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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1일 (목) 17:24 판
목차
개요
조선 후기 대표적 지리학자이며 지도 제작자로, 가장 많은 지도를 제작하였고, 가장 많은 지리지를 편찬하였다.
자는 백원(伯源), 호는 고산자(古山子), 황해도 토산(兎山) 출생으로 본관은 청도(淸道)다. 한자가 다른 김정호(金正皡)로도 알려져 있다.
생애
김정호에 대한 기록은 『청구도』에 수록된 최한기의 「청구도제(靑邱圖題)」,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수록된「만국경위지구도변증설(萬國經緯地地球圖辨證說」과 「지지변증설(地志辨證說)」, 신헌의 『금당초고(琴堂初槁)』에 수록된 「대동방여도서(大東方輿圖序)」, 유재건의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에 수록된 「김고산정호(金古山正浩)」에 불과하다.
남아있는 기록을 모두 합해도 A4 용지 한 장 안팎밖에 되지 않는 아주 적은 양이다. 이에 따라 김정호가 황해도 토산 출신이라든지, 도성 숭례문 밖의 만리재나 약현 부근에 살았다는 등의 일설이 전해지고 있지만 생몰 연대, 본관, 신분, 고향, 주요 주거지, 가계 등에 대해 어느 것도 정확하게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김정호의 신분
그의 신분을 알 수 있는 전기는 전혀 없으나, 몇가지 사실로 그의 신분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첫째, 유재건의 『이향견문록』에 수록된 인물들의 신분을 통해서 김정호의 신분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은 전기가 전해지지 않는 하층계급 출신으로 각방면에 뛰어난 인물들의 행적을 모은 책으로, 여기에 수록된 김정호도 하층계급 출신이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둘째, 신헌의 『대동방여도서(大東方輿圖序)』 서문을 통해서도 김정호의 신분을 추측할 수 있다.
나(신헌)는 일찍이 우리나라 지도에 뜻을 두고 비변사와 규장각에 소장된 것, 오래된 집안에 좀먹다 남은 것들을 널리 수집하여 증정하고, 여러 본들을 서로 참고하고, 여러 책들에 근거하여 합쳐서 편집하였다. 이리하여 김군백원(金君百源)에게 물어 그것을 맡겨 만들게 하였다. 가리켜 증명하고 입으로 전해주기를 수십 년이나 하여 비로소 한 부가 만들어졌는데 모두 23권이다.
신헌은 자신보다 7-8세 연상인 김정호를 신헌은 김정호를 '김군백원(金君百源)'이라 칭하고 있는데, 같은 양반 출신이라면 김공(金公)이라고 표기했을 것이다. 그리고 성명을 적지 않고 성과 자만을 적은 것도 신분적 차이 때문이다. 이런 정황으로 보아 김정호는 신헌과는 다른 신분계층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셋째, 김정호의 족보가 없다는 사실로도 그의 신분을 추측할 수 있다. 청도 김씨 대동보에 따르면 김정호는 봉산파로 분류되어 있는데 한국 전쟁으로 봉산파가 실계(失系; 가계가 끊김)된 것으로 적혀 있다. 그러나 6.25동란과 관계없이 한국 전쟁 이전에 편찬된 예전 족보(구보)에도 김정호는 실려 있지 않다. 이를 근거로 김정호의 집안이 청도 김씨 봉산파이기는 하나 가정 형편은 빈한한 몰락한 잔반(殘班)이나 중인으로 추정된다.
넷째, 『지구전후도』, 『수전전도』, 목판본의 『대동여지도』 22첩, 『대동여지전도』에서 확인되듯이 판각에 뛰어난 각수(刻手)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평민의 장인 출신이라 볼 수 있다.
활동사항
김정호는 국토정보를 효율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지도와 지리지를 동시에 이용해야 한다는 점을 「청구도 범례(靑邱圖凡例)」등 여러 곳에서 언급하였다. 또한 그는 지도의 제작과 지리지의 편찬에서 정확성에도 초점을 맞추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 것은 이용의 편리에 대한 고민이다. 이와 같은 두 가지 관점에서 김정호의 업적을 시대별로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1834년(순조 34) 이전부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 시문(詩文)·인물 등을 제외한 내용을 큰 글씨로 적고 다른 자료를 참고하여 여백이나 첨지에 깨알 같은 글씨로 교정·첨가한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동여편고(東輿便攷)』 2책(1책 결본)을 편찬하였다. 1834년(순조 34)에는 『청구도』 2책을 편찬하였고, 이어 1840년(헌종 6)대 후반까지 3차에 걸쳐 개정판 『청구도』를 제작하였다. 기본 정보의 차원에서 『청구도』는 『해동여지도』의 내용을 그대로 따랐지만 이용의 편리라는 측면에서 혁신적인 변화를 가했다.
김정호는 1834년(순조 34) 경부터 영남대학교 도서관 소장 『동여도지』의 편찬을 시작하여 1844년(헌종 10)경에 완성하며, 이후 지속적인 교정과 첨가를 하다가 1861년(철종 12)에 서문을 작성하여 수록한다. 이어 1850년(철종 1) 전후로 대축척 고을지도와 지지가 결합된 지리지인 대영도서관 소장 『동여도지』 3책(경기·강원·황해)을 편찬하기 시작하였지만 완성을 보지 못하고 포기한다.
이 때부터 김정호는 지도와 지지가 결합된 『청구도』의 형식을 포기하고 순수하게 지도적 속성이 강한 지도첩의 제작을 시작하였다. 표지에는 『동여(東輿)』라고 기록되어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필사본의 『대동여지도』 14첩이 그러한 노력의 첫 번째 결실이다. 이 지도첩에서 김정호는 『청구도』에 첨가된 통계와 지지 정보를 대폭 삭제하고 기호의 사용을 정교화 하였다.
대신 1853년(철종 4)에서 1856년(철종 7) 사이에 대축척 고을지도를 생략한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여도비지(輿圖備志)』 20책을 최성환(崔瑆煥)과 함께 편찬하였고, 비슷한 시기에 기본 정보가 『청구도』와 상당히 달라진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필사본의 『대동여지도』 18첩을 제작하였다. 이어 1856년(철종 7)에서 1859년(철종 10) 사이에는 기본 내용을 완전히 개정한 필사본의 『동여도』 23첩을, 1861년(철종 12)에 목판본의 『대동여지도』 22첩을 제작하였다. 또한 1864년(고종 1)에 목판본의 『대동여지도』 22첩을 교정하여 재간하였으며, 1861년(철종 12)부터 1866년(고종 3)경까지 『대동지지』 32권 15책을 편찬하다 미완으로 남기고 사망하였다.
김정호는 이외에도 보급용의 중형 낱장본 지도로 1834년(순조 34)에 최한기의 부탁을 받고 판각한 서양식 세계지도인 『지구전후도(地球前後圖)』, 1840년(헌종 6)대에는 한양 지도인 목판본의 『수선전도(首善全圖)』, 전통식과 서양식이 결합된 세계지도인 『여지전도(輿地全圖)』, 1860년(철종 11)대에는 목판본의 『대동여지도』 22첩이 너무 커서 한눈에 조선 전체를 보기 어려운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제작한 목판본의 『대동여지전도(大東輿地全圖)』를 제작하였다.
김정호의 사상
김정호는 자신에 대한 글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그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글은 《지도유설》과 《동여도지》 서문인데, 둘 다 김정호가 쓴 글이다. 다만 《지도유설》은 김정호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생각을 듣고 정리하여 쓴 글이며, 《동여도지》만 김정호의 사상을 나타낸 글이다. 《동여도지》에 나타난 김정호의 사상이나 역사지리 인식은 다음과 같다.
김정호는 지도(地圖)와 지지(地誌)가 서로 불가분의 관계라고 인식하였다. 지도로써 천하의 형세를 살필 수 있고 지지로써 역대의 제도와 문물을 헤아려 볼 수 있으므로 지도와 지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위국(爲國) 곧 치국(治國)의 대경(大經)이라고 지도와 지지의 관계를 강조하였다.
지도와 지지가 위와 같이 중요함에도 단기(檀箕; 단군과 기자) 이래로 지도가 없고 지지는 《삼국사기》에 이르러 비로소 만들어졌기 때문에 지지의 첫머리에 신라 이전의 사항을 두어 알게 하였다. 조선에 들어서는 초기에 《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되어 비로소 도적(圖籍)이 환연해졌지만, 김정호가 사는 때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편찬된 지 3백여 년이 지나 지리 정보에 차이가 많아졌으므로 이를 바로잡으려고 《동여도지》를 만들었다. 이에 따라 편목이나 구성이 《동국여지승람》의 구성과 비슷하다.
김정호는 또한 지도와 지지의 제작이 치국의 대경이라는 자신의 주장대로 치국경제에 유용하도록 《동여도지》 등을 제작할 때 문교무비(文敎武備)에 해당하는 관방과 역참, 학교와 서원 등 42개 편목을 자세히 설명하거나 표기하였다.
저서(작품)
김정호가 편찬한 지도와 지리지는 다음과 같다.
- 1834년(순조 34년) : 지지 《동여도지》 제1차 편찬 / 지도 〈청구도〉
- 1851년(철종 2년)부터 1856년(철종 7년) 사이 : 지지 《여도비지》
- 1856년(철종 7년)부터 1861년(철종 12년) 사이 : 지도 〈동여도〉
- 1861년(철종 12년) : 지도 〈대동여지도〉
- 1866년(고종 3년) : 지지 《대동지지》
- 〈지구전후도(地球前後圖)〉 : 최한기가 펴냈으며, 김정호가 판각하였다.
위에서 〈청구도〉·〈동여도〉·〈대동여지도〉와 《동여도지》·《여도비지》·《대동지지》를 ‘김정호의 3대 지도와 3대 지지’라고도 부른다.
상훈과 추모
일제강점기인 1925년 10월 8일과 9일 2번에 걸친 『동아일보』의 '고산자를 회함'이라는 칼럼에서 김정호와 『대동여지도』를 통해 민족적 우수성을 되짚어보려고 하였다. 여기에서 처음으로 전국답사설·백두산등정설·판목몰수설이 나타났는데, 그 목적은 다음과 같다.
첫째, 김정호가 국가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신이 직접 측량하여 『대동여지도』를 제작했다는 점을 부각시켜 1800년(순조 즉위) 초반에 에도막부[江戶幕府]의 도움을 받아 전국을 답사하면서 일본을 측량하여 지도를 제작한 이노 다다타카(伊能忠敬)보다 더 뛰어나다는 것을 내세우려 하였다.
둘째, 근대식 측량지도 못지않은 정확한 지도가 조선에도 『대동여지도』란 이름으로 제작되었음을 부각시켜 민족적 우수함을 설명함으로써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 백성에게 자긍심을 불어넣어 주려고 하였다.
셋째, 관에 의한 판목몰수설을 통해 조선의 멸망을 백성 전체의 문제가 아니라 집권층의 무능력 탓으로 돌리려 하였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서 편찬한 『조선어독본(朝鮮語讀本)』에 김정호의 전기가 처음으로 수록되었는데, 전국답사설·백두산등정설·판목몰수설은 『동아일보』의 「고산자를 회함」에서 그대로 따왔다.
다만 첫째, 김정호와 『대동여지도』의 우수함을 부각시키려 비교의 대상으로 삼았던 이노 다다타카(伊能忠敬)와 그가 제작한 지도에 대한 이야기를 생략하였다. 둘째, 김정호가 어린 시절에 보았던 조선의 지도가 정확성에서 엉터리라는 이야기를 삽입시킴으로써 김정호 이전 조선의 지도 제작 능력을 폄하시켰다. 셋째, 흥선대원군이란 구체적인 인물을 등장시켜 개항기 조선 정부의 무능력을 부각시킴으로써 조선이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편입된 것을 정당화시키려 하였다. 넷째, 조선 정부의 무능력을 더욱 부각시키기 위해 김정호 부녀의 옥사설을 추가하였다.
판목소각설은 『동아일보』의 기사나 『조선어독본』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 이야기로, 후대의 다른 자료에서 첨가된 것이다. 이와 같은 김정호의 전기는 1980년대까지도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으며, 1990년대부터 전국답사설·백두산등정설·옥사설·판목소각설이 모두 잘못된 이야기라는 새로운 연구가 나타나 점점 교정되기 시작했다.
김정호와 『대동여지도』에 관한 네 가지 설은 첫째, 전통시대에 필요한 거리 정보의 종류와 그것에 기초를 둔 지도의 제작 과정을 모르는 비전문가가 만들었기 때문에, 둘째, 김정호 이전에도 상당한 수준에 있었던 조선의 지도와 지리지 제작의 변천사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셋째, 김정호가 국토정보의 체계적 이해를 위해 평생에 걸쳐 지속적으로 지도와 지리지를 제작했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넷째, 김정호가 지도의 정확성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맞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 것이 이용의 편리였다는 점을 몰랐기 때문에 만들어진 잘못된 주장이다.
관련 기록
나의 벗 김정호는 소년 시절부터 지리학에 뜻을 두고 오랜 세월 동안 지도와 지리지를 수집하여 여러 지도의 도법을 상호비교해서 <청구도>를 만들었다.(金友正浩 年自童冠 深留意圖志...)
- 유재건의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 중 김정호전
김정호는 재주가 많아 그림도 잘 그리고 조각도 잘 했는데 특히 지리학에 깊이 빠져 지도와 지리지를 깊이 고찰하고 널리 수집하여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다
나(신헌)는 일찍이 우리나라 지도에 뜻을 두고 비변사와 규장각에 소장된 것, 오래된 집안에 좀먹다 남은 것들을 널리 수집하여 증정하고, 여러 본들을 서로 참고하고, 여러 책들에 근거하여 합쳐서 편집하였다. 이리하여 김군백원(金君百源)에게 물어 그것을 맡겨 만들게 하였다. 가리켜 증명하고 입으로 전해주기를 수십 년이나 하여 비로소 한 부가 만들어졌는데 모두 23권이다.
근자에 김정호라는 사람이 대동여지도 20권을 지었는데… 잠시 보았을 뿐인데도 환히 알 수 있게 되어 매우 편리하다. 그 착상이 선인들에 비하여 분명히 우수하고, 그 정밀함은 이만저만하지 않다. … 그의 지도와 지지는 꼭 세상에 전해져야 할 것이다.
평가
기록유산과의 연관성
민족기록화와의 연관성
김태의 1979년 민족기록화 작품 김태-김정호의 대동여지도의 중심 소재로 등장한다.
노드 및 관계
노드 | 관계 | 클래스 | 노드 | 설명 |
---|---|---|---|---|
김정호 | isTheSubjectOf | 민족기록화 | 김태-김정호의 대동여지도 | 김태-김정호의 대동여지도는 김정호를 소재로 그려진 민족기록화이다. |
김정호 | creates | 기록 | 대동여지도 | 대동여지도는 김정호에 의해 제작된 기록이다. |
김정호 | isMentionedIn | 기록 | 이향견문록 | 이향견문록은 김정호가 언급된 기록이다. |
김정호 | isMentionedIn | 기록 | 청구도제 | 청구도제는 김정호가 언급된 기록이다. |
김정호 | isMentionedIn | 기록 | 금당초고 | 금당초고는 김정호가 언급된 기록이다. |
김정호 | creates | 기록 | 청구도 | 청구도는 김정호에 의해 제작된 기록이다. |
김정호 | isMentionedIn | 기록 | 오주연문장전상고 | 오주연문장전상고는 김정호가 언급된 기록이다. |
김정호 | hasFriendshipWith | 인물 | 최한기 | 최한기는 김정호와 친분관계가 있는 인물이다. |
김정호 | hasFriendshipWith | 인물 | 김정희 | 김정희는 김정호와 친분관계가 있는 인물이다. |
함께 보기
- 대동지지
- 지도박물관
- 95016 김정호 - 김정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소행성의 이름에 김정호를 따서 지었다.
- 고산자로 - 서울특별시 성동구 행당동의 옛 청량리 부근. 김정호의 호를 따서 지었다.
관련 작품
- 《고산자, 대동여지도》 - 영화, 2016.09.07 개봉, 감독:강우석, 출연:차승원, 유준상
참고문헌
웹 사이트
- 한국문화콘텐츠닷컴 "김정호의 생애", 2016년 12월 26일 확인
- 원천자료: 단행본
온라인 사전
- "김정호", 나무위키, 2016년 12월 26일 확인
- "김정호", 위키백과, 2016년 12월 26일 확인
- "고산자를 회함", 위키백과, 2016년 12월 26일 확인
- 원천자료: 기사
- 최남선, "고산자를 懷함", 『동아일보』, 1925. 8. 9 .
- 최남선, "고산자를 懷함", 『동아일보』, 1925. 8. 10.
- 원천자료: 기사
- "김정호", 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16년 12월 26일 확인
- 원천자료: 단행본
- 이기봉, 『조선 고지도 여행 (I)·(II)』, 새문사, 2011년.
- 이기봉, 『평민 김정호의 꿈』 새문사, 2010년.
- 국토해양부 국립지리정보원, 『지도 발달사』 2009년.
- 오상학, 『옛 삶터의 모습 고지도』, 국립중앙박물관, 2005년.
- 이상태, 『한국 고지도 발달사』, 혜안, 1999년, 185~242쪽.
- 원천자료: 학술논문
- 대한측량협회, 『고산자 김정호 관련 측량 및 지도 사료 연구』, 2003년.
- 이기봉, 「『청구도』이본 4개 유형의 지도적 특징과 변화에 대한 연구」, 『한국고지도연구』1(2), 2010년.
- 이기봉,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동여』와 『청구도』의 관계에 대한 비판적 재검토」, 『한국지역지리학회지』14(3), 2008년.
- 배우성, 「대동여지도 연구의 쟁점과 과제」, 『한국과학사학회지』, 28(1), 2007년.
- 이기봉, 「김정호의 『동여도』제작 시기에 대한 일고찰」, 『문화역사지리』17(3), 2005년.
- 오상학, 「고산자 김정호의 지도제작과 그 의의」, 『고산자 기념사업 연구 용역 논문집』, 2001년.
- 양보경, 「고산자 김정호의 지리지 편찬과 그 의의」, 『고산자 기념사업 연구 용역 논문집』, 2001년.
- 원천자료: 학위논문
- 원천자료: 단행본
단행본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