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도윤"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ncyves 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구법유학)
27번째 줄: 27번째 줄:
  
 
===가계와 탄생===
 
===가계와 탄생===
 
+
도윤의 속성은 박씨이고, 오늘날 황해도 봉산에 해당되는 휴암현 사람이다. 여러 대에 걸쳐 호족으로 지냈으며, 조부의 벼슬이 군보에 자세히 기록될 정도로 영향력 있는 집안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찬란한 광채가 방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16개월 만에 그를 낳았다고 한다.<ref>이일야, 182쪽.</ref>
 
{{blockquote|
 
{{blockquote|
 
신라인으로 구산선문 가운데 사자선문(사자선문)의 개조이며, 남전보원(남전보원)의 법사이다. 성은 박씨이며, 한주 휴암현(휴암현, 오늘날의 황해도 봉산) 사람으로 지방호족 가문엔서 태어났다.
 
신라인으로 구산선문 가운데 사자선문(사자선문)의 개조이며, 남전보원(남전보원)의 법사이다. 성은 박씨이며, 한주 휴암현(휴암현, 오늘날의 황해도 봉산) 사람으로 지방호족 가문엔서 태어났다.
34번째 줄: 34번째 줄:
  
 
===출가수행===
 
===출가수행===
18세에 출가하여 귀신사(鬼神寺)에서 『화엄경』을 공부하였으나, 원돈(圓頓)을 가르치는 화엄이 심인(心印)을 전하는 선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여 825년 당나라로 갔다.
+
18세에 출가하여 귀신사(鬼神寺)에서 『화엄경』을 공부하였으나, 원돈(圓頓)을 가르치는 화엄이 심인(心印)을 전하는 선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여 당나라로 유학을 결심했다.<ref>민백</ref>
 
{{blockquote|
 
{{blockquote|
 
18세에 출가하여 귀신사에서 화엄을 배웠지만 "원돈의 가르침이 어찌 심인의 묘용만 하겠는가?" 하고 선법을 수학하게 되었다고 한다.
 
18세에 출가하여 귀신사에서 화엄을 배웠지만 "원돈의 가르침이 어찌 심인의 묘용만 하겠는가?" 하고 선법을 수학하게 되었다고 한다.
|출처=
+
|출처=정영식, 『조당집 읽기』, 운주사, 302쪽.
 
}}
 
}}
  
 
===구법유학===
 
===구법유학===
도일(道一)의 제자 보원(普願)은 첫눈에 법기(法器)임을 알고 그에게 심인을 전한 뒤 그의 법인(法印)이 신라로 간다고 탄식하였다고 한다.
+
도윤이 유학을 떠난 것은 28세가 되던 825년이다. 그는 중국으로 가는 사신의 배를 이용하여 구법의 길에 올랐다. 그가 중국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찾은 이는 남전 보원이다. 남전은 마조 도일의 제자로서 당시에 널리 알려진 선승이었다. 도윤이 큰 그릇임을 알아본 스승은 기쁘면서도 아쉬워 한다.<ref>이일야, 183쪽.</ref> 그의 법인(法印)이 신라로 간다고 탄식하였다고 한다.<ref>민백</ref>
 
{{blockquote|
 
{{blockquote|
 
825년(헌덕왕 17) 사신들을 따라 당나라에 들어가 남전보원을 찾아가 예를 드리니 첫눈에 법기임을 알고 "오종의 범인이 동국으로 돌아가는구나!"라고 찬탄했다고 한다.
 
825년(헌덕왕 17) 사신들을 따라 당나라에 들어가 남전보원을 찾아가 예를 드리니 첫눈에 법기임을 알고 "오종의 범인이 동국으로 돌아가는구나!"라고 찬탄했다고 한다.
|출처=
+
|출처=정영식, 『조당집 읽기』, 운주사, 302쪽.
 
}}
 
}}
  
 
===활동===
 
===활동===
847년(문성왕 9) 범일(梵日)과 함께 귀국하여 금강산에 머무르며 후학들을 지도하였는데, 경문왕도 그때 그에게 귀의하였다.
+
남전의 법을 받고 도윤이 귀국한 것은 입당 후 22년이 지난 847년(문성왕 9)이다. 그는 귀국한 후 금강산 장담사에 머물게 된다. 이곳에서 그의 제자가 되는 절중을 만나게 된다. 절중은 부석사에서 화엄을 공부하다가 스승을 찾아 금강산으로 와서 도윤을 만난 것이다. 여기에서 도윤은 경문왕의 귀의를 받고 쌍봉사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쌍봉사에 주석한 도윤은 입적할 때까지 이곳에서 선법을 펼치게 된다.<ref>184-186쪽</ref>
 +
 
 +
{{blockquote|
 +
849년(문성왕 9) 4월에 다시 신라에 돌아와 풍악에 선법을 펴니 학인이 운집하였다. 이때 경문왕이 소식을 듣고 귀의하였다. 법계는 도윤 →절중·경유로 이어진다.
 +
|출처=정영식, 『조당집 읽기』, 운주사, 302쪽.
 +
}}
  
 
===입적===
 
===입적===
868년 4월 18일 문인들을 모아 법을 널리 펼 것을 당부하고 나이 71세, 법랍 44세로 입적하였다. 시호는 철감선사(澈鑒禪師)이며, 탑호(塔號)는 징소(澄昭)이다. 죽을 때 오색과명이 입에서 나와 공중에 상서로운 상이 퍼져나갔다하여 서기만천철감국사(瑞氣滿天澈鑒國師)라고도 한다.
+
868년 4월 18일 문인들을 모아 법을 널리 펼 것을 당부하고 나이 71세, 법랍 44세로 입적하였다. 시호는 철감선사(澈鑒禪師)이며, 탑호(塔號)는 징소(澄昭)이다. 죽을 때 오색과명이 입에서 나와 공중에 상서로운 상이 퍼져나갔다하여 서기만천철감국사(瑞氣滿天澈鑒國師)라고도 한다.<ref>민백</ref>
  
 
=='''지식관계망'''==
 
=='''지식관계망'''==

2017년 8월 19일 (토) 02:17 판

도윤(道允)
BHST Monk1.png
대표명칭 도윤
한자 道允
생몰년 798년(소성왕 원년)-868년(경문왕 8)
시호 철감(澈鑒)
쌍봉(雙峰)
도윤(道允)
탑호 징소(澄昭)
성씨 박씨(朴氏)
출신지 경기도 시흥
승탑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탑
승탑비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탑비



정의

신라시대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도윤의 속성은 박씨이고, 오늘날 황해도 봉산에 해당되는 휴암현 사람이다. 여러 대에 걸쳐 호족으로 지냈으며, 조부의 벼슬이 군보에 자세히 기록될 정도로 영향력 있는 집안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찬란한 광채가 방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16개월 만에 그를 낳았다고 한다.[1]

Quote-left.png

신라인으로 구산선문 가운데 사자선문(사자선문)의 개조이며, 남전보원(남전보원)의 법사이다. 성은 박씨이며, 한주 휴암현(휴암현, 오늘날의 황해도 봉산) 사람으로 지방호족 가문엔서 태어났다.

Quote-right.png
출처: 정영식, 『조당집 읽기』, 운주사, 302쪽.


출가수행

18세에 출가하여 귀신사(鬼神寺)에서 『화엄경』을 공부하였으나, 원돈(圓頓)을 가르치는 화엄이 심인(心印)을 전하는 선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여 당나라로 유학을 결심했다.[2]

Quote-left.png

18세에 출가하여 귀신사에서 화엄을 배웠지만 "원돈의 가르침이 어찌 심인의 묘용만 하겠는가?" 하고 선법을 수학하게 되었다고 한다.

Quote-right.png
출처: 정영식, 『조당집 읽기』, 운주사, 302쪽.


구법유학

도윤이 유학을 떠난 것은 28세가 되던 825년이다. 그는 중국으로 가는 사신의 배를 이용하여 구법의 길에 올랐다. 그가 중국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찾은 이는 남전 보원이다. 남전은 마조 도일의 제자로서 당시에 널리 알려진 선승이었다. 도윤이 큰 그릇임을 알아본 스승은 기쁘면서도 아쉬워 한다.[3] 그의 법인(法印)이 신라로 간다고 탄식하였다고 한다.[4]

Quote-left.png

825년(헌덕왕 17) 사신들을 따라 당나라에 들어가 남전보원을 찾아가 예를 드리니 첫눈에 법기임을 알고 "오종의 범인이 동국으로 돌아가는구나!"라고 찬탄했다고 한다.

Quote-right.png
출처: 정영식, 『조당집 읽기』, 운주사, 302쪽.


활동

남전의 법을 받고 도윤이 귀국한 것은 입당 후 22년이 지난 847년(문성왕 9)이다. 그는 귀국한 후 금강산 장담사에 머물게 된다. 이곳에서 그의 제자가 되는 절중을 만나게 된다. 절중은 부석사에서 화엄을 공부하다가 스승을 찾아 금강산으로 와서 도윤을 만난 것이다. 여기에서 도윤은 경문왕의 귀의를 받고 쌍봉사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쌍봉사에 주석한 도윤은 입적할 때까지 이곳에서 선법을 펼치게 된다.[5]


Quote-left.png

849년(문성왕 9) 4월에 다시 신라에 돌아와 풍악에 선법을 펴니 학인이 운집하였다. 이때 경문왕이 소식을 듣고 귀의하였다. 법계는 도윤 →절중·경유로 이어진다.

Quote-right.png
출처: 정영식, 『조당집 읽기』, 운주사, 302쪽.


입적

868년 4월 18일 문인들을 모아 법을 널리 펼 것을 당부하고 나이 71세, 법랍 44세로 입적하였다. 시호는 철감선사(澈鑒禪師)이며, 탑호(塔號)는 징소(澄昭)이다. 죽을 때 오색과명이 입에서 나와 공중에 상서로운 상이 퍼져나갔다하여 서기만천철감국사(瑞氣滿天澈鑒國師)라고도 한다.[6]

지식관계망

"그래프 삽입"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1. 이일야, 182쪽.
  2. 민백
  3. 이일야, 183쪽.
  4. 민백
  5. 184-186쪽
  6. 민백

참고문헌

  • 「雙峯和尙道允」, 『祖堂集』 卷第十七. 온라인 참조: "雙峯和尙道允", 조당집, 한국고대사료집성 중국편, 『한국사데이터베이스』online, 국사편찬위원회.
  • 이일야, "우리의 법인(法印)이 모두 동국으로 돌아가는구나", 법보신문, 2014년 10월 15일.
  • 이일야, 『아홉 개의 산문이 열리다』, 조계종출판사, 2016.
  • 정영식, 『조당집 읽기』, 운주사, 2016.
  • 조범환, 「신라 하대 도윤선사와 사자산문의 개창」, 『신라사학보』 10, 신라사학회, 2007, 223-252쪽.
  • 최연식, 「사자산 선문의 성립과정에 대한 재검토」, 『불교학연구』 21, 불교학연구회, 219-25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