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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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신 높이 228㎝, 너비 105㎝, 두께 12㎝. 탑비는 [[귀부|귀부(龜趺)]]와 [[비신(碑身)]]과 [[이수|이수(螭首)]]로 구성되어 있다. 원래는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구원리 반야사지에 있었던 것으로, 광복 후 [[합천 해인사|해인사(海印寺)]]로 옮겨 창고에 보관하였다가 1968년 [[합천 해인사|해인사]] 경내인 지금의 자리에 중건하였다.<ref>김세호,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1512 합천 반야사지 원경왕사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비신 높이 228㎝, 너비 105㎝, 두께 12㎝. 탑비는 [[귀부|귀부(龜趺)]]와 [[비신(碑身)]]과 [[이수|이수(螭首)]]로 구성되어 있다. 원래는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구원리 반야사지에 있었던 것으로, 광복 후 [[합천 해인사|해인사(海印寺)]]로 옮겨 창고에 보관하였다가 1968년 [[합천 해인사|해인사]] 경내인 지금의 자리에 중건하였다.<ref>김세호,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1512 합천 반야사지 원경왕사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낙진|원경왕사(元景王師)]]는 [[난원|경덕국사 난원(景德國師 爛圓)]]에게 학문을 배우고, [[의천|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을 따라 송나라로 건너가 [[정원|정원(淨源)]]에게 불법을 배우고, 귀국하여 [[의천]]을 도와 [[교장도감|교장도감(敎藏都監)]]에서 [[속장경|속장경(續藏經)]]을 판각할 때 교정을 보았던 승려이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74615&cid=40942&categoryId=33382 낙진]", 두산백과</ref> 1119년 [[귀법사|귀법사(歸法寺)]]에서 입적하였으며, 1124년 [[낙진|원경왕사]]의 문인 각순(覺純) 등이 비의 건립을 왕에게 청하자 1125년(인종 3)에 비가 건립되었다.<ref>김세호,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1512 합천 반야사지 원경왕사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전액|전액(篆額)]]에는 '증시원경왕사비명(贈諡元景王師碑銘)'라고 쓰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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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진|원경왕사(元景王師)]]는 [[난원|경덕국사 난원(景德國師 爛圓)]]에게 학문을 배우고, [[의천|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을 따라 송나라로 건너가 [[정원|정원(淨源)]]에게 불법을 배우고, 귀국하여 [[의천]]을 도와 [[교장도감|교장도감(敎藏都監)]]에서 [[속장경|속장경(續藏經)]]을 판각할 때 교정을 보았던 승려이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74615&cid=40942&categoryId=33382 낙진]", 두산백과</ref> 1119년 [[귀법사|귀법사(歸法寺)]]에서 입적하였으며, 1124년 [[낙진|원경왕사]]의 문인 각순(覺純) 등이 비의 건립을 왕에게 청하자 1125년(인종 3)에 비가 건립되었다.<ref>김세호,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1512 합천 반야사지 원경왕사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전액|전액(篆額)]]에는 '증시원경왕사비명(贈諡元景王師碑銘)'이라고 쓰여있다.
  
 
비문은 [[김부일|김부일(金富佾)]]이 짓고, [[이원부|이원부(李元符)]]가 썼으며, [[김윤|김윤(金允)]]이 글씨를 새겼다. 글씨는 해서체로 쓰여졌으며, 고려시대 비문의 해서가 대부분 [[구양순|구양순(歐陽詢)]] 계통임에 비하여 이 비문은 [[우세남|우세남(虞世南)]]의 필체를 따르고 있다. 필획의 부드러운 흐름과 여유 있는 짜임새가 돋보인다.<ref>김세호,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1512 합천 반야사지 원경왕사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비문은 [[김부일|김부일(金富佾)]]이 짓고, [[이원부|이원부(李元符)]]가 썼으며, [[김윤|김윤(金允)]]이 글씨를 새겼다. 글씨는 해서체로 쓰여졌으며, 고려시대 비문의 해서가 대부분 [[구양순|구양순(歐陽詢)]] 계통임에 비하여 이 비문은 [[우세남|우세남(虞世南)]]의 필체를 따르고 있다. 필획의 부드러운 흐름과 여유 있는 짜임새가 돋보인다.<ref>김세호,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1512 합천 반야사지 원경왕사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2017년 6월 9일 (금) 17:37 판

합천 반야사지 원경왕사비
(陜川 般若寺址 元景王師碑)
BHST Stele.png
대표명칭 합천 반야사지 원경왕사비
영문명칭 Stele for
한자 陜川 般若寺址 元景王師碑
이칭 반야사 원경왕사비(般若寺 元景王師碑)
주소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길 122(치인리 10)
문화재 지정번호 보물 제128호
문화재 지정일 1963년 1월 21일
찬자 김부일(金富佾)
서자 이원부(李元符)
각자 김윤(金允)
서체 해서(楷書)
승려 낙진(樂眞)
건립연대 1125년(인종 3)


정의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구원리 반야사지(般若寺址)에서 발견된 고려시대의 승려 원경왕사 낙진(元景王師 樂眞, 1050-1119)의 탑비.

내용

개요

비신 높이 228㎝, 너비 105㎝, 두께 12㎝. 탑비는 귀부(龜趺)비신(碑身)이수(螭首)로 구성되어 있다. 원래는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구원리 반야사지에 있었던 것으로, 광복 후 해인사(海印寺)로 옮겨 창고에 보관하였다가 1968년 해인사 경내인 지금의 자리에 중건하였다.[1]

원경왕사(元景王師)경덕국사 난원(景德國師 爛圓)에게 학문을 배우고,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을 따라 송나라로 건너가 정원(淨源)에게 불법을 배우고, 귀국하여 의천을 도와 교장도감(敎藏都監)에서 속장경(續藏經)을 판각할 때 교정을 보았던 승려이다.[2] 1119년 귀법사(歸法寺)에서 입적하였으며, 1124년 원경왕사의 문인 각순(覺純) 등이 비의 건립을 왕에게 청하자 1125년(인종 3)에 비가 건립되었다.[3] 전액(篆額)에는 '증시원경왕사비명(贈諡元景王師碑銘)'이라고 쓰여있다.

비문은 김부일(金富佾)이 짓고, 이원부(李元符)가 썼으며, 김윤(金允)이 글씨를 새겼다. 글씨는 해서체로 쓰여졌으며, 고려시대 비문의 해서가 대부분 구양순(歐陽詢) 계통임에 비하여 이 비문은 우세남(虞世南)의 필체를 따르고 있다. 필획의 부드러운 흐름과 여유 있는 짜임새가 돋보인다.[4]

비문

지식관계망

"그래프 삽입"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1. 김세호, "합천 반야사지 원경왕사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 "낙진", 두산백과
  3. 김세호, "합천 반야사지 원경왕사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4. 김세호, "합천 반야사지 원경왕사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