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기록화관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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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의병 [[신돌석]]이 [[태백산전투]]에서 왜군을 격멸하고 있는 장면을 담은 [[정창섭]] 화백의 민족기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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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의병 [[신돌석]]이 [[태백산전투]]에서 왜군을 격멸하고 있는 장면을 담은 [[정창섭]]민족기록화.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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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31일 (목) 12:27 판


태백산전투
정창섭-태백산전투(신돌석)-1975s.jpg
작가 정창섭
제작연도 1975년
규격 300호(197x290.9cm)
유형 계몽/항일
분류 유화
소장처 미상


정의

조선 말기 의병 신돌석태백산전투에서 왜군을 격멸하고 있는 장면을 담은 정창섭의 민족기록화.

설명

작품 소재

평민 출신 의병대장인 신돌석은 특유의 용맹함과 민첩함으로'태백산 호랑이'라는 별명을 가진 사람이다. 그는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동생 신경우과 함께 농민군 300명을 모아 영릉의진(寧陵義陳)을 창건하였다. 영릉의진(寧陵義陳)은 반침략·반봉건을 기본 이념으로 하는 천민·평민으로 구성되어 있는 의병부대로, 1906년 4월에서 1908년 12월 신돌석이 사망할 때까지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그 결과 신돌석 부대는 1905년 4월 울진군에서 일본군의 배 9척을 기습 파괴했으며, 경상도와 강원도가 접경하는 동해안의 영해를 중심으로 강원 내륙 지방까지 세력을 확대했다. 이때부터 신돌석은 '태백산 호랑이'로 불리게 되었다. 그는 한국군 진위대나 일본군과의 정면 충돌을 회피하면서, 교묘한 게릴라 전법으로 장기간 전투를 계속하였다.


Quote-left.png

"효용(驍勇)이 나는 것과 같아 필마단창(匹馬單槍)으로 적을 무수히 죽이니 일본인은 백가지의 계책으로 이를 잡으려 하였으나 잡지 못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2) 을사·병오·정미 의병항전과 유생 의병장", 『한국사데이터베이스』online, 국사편찬위원회.


이 작품은 태백산에서 영릉의진이 일본군을 격퇴하고 있는 모습을 담고 있다. 작품 중앙에 흰 옷을 입고 낫을 들고있는 사람이 신돌석으로 추정된다.

그림 읽기

신돌석정창섭-태백산전투(신돌석)-1975s.jpg
이 그림에 대한 정보

지식 관계망

추후 제작 및 삽입 예정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정창섭 정창섭-태백산전투 A는 B를 그렸다 1975년
정창섭-태백산전투 신돌석 A는 B를 소재로 삼았다
정창섭-태백산전투 영릉의진 A는 B를 소재로 삼았다
정창섭-태백산전투 태백산 A는 B를 배경으로 한다
청와대 정창섭-태백산전투 A는 B를 대여하였다 1991년 1월 31일-1992년 1월 30일
신돌석 을미의병 A는 B에 참가하였다
신돌석 정미의병 A는 B에 참가하였다
신돌석 영릉의진 A는 B를 창립하였다 1905년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975년 정창섭이 정창섭-태백산전투를 그렸다.
1991년 1월 31일-1992년 1월 30일 청와대가 정창섭-태백산전투을 대여하였다
1895년 10월 을미의병이 일어났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1905년 영릉의진신돌석에 의해 창립되었다
1907년 8월 1일 정미의병이 일어났다

공간정보

위도 경도 내용
37.586807 126.974811 청와대가 정창섭-태백산전투을 대여하였다

관련 민족기록화

시각자료

가상현실

추후 제작 및 삽입 예정

갤러리

영상

주석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1. 웹자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