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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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감선사혜소(慧昭)는 최씨로 804년(애장왕 5) 세공사(歲貢使)의 배에 편승하여 당나라의 신감대사(神監大師)에 의하여 중이 되었고, 각지를 편력한 뒤 830년(흥덕왕 5) 귀국하여 역대왕들의 숭앙을 받다가 77세의 나이로 쌍계사에서 입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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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소|진감선사 혜소(慧昭)]]는 최씨로 804년(애장왕 5) 세공사(歲貢使)의 배에 편승하여 당나라의 [[신감|신감대사(神監大師)]]에 의하여 중이 되었고, 각지를 편력한 뒤 830년([[신라 흥덕왕|흥덕왕]] 5) 귀국하여 역대왕들의 숭앙을 받다가 77세의 나이로 [[하동 쌍계사|쌍계사]]에서 입적하였다.
그 뒤 3기(三紀)가 지난 885년(헌강왕 11) 왕은 진감선사대공영탑(眞鑑禪師大空靈塔)이라 시호를 추증하여 탑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비문을 짓고 쓴 이는 당대의 대표적 문인인 최치원(崔致遠)으로, 특히 최치원의 사산비명(四山碑銘)의 하나로 유명하다.<ref>김세호,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4098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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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3기(三紀)가 지난 885년([[신라 헌강왕|헌강왕]] 11) [[신라 헌강왕|헌강왕]]은 진감선사대공영탑(眞鑑禪師大空靈塔)이라 시호를 추증하여 탑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비문을 짓고 쓴 이는 당대의 대표적 문인인 [[최치원|최치원(崔致遠)]]으로, 특히 [[최치원]]의 [[사산비명|사산비명(四山碑銘)]]의 하나로 유명하다.<ref>김세호,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4098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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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2일 (금) 14:24 판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河東 雙磎寺 眞鑑禪師塔碑)
BHST Ssangyesa Heysostele front 1.jpg
대표명칭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한자 河東 雙磎寺 眞鑑禪師塔碑
이칭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雙磎寺眞鑑禪師大空塔碑)
주소 경남 하동군 화개면 쌍계사길 59
문화재 지정번호 국보 47호
문화재 지정일 1962.12.20
찬자 최치원(崔致遠)
서자 최치원(崔致遠)
각자 환영(奐榮)
서체 전서(篆書)
승려 혜소(慧昭)



정의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쌍계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고승 진감선사(眞鑑禪師) 혜소(慧昭)의 탑비.

내용

개요

전체높이 3.63m, 비신높이 2.13m, 너비 1.035m, 두께 22.5㎝. 국보 제47호로 지정되어 있다.

귀부(龜趺)이수(螭首) 및 탑신이 완전한 탑비로, 신라 말기에 나타나는 탑비 양식에 따라 귀두(龜頭)는 용두화(龍頭化)되었으며, 귀부의 등에는 6각의 귀갑문(龜甲文)이 크고 간편하게 조식되어 있다. 이수에는 보주를 다투는 반룡(蟠龍: 승천하지 아니한 용)이 조각되었고, 이수 앞면 가운데에는 전액(篆額)이 양각되었으며, 그 위로 앙련판(仰蓮瓣) 위에 보주를 얹었다.[1] 이수의 앞면 중앙에는 ‘해동고진감선사비’라는 비의 명칭이 새겨져 있다. [2]

비문

진감선사 혜소(慧昭)는 최씨로 804년(애장왕 5) 세공사(歲貢使)의 배에 편승하여 당나라의 신감대사(神監大師)에 의하여 중이 되었고, 각지를 편력한 뒤 830년(흥덕왕 5) 귀국하여 역대왕들의 숭앙을 받다가 77세의 나이로 쌍계사에서 입적하였다. 그 뒤 3기(三紀)가 지난 885년(헌강왕 11) 헌강왕은 진감선사대공영탑(眞鑑禪師大空靈塔)이라 시호를 추증하여 탑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비문을 짓고 쓴 이는 당대의 대표적 문인인 최치원(崔致遠)으로, 특히 최치원사산비명(四山碑銘)의 하나로 유명하다.[3]

탁본

진감선사 탑비의 비문은 건립 연대를 알 수 있는 비면 부분이 훼손되었으나, 다행히 1725년(조선 영조 1)에 목판에 그대로 본떠 새긴 비문이 있어 887년임을 알 수 있다. 비문의 글씨는 2cm 정도의 해서로 위아래로 긴 짜임새를 하고 있다.[4]

탑비의 훼손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는 1936년 7월 지진으로 인하여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가 일부 훼손되었다.[5]

지식관계망

"그래프 삽입"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진감선사 혜소 A는 B를 위한 비이다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하동 쌍계사 A는 B에 있다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최치원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887년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최치원 A는 B가 비문을 썼다 887년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환영 A는 B가 비문을 새겼다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사산비명 A는 B에 포함된다
신라 헌강왕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A는 B의 이름을 지었다 887년

시각자료

가상현실

  • 차후 있을 답사 후 보완..

갤러리

영상

  • [주요 뉴스] KBS뉴스9 경남 – 지진 시대, 문화재 보호 `고심`(2016.10.11.화)

주석

  1.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문화재 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문화재청.
  3. 김세호,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쌍계사 진감선사비명 탑본", 주요 소장품 검색, 『소장품』online, 국립중앙박물관
  5. " 稀有(희유)의 珍事實(진사실) 被害六日(피해육일)만에判明(판명)",『동아일보』, 작성일: 1936년 7월 11일
  6. "쌍계사 진감선사비명 탑본", 주요 소장품 검색, 『소장품』online, 국립중앙박물관.
  7. "쌍계사 진감선사비 탑본", 주요 소장품 검색, 『소장품』online, 국립중앙박물관.

참고문헌

  • 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신라편,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127-152쪽.
  • 최영성, 『교주 사산비명』, 이른아침, 2014, 188-21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