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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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1일 (수) 00:02 판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河東 雙磎寺 眞鑑禪師塔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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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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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河東 雙磎寺 眞鑑禪師塔碑 |
이칭 |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雙磎寺眞鑑禪師大空塔碑) |
주소 | 경남 하동군 화개면 쌍계사길 59 |
문화재 지정번호 | 국보 47호 |
문화재 지정일 | 1962.12.20 |
찬자 | 최치원(崔致遠) |
서자 | 최치원(崔致遠) |
각자 | 환영(奐榮) |
서체 | 전서(篆書) |
승려 | 혜소(慧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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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쌍계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고승 혜소(慧昭)의 탑비.
탑비
전체높이 3.63m, 비신높이 2.13m, 너비 1.035m, 두께 22.5㎝.
귀부(龜趺)와 이수(螭首) 및 탑신이 완전한 탑비로, 신라 말기에 나타나는 탑비 양식에 따라 귀두(龜頭)는 용두화(龍頭化)되었으며, 귀부(龜趺)의 등에는 6각의 귀갑문(龜甲文)이 크고 간편하게 조식되어 있다. 진감선사가 입적한 후, 857년 7월에 탑비가 세워졌으며, 비문을 짓고 쓴 이는 최치원이다. [1]
비문
비문에는 염거의 제자인 지선선사 체징(體澄)이 선종 가지산문을 열고 이를 신라 헌안왕과 왕실이 후원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도의가 신라에서 최초로 남종선을 전래하였을 때에 신라 불교계에서 남종선을 배척하였던 분위기를 전하고 있다.[2]
비문은 김영(金穎)이 짓고, 글씨는 김원(金薳)과 김언경(金彦卿)이 썼는데, 첫 줄에서 일곱 번째 줄의 '선(禪)'자까지는 해서(楷書)로 김원이 썼고 '사(師)'자 이하는 행서(行書)로 김언경이 썼다. 이것은 아마도 김원이 중도에 죽었기 때문에 그의 제자였던 김언경이 이어 쓴 것으로 생각된다. 일찍이 청(淸) 말기의 금석연구가 섭창치(葉昌熾)는 이 비에 대하여 그의 저서 『어석(語石)』에서 “일비양인서일칙(一碑兩人書一則)”[3]이라고 평한 바 있다.[4]
비문 보러가기
가상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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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프
관련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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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河東 雙磎寺 眞鑑禪師塔碑) | 는 -를 위한 비이다 | 혜소(惠昭) |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河東 雙磎寺 眞鑑禪師塔碑) | 는 -에 위치한다 | 하동 쌍계사(河東 雙磎寺) |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河東 雙磎寺 眞鑑禪師塔碑) | 는 -가 비문을 지었다 | 최치원(崔致遠) |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長興 寶林寺 普照禪師塔碑) | 는 -가 비문을 썼다 | 최치원(崔致遠) |
각주
- ↑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온라인 서비스에서 인용.
- ↑ "보림사 보조선사 탑비 탑본", 국립중앙박물관. 주요 소장품 검색 상세정보에서 인용.
- ↑ "하나의 비에 두 사람의 글씨가 하나의 법칙을 이루었다"라는 뜻. 문화재청 고객지원센터에서 인용.
- ↑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온라인 서비스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