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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 궁중기록화 복식 도포01 민속박물관.jpg | 신광헌(申光憲, 1731~1784) 묘 출토 도포의 앞면.<ref>국립민속박물관(http://www.nfm.go.kr/) 소장.</ref> | 파일: 궁중기록화 복식 도포01 민속박물관.jpg | 신광헌(申光憲, 1731~1784) 묘 출토 도포의 앞면.<ref>국립민속박물관(http://www.nfm.go.kr/) 소장.</ref> | ||
파일: 궁중기록화 복식 도포02 민속박물관.jpg | 신광헌(申光憲, 1731~1784) 묘 출토 도포의 뒷면.<ref>국립민속박물관(http://www.nfm.go.kr/) 소장.</ref> | 파일: 궁중기록화 복식 도포02 민속박물관.jpg | 신광헌(申光憲, 1731~1784) 묘 출토 도포의 뒷면.<ref>국립민속박물관(http://www.nfm.go.kr/) 소장.</ref> | ||
− | 파일: 궁중기록화 복식 도포03 경기도박물관.jpg | <ref>경기도박물관, 『출토복식 명품선』, 경기도박물관, 2008, 42쪽.</ref> | + | 파일: 궁중기록화 복식 도포03 경기도박물관.jpg | 이혁(李爀, 1661~1722)묘 출토 단령 앞면.<ref>경기도박물관, 『출토복식 명품선』, 경기도박물관, 2008, 42쪽.</ref> |
− | 파일: 궁중기록화 복식 도포04 경기도박물관.jpg | <ref>경기도박물관, 『출토복식 명품선』, 경기도박물관, 2008, 43쪽.</ref> | + | 파일: 궁중기록화 복식 도포04 경기도박물관.jpg | 이혁(李爀, 1661~1722)묘 출토 단령 뒷면.<ref>경기도박물관, 『출토복식 명품선』, 경기도박물관, 2008, 43쪽.</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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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10일 (일) 01:40 판
도포 (道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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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도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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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道袍 |
구분 | 의복 |
착용신분 | 왕, 왕세자, 왕세손, 백관 |
착용성별 | 남성 |
목차
정의
조선시대 사대부의 대표적인 포(袍, 겉옷)의 하나로, 왕은 물론 왕세자의 관례와 사대부의 외출복 및 의례복, 유생들의 일상복으로 착용한 포(袍)이다.[1]
내용
깃은 곧고 소매가 넓으며 뒷자락이 이중으로 되어 있는 특징이 있다. 무와 등바대에 연결된 자락은 뒷중심이 터져 있어 활동이 편리하며 뒷길과 연결된 자락이 터진 부분을 가려주어 말을 탈 때 하의(下衣)가 보이지 않게 한다.[2] 창의를 받침옷으로 입고, 외출시나 의례에 참석할 때는 갓을 쓰고, 허리에는 광다회나 세조대를 두른다. 그 외에 평상시에 착용할 때는 정자관이나 사방관을 착용했다.[3] 박지원과 서유구 등 조선 후기 학자들은 도포의 유래를 ‘신라의 제도를 답습한 것이 많은데, 신라는 처음에 중국의 제도를 모방했으나, 세속에서 불교를 숭상했기 때문에 여염집에서는 중국 승려들의 복장을 본받은 경우가 많았고, 지금까지 천여 년이 지나도록 바꿀 줄을 모른다.’고 기록하였다. 도포는 조선시대에 입기 시작한 옷으로, 신라시대에는 물론 이런 옷이 없었고 중국 승려의 복장 또한 아니다.[4] 도포는 직령(直領)에서 유래된 옷으로, 직령에는 옆에 무가 붙어있는데, 이 무가 뒷자락 안으로 들어가서 고정되어 이중 뒷자락이 되면서 도포가 만들어졌다.[5]
조선 말기인 1884년(고종 21) 의제 개혁을 통해 넓은 소매 의복을 폐지하면서 대부분의 포류들을 두루마기(남성)로 대체하는데 1900년 유림들의 저항으로 소매가 넓은 포 중 도포만을 허용하게 됨에 따라 다시 도포를 의례복으로 착용하게 되었다.[6]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왕 | 도포 | A는 B를 착용하였다 | A ekc:wears B |
왕세자 | 도포 | A는 B를 착용하였다 | A ekc:wears B |
왕세손 | 도포 | A는 B를 착용한다 | A ekc:wears B |
백관 | 도포 | A는 B를 착용한다 | A ekc:wears B |
왕의 편복 | 도포 | A는 B를 일습으로 갖춘다 | A dcterms:hasPart B |
왕세자의 편복 | 도포 | A는 B를 일습으로 갖춘다 | A dcterms:hasPart B |
왕세손의 편복 | 도포 | A는 B를 일습으로 갖춘다 | A dcterms:hasPart B |
백관의 편복 | 도포 | A는 B를 일습으로 갖춘다 | A dcterms:hasPart B |
도포 | 갓 | A는 B와 같이 착용하였다 | A ekc:goesWith B |
도포 | 세조대 | A는 B와 같이 착용하였다 | A ekc:goesWith B |
시간정보
공간정보
시각자료
갤러리
신광헌(申光憲, 1731~1784) 묘 출토 도포의 앞면.[7]
신광헌(申光憲, 1731~1784) 묘 출토 도포의 뒷면.[8]
이혁(李爀, 1661~1722)묘 출토 단령 앞면.[9]
이혁(李爀, 1661~1722)묘 출토 단령 뒷면.[10]
영상
주석
- ↑ 강순제·김미자·김정호·백영자·이은주·조우현·조효숙·홍나영, 『한국복식사전』, 민속원, 2015, 247쪽.
- ↑ 국립고궁박물관, 『왕실문화도감』, 국립고궁박물관, 2013, 153쪽.
- ↑ 국립고궁박물관, 『왕실문화도감』, 국립고궁박물관, 2013, 153쪽.
- ↑ 차서연, 「徐有榘의 服飾觀- 「贍用志」 ‘服飾之具’의 분석을 중심으로 -」,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1, 58쪽.
- ↑ 이은주, 「道袍 양식의 발전에 대한 갈등․기능론적 분석」, 서울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9, 25, 115쪽.
- ↑ 강순제·김미자·김정호·백영자·이은주·조우현·조효숙·홍나영, 『한국복식사전』, 민속원, 2015, 248쪽.
- ↑ 국립민속박물관(http://www.nfm.go.kr/) 소장.
- ↑ 국립민속박물관(http://www.nfm.go.kr/) 소장.
- ↑ 경기도박물관, 『출토복식 명품선』, 경기도박물관, 2008, 42쪽.
- ↑ 경기도박물관, 『출토복식 명품선』, 경기도박물관, 2008, 43쪽.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강순제·김미자·김정호·백영자·이은주·조우현·조효숙·홍나영, 『한국복식사전』, 민속원, 2015.
- 경기도박물관, 『출토복식 명품선』, 경기도박물관, 2008.
- 국립고궁박물관, 『왕실문화도감』, 국립고궁박물관, 2013.
- 金美子, 「直領에 관한 硏究」, 『服飾』 5권, 한국복식학회, 1981.
- 李明姬, 「도포에 關한 硏究」, 『한국의류학회지』 1권 1호, 한국의류학회, 1977.
- 방현미, 「도포에 관한 고찰」, 세종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7.
- 안전혜, 「朝鮮時代 出土된 道袍의 형태 및 바느질 연구」,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2.
- 이은주, 「도포 형태의 전래와 발전 양상에 관한 실증적 고찰」, 『服飾』 6권, 한국복식학회, 1998.
- 李恩珠, 「道袍 양식의 발전에 대한 갈등ㆍ기능론적 분석」, 서울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9.
- 이주영ㆍ권영숙, 「직령의 부위별 형태 특성과 상호간의 관련성 연구」, 『服飾』 54권 5호, 한국복식학회, 2004.
- 李珠英, 「조선시대 직령(直領) 연구」, 석사학위논문, 부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1.
- 李珠英ㆍ權瑛淑, 「조선시대 직령(直領)제도 –조선왕조실록을 중심으로-」, 『복식문화연구』 8권 2호, 복식문화학회, 2000.
- 이해영ㆍ김문자, 「우리나라 袍의 類型 및 源流에 관한 硏究」, 『服飾』 15권, 한국복식학회, 1990.
- 趙槿姬, 「道袍에 관한 硏究」,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6.
- 趙槿姬, 「道袍에 대한 史的考察 및 民俗學的 硏究 -嶺東地域을 中心으로-」, 『한국의류학회지』 12권 1호, 한국의류학회, 1988.
- 차서연, 「徐有榘의 服飾觀- 「贍用志」 ‘服飾之具’의 분석을 중심으로 -」,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