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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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호선, 「고려말 幻庵混修의 활동과 그 의미」, 『한국선학』 43, 한국선학회, 2016, 5-34쪽.
 
* 강호선, 「고려말 幻庵混修의 활동과 그 의미」, 『한국선학』 43, 한국선학회, 2016, 5-34쪽.
 
* 곽승훈, 「고려 말 幻庵 선사의 『護法論』 간행 배포와 그 영향」, 『한국민족문화』 40,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11, 167-199쪽.
 
* 곽승훈, 「고려 말 幻庵 선사의 『護法論』 간행 배포와 그 영향」, 『한국민족문화』 40,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11, 167-1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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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3905 혼수]",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 이지관, "충주 청룡사 보각국사 환암 정혜원융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3, 30-63쪽.
 
* 이지관, "충주 청룡사 보각국사 환암 정혜원융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3, 30-63쪽.
 
* 황인규, 「幻庵 混修의 生涯와 佛敎史的 位置」, 『경주사학』 18, 경주사학회, 1999, 101-131쪽.
 
* 황인규, 「幻庵 混修의 生涯와 佛敎史的 位置」, 『경주사학』 18, 경주사학회, 1999, 101-131쪽.

2017년 8월 12일 (토) 18:32 판

혼수(混修)
BHST Monk1.png
대표명칭 혼수
영문명칭 Honsu
한자 混修
생몰년 1320(충숙왕 7)-1392(태조 1)
시호 보각(普覺)
환암(幻菴)
혼수(混修)
탑호 편광(遍光)
무작(無作)
성씨 조(趙)
출신지 광주(廣州: 현재의 경기도 광주)
승탑비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忠州 靑龍寺址 普覺國師塔碑)



정의

고려 말 조선 초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혼수의 자는 무작(無作)이며, 호는 환암(幻菴)이다. 혼수의 기록이 남아 있는 문집류에는 환노(幻老) 또는 환옹(幻翁)이라고도 지칭한 사례가 있다. 1320년(충숙왕 7) 3월 13일에 그의 아버지가 부임한 지금의 경상북도 예천 용궁면(龍州)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헌부산랑 조숙령(풍양 조씨)이고 어머니 청주 경씨이다.[1] 아버지가 사냥 나갔다가 새끼를 품은 사슴을 만나 사냥을 그만 두고 돌아와 곧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어린 그를 데리고 친가로 돌아왔다. 혼수는 어려서 몸이 약하여 병을 앓았는데 출가하면 건강하고 큰 스님이 될 것이라는 점술사의 예언에 따라 어머니의 추천으로 계송(繼松) 대선사에게 12세 출가한다.[2][3]

Quote-left.png 어느 날 아버지가 사냥을 나가 사슴 한 마리를 보았는데 사슴이 달아나면서 멈추고 되돌아보곤 하기를 거듭하였다. 활을 쏘려 하다가 이상하게 여겨 돌아보니 새끼가 어머를 따라오고 있었다. 이에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짐승들이 새끼를 염려하는 것이 사람과 어찌 다르랴' 하고 곧 사냥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와 몇 개월 후 병을 앓다가 용주(지금의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의 임지에서 죽었다.

스님은 어려서 부터 몸이 약하여 항상 병을 앓았다. 점장이에게 물었더니 "이 아이는 출가하여 스님이 되면 영원히 병을 앓지 않고 항상 건강하여 마침내 큰 스님이 될 것이다"라고 예언하였다. 나이 12세가 지나자 어머니가 아들에게 이르기를 "네가 태어났을 때 너의 아버지가 너를 사랑하였으므로 사슴의 어미가 새끼를 염려하는 것을 보고 감득하여 사냥하는 것을 중지하였으니 이는 곧 네가 자인(慈仁)으로 생명을 보호하는 도리를 이미 강보(襁褓, 어린아이를 업을 때 사용하는 포대기)의 시절부터 나타내 보인 것이니 하물며 점장이의 말도 그와 같음이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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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지관, "충주 청룡사 보각국사 환암 정혜원융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3, 45쪽.


출가수행

혼수는 1341년(충혜왕 2)에 선시에 응시하여 상상과에 합격하였다. 이 때 고승 및 유생들과 교유하였는데 특히 이색과 가까이 지냈다. 29세인 1348년(충목왕 2) 가을에 이웃사람이 급사함을 보고 수도에 더욱 정진할 것을 맹서하고 금강산으로 들어가 장좌불와로 정진하였다. 그로부터 2년 후 그는 어머니가 병을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귀가하여 경산(京山, 지금의 경북 성주군)에 주석하며 어머니를 5-6년간 보살피고 어머니가 운명하자 『대자법화경(大字法華經)』을 사경(寫經)하여 명복을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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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1년 고려 충혜왕 2년에 선시(禪試)에 응시하여 상상과(上上科)로 합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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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지관, "충주 청룡사 보각국사 환암 정혜원융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3, 45쪽.



혼수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에 머물고 있는 식영감화상(息影鑑和尙)을 찾아가 『능엄경(楞嚴經)』을 배워 그 진리를 터득하였다. 당시 재상 조쌍중(趙雙重)이 휴휴암(休休菴)을 새로 짓고 선사를 맞이하여 능엄경의 요지를 강연하게 하였다. 이 법회에서 공민왕이 그의 도를 듣고 회암사 주지를 청하였으나 나아가지 않고 금오산을 거쳐 오대산의 신성암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같은 산내의 고운암에 머물고 있는 나옹 혜근을 찾아가 자주 질의하고 입실을 허락받았다. 그로부터 금란가사와 상아불자 산형주장자를 신물로 받았다.

활동

1361년(공민왕 10) 가을에 강릉도 안겸사가 혼수를 천거하여 궁궐로 나아가 왕실과 신료들에게 보살계를 받도록 하였으나, 상경 도중에 숨어 정진하였고, 1369년 김황(金璜)의 원찰(願刹)인 서운사(瑞雲寺)에서 선회(禪會)를 크게 열었다.


Quote-left.png 공민왕이 공부선장(功夫選場)을 열어 선교(禪敎)의 여러 승려를 모아 혜근(惠勤)을 명하여 그들을 시험하게 한 다음, 친히 이를 지켜보았다. 혜근이 한 마디 말을 내어 묻자 여러 승려들은 한 사람도 이에 대답하는 자가 없었다. 공민왕은 그만 불쾌하여 자리를 파하려 하였는데, 혼수 선사께서 맨 뒤에 이르러 위의를 갖추고 당문(堂門) 섬돌 아래 서 있었다. 혜근이 “무엇이 당문구(當門句)냐?” 고 물으니, 선사께서 즉시 섬돌에 올라가 “좌측이나 우측으로 치우치지 않고 중앙 한복판에 서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중략) ... (중략) 혜근이 곧 고개를 끄덕이자, 공민왕이 유사(攸司)를 명하여 문답한 구절을 입격문(入格文)으로 만들어 쓰게 하고 종문(宗門)에 머물게 하였는데.... Quote-right.png
출처: "유명 조선국 보각국사비명", 「비명류」, 『양촌선생문집』 제37권. 한국고전종합DB, 고전번역서, 한국고전번역원.


1370년(공민왕 19)에 나옹 혜근이 회암사에서 공부선을 개최하였는데 그가 참여하여 유일하게 인증을ㅇ 받았다. 그는 회암사의 주지를 하라는 왕명이 있을 것을 알아차리고 위봉산에 은둔하였다. 1372년 왕명으로 호불사(護佛寺)에, 이듬해에는 내불당(內佛堂)에 머물렀으나, 밤에 빠져나와 평해의 서산(西山)으로 갔다가 1374년 다시 내원에 들어가 공민왕에게 불법를 가르쳤고, 특히 왕대비의 존경을 받았다. 그 해 9월 우왕이 즉위, 광통무애 원묘대지보제(廣通無碍圓妙大智普濟)의 호를 내렸다. 1375년(우왕 1) 송광사에 머무르고, 이듬해 서운사로 돌아갔다. 1378년 치악산에서 연회암으로 돌아왔다가 왕의 청으로 광암사(光巖寺)에서 3년을 지낸 뒤, 밤에 도망하여 원주 백운암(白雲庵)으로 옮겼다. 이로부터 다시는 주지가 되지 않기로 결심하고, 용문사·청평사·치악산 등을 편력하였다.[4]


1383년 4월 1일 왕이 어서·인장·법복·예폐(禮幣) 등을 연회암에 보내어 국사로 책봉하고,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오불심종 흥자운비복국이생 묘화무궁도대선사 정편지웅존자(大曹溪宗師禪敎都總攝悟佛心宗興慈運悲福國利生妙化無窮都大禪師正遍智雄尊者)의 존호를 올렸으며, 충청북도 충주의 개천사(開天寺)에 상주하도록 하였다. 1384년 해적이 충주를 침범하자 왕의 청에 의하여 광암사로 옮겼다. 다음 해 가을에는 50일 동안의 백산개도량(白傘蓋道場)의 주맹(主盟)이 되었으며, 1386년 보국사(輔國寺) 불정회(佛頂會) 및 수창궁(壽昌宮) 소재석(消災席)에 초청받아 주관하였다. 1388년 창왕이 즉위하자 개천사로 옮겨 머물다가, 1389년 공양왕이 즉위하자 표문을 올리고 치악산으로 돌아갔지만 몇 달만에 다시 국사에 봉하여져 개천사로 옮겼다.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대장경을 인성(印成)하여 1391년(공양왕 3) 서운사에 봉안하고 경회(慶會)를 베풀었다.[5]

입적

1392년 9월 18일에 유서(遺書)를 쓰게 하면서 문인에게 이르기를 “내가 갈 때가 오늘 저녁이라, 고을의 관원을 불러 인(印)을 봉해야 하겠다.”고 하더니, 저녁때가 되자 앉아서 말하기를 “지금 죽을 때가 되었다. 나는 운명하겠노라.” 하고, 곧 게(偈)[6]를 베푼 다음 묵묵히 시적(示寂)하였다. 춘추가 73세에 하랍(夏臘)이 60세였다. 문인 소안(紹安)이 유서를 받들어 알리니, 태조 이성계가 애도하는 심정에서, 시호는 보각(普覺), 탑은 정혜원융(定慧圓融)이라는 칭호를 하사하고, 부도(浮屠)를 만들게 하였다. 1393년에 그의 문인들이 부도 곁에 비(碑)를 세우고자 그의 제자 만우(卍雨)로 하여금 행장(行狀)을 찬(撰)하게 하고, 소안(紹安)이 이를 받들어 태조에게 알리니, 태조권근(權近)에게 비문을 짓게 했다. 1394년에 충주 청룡사에 탑비가 세워졌다.

Quote-left.png 1392년 9월 18일에 유서(遺書)를 쓰게 하면서 문인에게 이르기를 “내가 갈 때가 오늘 저녁이라, 고을의 관원을 불러 인(印)을 봉해야 하겠다.”고 하더니, 저녁때가 되자 앉아서 말하기를 “지금 죽을 때가 되었다. 나는 운명하겠노라.”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충주 청룡사 보각국사 환암 정혜원융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3, 45쪽.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 권근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 충주 청룡사 A는 B에 있다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 혼수 A는 B를 위한 비이다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 혼수 는 -를 위한 승탑이다
혜근 혼수 A는 B의 스승이다
계송 혼수 A는 B의 스승이다
식영감 혼수 A는 B의 스승이다
혼수 만우 A는 B의 스승이다
혼수 소안 A는 B의 스승이다
혼수 희진 A는 B의 스승이다
혼수 불호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혼수 송광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혼수 서운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혼수 광암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혼수 오대산 신성암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혼수 내불당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혼수 개천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혼수 이성계 A는 B와 관련있다
혼수 이직 A는 B와 관련있다
혼수 공민왕 A는 B와 관련있다
혼수 창왕 A는 B와 관련있다
혼수 우왕 A는 B와 관련있다
혼수 공양왕 A는 B와 관련있다
혼수 목은집 A는 B에 기록되었다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1. 황인규, 105쪽.
  2. 황인규, 105쪽.
  3. 민백
  4. 민백
  5. 민백
  6. 고승들이 입적할 때 수행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후인들에게 전하는 마지막 말이나 글. "임종게(臨終偈)", 두산백과.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