍다구의 손에 죽고 배중손도 전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삼별초의 남은 무리들은 제주도로 본거지를 옮겨 [[김통정]](金通精)을 지휘관으로 삼아 2년간이나 항전을 계속했다.
 
+
<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18651&cid=42957&categoryId=42957 배중손]",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고중세사사전』<sup>online</sup></online></html>, 가람기획.</ref>
  
 
=='''지식 관계망'''==
 
=='''지식 관계망'''==
46번째 줄: 56번째 줄:
 
!style="width:30%"|항목A!!style="width:30%"|항목B!!style="width:25%"|관계!!style="width:15%"|비고
 
!style="width:30%"|항목A!!style="width:30%"|항목B!!style="width:25%"|관계!!style="width:15%"|비고
 
|-
 
|-
|[[배중손]] || [[삼별초]]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 [[삼별초]] || [[배중손]] || A는 B를 구성원으로 갖는다 || A foaf:member B
 +
|-
 +
| [[배중손]] || [[왕온]]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
 +
| [[배중손]] || [[남도석성]]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
 +
| [[김방경]] || [[배중손]] || A는 B를 공격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
 +
| [[홍다구]] || [[배중손]] || A는 B를 공격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
 +
| [[배중손]] || [[진도 정충사]] || A는 B에 제향되었다 || A ekc:isEnshrinedIn B
 
|}
 
|}
  
79번째 줄: 99번째 줄: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1928 배중손]",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1928 배중손]",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 "[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787948 배중손]", <html><online style="color:purple">『두피디아』<sup>online</sup></online></html>, 두산백과.
 
#* "[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787948 배중손]", <html><online style="color:purple">『두피디아』<sup>online</sup></online></html>, 두산백과.
 +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18651&cid=42957&categoryId=42957 배중손]",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고중세사사전』<sup>online</sup></online></html>, 가람기획.
 +
#* "[http://jindo.grandculture.net/Contents?local=jindo&dataType=01&contents_id=GC00500622 배중손]", <html><online style="color:purple">『디지털진도문화대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
#* [http://db.history.go.kr/KOREA/item/level.do?itemId=kr&bookId=%E5%88%97%E5%82%B3&types=r#articleList/kr_130r_0010_0120 고려사 열전 권제43, 배중손]",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데이타베이스』, <sup>online</sup></online></html>국사편찬위원회.
 +
 +
[[분류:민조기록화]][[분류:인물]]

2017년 9월 18일 (월) 12:13 판

배중손(裵仲孫)
민족기록화팀(2017년 4월 26일 촬영).
대표명칭 배중손
한자표기 裵仲孫
생몰년 -1271년(원종 12)
시대 고려
유형 무신



정의

고려 무신정권기의 무신으로서 삼별초항쟁의 지도자.

내용

삼별초의 대몽항쟁

1270년 원종의 환도명령에 불복하며 삼별초가 항쟁을 시작했을 때 배중손은 당시 서반(西班)의 장군으로 가장 유력한 삼별초의 지휘관이었으므로 수령으로 추대되어 항전을 주도하게 되었다. 배중손 등은 강화도에 보관된 국고를 접수하고, 본토와의 교통을 차단하여 귀족고관의 가족을 포함한 섬 주민들과 병사들의 이탈을 엄중히 방지하며 항쟁하다, 새 정부 수립 3일 후엔 대몽항쟁에 보다 적합한 진도로 본거지를 옮겼다.
진도에 성곽을 구축하고 웅장한 궁전을 만든 배중손 등은 장기적인 항전태세를 갖추고, 해상으로 수송되는 세공(稅貢)을 노획하여 재정에 충당했다. 이러한 소식은 본토에 전달되어 전라도·경상도 백성들과 멀리 개경의 관노들까지 호응하여 동조했다.[1]

Quote-left.png ......

배중손은 야별초 지유(夜別抄 指諭) 노영희(廬永禧) 등과 함께 난을 일으키고, 사람을 시켜 도성[國中]을 돌아다니면서 외치게 하기를, “몽골군이 대거 와서 인민(人民)을 살육(殺戮)할 것이니, 무릇 나라를 도우려는 사람들은 모두 구정(毬庭)으로 모여라!”라고 하였다. 잠시 뒤 나라 사람들이 많이 모였으나,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가거나 앞 다투어 배를 타고 강을 건너다가 물에 빠져 죽는 사람도 많았다.
(이에) 삼별초는 사람들의 출입을 금지하고, 강을 따라가면서 큰 소리로 외치기를, “무릇 양반(兩班)으로 배 안에 있으면서 내리지 않은 사람은 모두 목을 베리라!”라고 하니, 듣는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서 배에서 내렸다. 혹 배를 띄워서 개경으로 가고자 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적(賊)들이 작은 배를 타고 쫓아와서 활을 쏘므로 모두 감히 움직일 수 없었다. ......

Quote-right.png
출처: "고려사 열전 권제43, 배중손", 『한국사데이타베이스』, online국사편찬위원회.


진도에서 항쟁하다

조정에서는 참지정사 신사전(申思佺)을 전라도 토적사(全羅道 討賊使)에 임명해 토벌하게 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단독으로 삼별초를 진압할 능력이 없었던 고려 조정은 몽고군과 연합해 공략했지만 번번이 실패하였다.
여몽연합군을 결성할 때 고려군의 지휘관은 김방경(金方慶)이었으며 몽고군의 지휘관은 처음에는 아해(阿海)였으나 뒤에는 흔도(忻都)로 바뀌었다. 흔도는 몽고 세조(世祖)의 조서를 배중손에게 전달하면서 항복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러자 배중손은 몽고군이 철수하면 전라도를 자기의 영토로 삼아 몽고에 내부(內附)하겠다고 하였다.[2]

진도 함락과 최후

김방경(金方慶)을 지휘관으로 하는 고려 정부군은 몽골와 연합하여 여러 차례 진도를 공략했으나 번번이 실패했으며, 몽골의 지휘관인 흔도(欣都)는 세조(世祖)의 조서를 전달하여 항복할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여·몽연합군이 진도공략에 여러 번 실패하자 이듬해인 1271년 5월, 홍다구(紅茶丘)가 이끄는 몽골군이 대군을 이끌고 출동하여 이에 합세, 격전 끝에 진도를 함락시켰다.
이때 승화후 온은 홍다구의 손에 죽고 배중손도 전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삼별초의 남은 무리들은 제주도로 본거지를 옮겨 김통정(金通精)을 지휘관으로 삼아 2년간이나 항전을 계속했다. [3]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삼별초 배중손 A는 B를 구성원으로 갖는다 A foaf:member B
배중손 왕온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배중손 남도석성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김방경 배중손 A는 B를 공격하였다 A edm:isRelatedTo B
홍다구 배중손 A는 B를 공격하였다 A edm:isRelatedTo B
배중손 진도 정충사 A는 B에 제향되었다 A ekc:isEnshrinedIn B

시각자료

갤러리

영상

  • 디지털진도문화대전 - 배중손 사당(2012년 9월 20일)

주석

  1. "배중손", 『한국고중세사사전』online, 가람기획.
  2. "배중손", 『디지털진도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배중손", 『한국고중세사사전』online, 가람기획.
  4. 민족기록화팀 촬영(2017년 4월 26일)
  5. 민족기록화팀 촬영(2017년 4월 26일)
  6. 민족기록화팀 촬영(2017년 4월 26일)
  7. 민족기록화팀 촬영(2017년 4월 26일)
  8. 민족기록화팀 촬영(2017년 4월 26일)
  9. 민족기록화팀 촬영(2017년 4월 26일)
  10. 민족기록화팀 촬영(2017년 4월 26일)
  11. 민족기록화팀 촬영(2017년 4월 26일)
  12. 민족기록화팀 촬영(2017년 4월 26일)
  13. 민족기록화팀 촬영(2017년 4월 26일)
  14. 민족기록화팀 촬영(2017년 4월 26일)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1. 웹자원
    • "배중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배중손", 『두피디아』online, 두산백과.
    • "배중손", 『한국고중세사사전』online, 가람기획.
    • "배중손", 『디지털진도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고려사 열전 권제43, 배중손", 『한국사데이타베이스』, online국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