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준"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ncyves 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내용)
31번째 줄: 31번째 줄:
 
==정의==
 
==정의==
 
==내용==
 
==내용==
 +
===허준의 생애===
 +
허준의 본관은 양천, 호는 구암이다. 그의 아버지 허론은 무과 출신으로 지방관을 두루 거쳤으며, 어머니는 영광 김씨 무인 가문의 서녀(庶女)로 허론의 첩이었다. 다시 말해 허준은 허론의 서자였다. 조선시대 서자는 과거에서 불이익을 받았기 때문에 허준 역시 의원(중인직)으로 진출하였다. 전라남도 장성에서 태어난 허준은 청년시절에 주변의 유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성장하였다. 특히 [[조선 선조|선조]] 대에 정승을 지낸 [[유희춘]]과 왕래가 잦았다. 허준이 서울을 왕래하며 유희춘의 고질병을 치료하면서, 그의 명성이 서울에도 퍼져나갔다.<ref>김호, 「허준(許浚)」, 『내일을 여는 역사』56, 내일을 여는 역사, 2014, 267-268쪽.</ref>
 +
 +
 +
1569년 허준은 30세의 나이에 유희춘의 추천으로 내의원의 의원직을 맡게 된다. 이때 당대 최고의 의원 양예수를 만나 그의 제자가 된다. 1575년부터 허준이 왕을 진찰하는 모습이 실록에 자주 등장한다. 1581년에는 왕명에 의해 당시 의학에 기초가 되는 『맥경』을 교정하여 출간하다. 1590년에는 당시의 세자([[광해군]])의 두창을 치료한 공으로 당상관에 임명된다. 53세가 되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허준은 왕궁을 떠나 선조를 의주까지 모시고 후에 호성공신에 책봉되고 숭록대부에 올랐다.<ref>김호, 「허준(許浚)」, 『내일을 여는 역사』56, 내일을 여는 역사, 2014, 268-271쪽.</ref>
 +
 +
===허준과 의서편찬===
 +
1596년 허준은 [[조선 선조|선조]]의 명을 받아 『[[동의보감]]』의 편찬을 추진한다. 이듬해인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의원들이 흩어지면서 편찬이 중지된다. 이후 허준은 민중들의 구급용 의서 편찬에 힘써 『[[언해태산집요]]』, 『[[언해두창집요]]』, 『[[언해구급방]]』을 연이어 저술했다. 이 언해본 의서들은 『[[동의보감]]』편찬의 밑거름이 된다. 1608년 어의였던 허준은 [[조선 선조|선조]]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지고 의주로 귀양을 가게 된다. 1609년 [[광해군]]은 유배 중이던 허준을 불러들여 『[[동의보감]]』의 완성을 부탁하고, 1610년 71세의
 +
나이로 『[[동의보감]]』을 완성한다. 이후에도 허준은 역병이 창궐하자 이를 치료하기 위해 1613년 『[[신찬벽온방]]』, 『[[벽역신방]]』을 저술한다. 그리고 1615년 7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나라에서는 그의 품계를 정1품으로 높여주었다. 이로써 허준은 의원 출신으로 정1품의 품계를 받은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ref>김호, 「허준(許浚)」, 『내일을 여는 역사』56, 내일을 여는 역사, 2014, 271-276쪽.</ref>
 +
 
==주석==
 
==주석==
 
<references/>
 
<references/>

2017년 7월 17일 (월) 23:25 판

틀:인물정보 이혜영

정의

내용

허준의 생애

허준의 본관은 양천, 호는 구암이다. 그의 아버지 허론은 무과 출신으로 지방관을 두루 거쳤으며, 어머니는 영광 김씨 무인 가문의 서녀(庶女)로 허론의 첩이었다. 다시 말해 허준은 허론의 서자였다. 조선시대 서자는 과거에서 불이익을 받았기 때문에 허준 역시 의원(중인직)으로 진출하였다. 전라남도 장성에서 태어난 허준은 청년시절에 주변의 유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성장하였다. 특히 선조 대에 정승을 지낸 유희춘과 왕래가 잦았다. 허준이 서울을 왕래하며 유희춘의 고질병을 치료하면서, 그의 명성이 서울에도 퍼져나갔다.[1]


1569년 허준은 30세의 나이에 유희춘의 추천으로 내의원의 의원직을 맡게 된다. 이때 당대 최고의 의원 양예수를 만나 그의 제자가 된다. 1575년부터 허준이 왕을 진찰하는 모습이 실록에 자주 등장한다. 1581년에는 왕명에 의해 당시 의학에 기초가 되는 『맥경』을 교정하여 출간하다. 1590년에는 당시의 세자(광해군)의 두창을 치료한 공으로 당상관에 임명된다. 53세가 되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허준은 왕궁을 떠나 선조를 의주까지 모시고 후에 호성공신에 책봉되고 숭록대부에 올랐다.[2]

허준과 의서편찬

1596년 허준은 선조의 명을 받아 『동의보감』의 편찬을 추진한다. 이듬해인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의원들이 흩어지면서 편찬이 중지된다. 이후 허준은 민중들의 구급용 의서 편찬에 힘써 『언해태산집요』, 『언해두창집요』, 『언해구급방』을 연이어 저술했다. 이 언해본 의서들은 『동의보감』편찬의 밑거름이 된다. 1608년 어의였던 허준은 선조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지고 의주로 귀양을 가게 된다. 1609년 광해군은 유배 중이던 허준을 불러들여 『동의보감』의 완성을 부탁하고, 1610년 71세의

나이로 『동의보감』을 완성한다. 이후에도 허준은 역병이 창궐하자 이를 치료하기 위해 1613년 『신찬벽온방』, 『벽역신방』을 저술한다. 그리고 1615년 7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나라에서는 그의 품계를 정1품으로 높여주었다. 이로써 허준은 의원 출신으로 정1품의 품계를 받은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3]

주석

  1. 김호, 「허준(許浚)」, 『내일을 여는 역사』56, 내일을 여는 역사, 2014, 267-268쪽.
  2. 김호, 「허준(許浚)」, 『내일을 여는 역사』56, 내일을 여는 역사, 2014, 268-271쪽.
  3. 김호, 「허준(許浚)」, 『내일을 여는 역사』56, 내일을 여는 역사, 2014, 271-276쪽.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