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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정도감은 1209년 [[최충헌]]에 의해 설립된 권력 행사 기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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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25일 (화) 20:49 판

교정도감(敎定都監)
대표명칭 교정도감
한자표기 敎定都監
유형 기관
창립자 최충헌
창립시대 고려
창립일 1209년
주요업무 인사, 세정



정의

교정도감은 1209년 최충헌에 의해 설립된 권력 행사 기관이다.

내용

교정도감의 설립

고려 말 최충헌을 필두로 한 무신 세력이 정권을 장악한 후 이의민 일당을 제거하고 명종 신종을 내몰고 희종을 옹립하였다.[1] 이에 1198년(신종 1) 만적의 난, 이듬해 김준거의 난 등 최충헌을 살해하려는 움직임이 여러 차례 발생하였다. 마침내 1209년(희종 5) 개풍군 청교역의 역관 3인이 최충헌 부자를 살해하고자 공첩(公牒)을 위조해 여러 사찰에 돌려 승도를 모으려다 발각되었다. 이에 최충헌은 곧 영은관(迎恩館)에 교정도감(敎定都監)을 설치하고 그 일당을 수색하였였다. 교정도감은 처음에는 최충헌이 반동분자를 수색하기 위해 세운 임시 기관이었다. 그러나 그 후 최씨정권의 권부로서 존치되었었다. 최충헌은 교정도감의 장인 교정별감의 직위를 독점하였으며 이후 김준임연 부자에게 교정별감의 직위가 이어지면서 교정도감이 정권을 전횡하는 수단이 되었다. [2]

무신정권 권력 행사의 중추

교정도감은 최충헌에 의해 설립되어 서정을 관청하고 모든 지시와 명령을 내리던 일종의 정청이었다. 교정도감은 『고려사』 백관지 제사도감명색 조항에 이름을 올리고 있으며 교정별감의 임명권이 왕에게 있었다는 점에서 정식 기구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교정도감이 공식 기관으로서 확고한 입지를 갖고 있다는 것은 무인 정권의 기구로서 그 위력에 압도되어 어찌할 수 없는 데서 가져온 왕권의 후퇴 현상으로 보여진다. 『고려사』를 살펴보면 교정도감은 인재의 등용에 관한 인사행정 및 지방행정에도 관여하였으며 조세 및 특별세와 공물을 담당하는 관리를 파견하는 등 세정도 맡고 있었으며 형옥과 규찰의 직무도 수행하고 있었다. [3]

주석

  1. 『고려 무신정권』 온라인 참조: '개요', 『신편 한국사』online, 국사편찬위원회.
  2. 『고려 무신정권』 온라인 참조: '교정도감', 『신편 한국사』online, 국사편찬위원회.
  3. 『고려 무신정권』 온라인 참조: '교정도감', 『신편 한국사』online, 국사편찬위원회.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논문
    • 박제우, 「고려 최씨정권의 권력행사와 왕권의 위상」, 『한국중세사연구』, 한국사학회, 2016
    • 박제우, 「고려 무신정권기 敎定都監에 대한 새로운 해석」, 『한국사학보』, 고려사학회, 2015
    • 서각수, 「고려 무인정권기 교정도감에 대한 신고찰」, 『전농사론』 vol.7,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