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봉화 태자사"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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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krpia.co.kr/viewer/open?plctId=PLCT00004978&nodeId=NODE04080231&medaId=MEDA04195135 묵재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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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비(奉化太子寺朗空大師塔碑)는 원래 경상북도 봉화에 있던 태자사에 954년에 세워졌으나, 태자사는 조선 중기에 폐사되었다. 이후 비는 경상북도 영천(榮川)으로 옮겨졌는데, 이웃 군의 수령으로 있던 조선 시대 최고의 서화고동(書畵古董)의 감식가이자 수집가였던 상고당(尙古堂) 김광수(金光遂)[1696~?]가 이를 탁본하여 세상에 돌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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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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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자사(太子寺)의 위치는 정확히 지적하기 어렵다. 다만 1964년부터 실시한 신라오악학술조사의 일환으로 이 절터 탐색을 시도한 일이 있었고, 그 결과 안동시 도산면 태자동의 폐사지 한 곳을 이 절터로 추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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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자사에 관한 옛 기록들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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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종실록(太宗實錄)』 태종 7년 12월 2일조에 제주자복사(諸州資福寺)를 논하는 가운데 태자사를 ‘봉화태자사(奉化太子寺)’로 기록하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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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태자사를 ‘봉화현불우(奉化縣佛宇)’조에 기록하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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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에는 비의 원소재지를 ‘봉화군(奉化郡) 명호면(明湖面)’이라 하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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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성말치(葛城末治)의 『조선금석고(朝鮮金石攷)』에는 ‘봉화군(奉化郡) 하남면(下南面) 태자리(太子里)’로 기록하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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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우고(梵宇攷)』에는 ‘봉화태자사’로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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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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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1일 (금) 17:37 판

奉化 太子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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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奉化 太子寺


정의

내용

탑비(奉化太子寺朗空大師塔碑)는 원래 경상북도 봉화에 있던 태자사에 954년에 세워졌으나, 태자사는 조선 중기에 폐사되었다. 이후 비는 경상북도 영천(榮川)으로 옮겨졌는데, 이웃 군의 수령으로 있던 조선 시대 최고의 서화고동(書畵古董)의 감식가이자 수집가였던 상고당(尙古堂) 김광수(金光遂)[1696~?]가 이를 탁본하여 세상에 돌렸다고 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태자사(太子寺)의 위치는 정확히 지적하기 어렵다. 다만 1964년부터 실시한 신라오악학술조사의 일환으로 이 절터 탐색을 시도한 일이 있었고, 그 결과 안동시 도산면 태자동의 폐사지 한 곳을 이 절터로 추정하였다.

태자사에 관한 옛 기록들은 다음과 같다.

• 『태종실록(太宗實錄)』 태종 7년 12월 2일조에 제주자복사(諸州資福寺)를 논하는 가운데 태자사를 ‘봉화태자사(奉化太子寺)’로 기록하였고,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태자사를 ‘봉화현불우(奉化縣佛宇)’조에 기록하였고, •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에는 비의 원소재지를 ‘봉화군(奉化郡) 명호면(明湖面)’이라 하였고, • 갈성말치(葛城末治)의 『조선금석고(朝鮮金石攷)』에는 ‘봉화군(奉化郡) 하남면(下南面) 태자리(太子里)’로 기록하였고, • 『범우고(梵宇攷)』에는 ‘봉화태자사’로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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