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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이지관, "강릉 지장선원 낭원대사 오진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154쪽.}} | |출처=이지관, "강릉 지장선원 낭원대사 오진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154쪽.}} | ||
− | 940년에 [[강릉 보현사 낭원대사탑비|개청을 위해 세워진 탑비]]는 현재 [[강릉 보현사]]에 위치하고 있으며, 1963년에 보물 제192호로 지정되었다."[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2&VdkVgwKey=12,01920000,32 강릉 보현사 낭원대사탑비]", 문화재검색,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유산정보』<sup>online</sup></online></html>, 문화재청. | + | 940년에 [[강릉 보현사 낭원대사탑비|개청을 위해 세워진 탑비]]는 현재 [[강릉 보현사]]에 위치하고 있으며, 1963년에 보물 제192호로 지정되었다.<ref>"[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2&VdkVgwKey=12,01920000,32 강릉 보현사 낭원대사탑비]", 문화재검색,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유산정보』<sup>online</sup></online></html>, 문화재청.</ref> |
=='''지식관계망'''== | =='''지식관계망'''== |
2017년 6월 18일 (일) 19:00 판
개청(開淸) | |
대표명칭 | 개청 |
---|---|
영문명칭 | Gaecheong |
한자 | 開淸 |
생몰년 | 835(흥덕왕 10)-930(경순왕 4) |
시호 | 낭원(朗圓) |
휘 | 개청(開淸) |
탑호 | 오진지탑(悟眞之塔) |
성씨 | 김씨(金氏) |
출신지 | 계림(鷄林, 지금의 경주) |
승탑 | 강릉 보현사 낭원대사탑 |
승탑비 | 강릉 보현사 낭원대사탑비 |
목차
정의
신라시대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낭원대사 개청(朗圓大師 開淸)은 835년 계림(鷄林, 지금의 경주)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김씨(金氏)이고, 그의 선조는 신라의 명문(名門)이었다고 한다. 아버지 김유차(金有車)는 한때 강군(康郡, 지금의 경상남도 진주)에서 벼슬을 지냈으나, 일찍부터 세상을 피해 조용히 살고자 하는 생각에 가득 차 있어 벼슬을 버리고 궁벽한 시골에 은거(隱居)하였다.[1]
개청에 탄생과 관련해서는 한 신승(神僧)이 개청의 어머니에게 금인(金印)을 주었다는 태몽이 전해진다.
어머니는 복보씨(復寶氏)로 어느 날 밤 혼교(魂交: 잠을 자던 중)에 홀연히 아름다운 상서를 얻었으니 갑자기 신승(神僧)이 허공으로부터 내려와서 뜰 아래에 서서 품안에서 금(金)과 나무로 만든 도장 2개를 꺼내 보이면서 하는 말이 "둘 중에 어느 것이 필요한가"하였다. 어머니는 맥맥(脈脈: 끊임없이 계속)히 말없이 바라만 보고 있으니, 스님이 곧 금인(金印)만 남겨두고 갔다. 어머니는 꿈을 깬 후 비로소 임신한 것을 알았다. 그로부터 오신채(五辛菜)[2]와 어육(魚肉)은 모두 끊고, 엄숙하게 인사(仁祠: 사원(寺院))를 시설하고 불사(佛事)를 닦는데 정성을 다하였다. 이와 같이 태교와 공덕을 닦다가 만삭이 되어 대중(大中) 8년[3] 4월 15일에 탄생하니, 대사의 얼굴이 마치 만월(滿月)과 같이 단정하고 입술은 홍련(紅蓮)과 같았다. | ||
출처: 이지관, "강릉 지장선원 낭원대사 오진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141-142쪽. |
출가수행
개청은 8세 때 공부를 시작하여 유학(儒學)을 익히다가, 25세 때에 출가하여 화엄사(華嚴寺)의 정행(正行)에게 가서 수행하였다.[4] 강주(康州, 지금의 함양 지역) 엄천사(嚴川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으며,[5] 금산(錦山)으로 가서 암자를 짓고 혼자서 3년 동안 수선(修禪)하다가 후에 사굴산문(闍崛山門)의 개조(開祖)인 범일(梵日)의 명성을 듣고 오대산으로 찾아가, 범일로부터 심인(心印)[6]을 받았다.[7]
활동
889년 범일국사(梵日國師)가 죽자 개청은 보현사(普賢寺)로 가서 주지를 하면서 도로를 개통하고, 법당과 탑을 새로 세웠다.[8]
이에 개청의 덕이 높음을 듣고 학도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었고, 경애왕이 사신을 보내어 국사(國師)의 예(禮)를 표하였다.[9]
입적
개청은 930년 보현사(普賢寺) 법당에서 나이 96세, 승랍 72세로 입적하였다.
개청이 입적하고 10년 뒤 고려 태조가 삼한(三韓)을 평정한 뒤에 시호와 탑호를 내리고 탑비를 세우도록 허락하면서 최언위(崔彦撝)에게 비문을 찬하도록 하였다. 글씨는 명서예가인 구족달(仇足達)이 썼다.[10]
940년에 개청을 위해 세워진 탑비는 현재 강릉 보현사에 위치하고 있으며, 1963년에 보물 제192호로 지정되었다.[11]
지식관계망
"그래프 삽입"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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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 ↑ 이지관, "강릉 지장선원 낭원대사 오진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141쪽.
- ↑ 냄새가 강하고 독특한 다섯 가지 채소. 마늘·파·부추·달래·생강. 경론(經論)에 따라 그 종류가 달라 일정하지 않음. 곽철환,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2003. 온라인 참조: "오신채", 용어해설,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본 비문 중 대사(大師)의 탄생이 대중(大中) 8년(854년)이고, 입적이 동광(同光) 8년(930년)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입적시 대사의 나이가 96세, 승랍이 72세라 하였으니 이는 20년의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대중 8년은 오기(誤記)로 보아야 할 것이다.
- ↑ 김위석, "개청",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위석, "개청",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언어를 떠난 깨달음.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진 깨달음. 도장이 진실·확실을 나타내듯, 깨달음도 그러하므로 인(印)이라 함. 곽철환,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2003. 온라인 참조: "심인", 용어해설,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개청",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김위석, "개청",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위석, "개청",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흥삼, "강릉 보현사 낭원대사 탑비",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강릉 보현사 낭원대사탑비",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 문화재청.
참고문헌
- 이지관, "강릉 지장선원 낭원대사 오진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132-157쪽.
- 김위석, "개청",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개청",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