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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27일 (화) 17:06 판
목차
개요
김기창(金基昶)은 한국의 대표적인 동양화가이다.
청각장애를 극복하고 현대 한국 미술계에서 큰 자취를 남긴 거장으로 여겨지지만, 한편으로는 일제강점기 시절 친일적 성격의 작품을 창작한 것으로 인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언급되는 등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다.
그가 남긴 그림들 가운데 특히 한국의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을 다룬 작품들의 경우 그의 친일행적에 대한 비판적 시각과 함께 그 가치에 대한 평가가 여러 방향으로 나뉘고 있다.
생애
1913년 2월 18일 서울 운니동에서 당시 총독부 토지관리국 직원이던 아버지 김승환과 어머니 한윤명 사이에서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보통학교 입학 이전까지의 유년기를 잠시 충청남도 공주에서 보내기도 했다.
1921년 승동보통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8살 무렵 장티푸스로 인한 고열에 의해 청각을 상실하였고 이로 인한 언어 장애의 증세까지 있었다. 이 일로 인해 김기창은 평생 청각장애인으로 살아야 했다.
1930년 승동보통학교 졸업 후 아버지 김승환은 아들이 청각장애가 있지만 체격이 크기 때문에 목수 일을 배우게끔 하려 하였지만, 어머니인 한윤명은 그가 그림 그리는 것에 소질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이당(以堂) 김은호의 화숙인 낙청현에서 그림을 배우게끔 주선하였다.
1931년 김은호의 문하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지 6개월만에 '제 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판상도무'를 출품해 입선하였다.(1940년까지 6회 입선, 특선 3회를 기록했다.)
1936년 낙청현에서 김기창은 김은호를 사사한 장우성, 이유태, 백윤문, 이석호, 한유동, 장운봉 등과 함께 1월에 미술단체인 [후소회]를 창립하고, 10월 제1회 전시회 '조선남화연맹전'을 개최한다.
1940년 27살 무렵 '조선미술전람회'에서 꾸준히 입선한 경력을 바탕으로 추천작가가 되었는데, 이후로 광복 전까지 일본제국주의를 정당화하는 그림을 그리는 등 친일적 성격의 작품 활동이 이어졌다.
1942년 당시 친일 미술전인 '반도총후미술전(半島銃後美術展)'에 후소회 동문인 장우성과 함께 일본화부 추천작가로 발탁되었다. 1944년까지 지속되었다.
1943년 1월 애국백인일수전람회를 통해 일제의 기금 모집에 협력하였다. 아내 우향 [박래현]과 처음 만난다.
1946년 박래현과 3년간의 필담연애 끝에 서울 남산에서 고백해 결혼하였다.
1947년 '운보-우향 부부전'을 시작으로 부부작가로 함께 미술 전시활동을 시작했다. 자유신문 미술기자, 국립민속박물관 미술부장 등을 지냈다.
1957년 미국 뉴욕 월드하우스 화랑 주최 교 한국 현대작가전에 초대 출품했다.
1960년 국전 초대작가가 되어 국전 심사위원을 역임하고, 타이베이(台北)와 홍콩에서 열린 한국미술전에 출품했고 이어 도쿄(東京)·마닐라에서 열린 한국미술전에도 출품했다. 홍익대학교 미술과 교수를 지냈다.
1962년 수도여자사범대학(훗날 세종대학교)으로 교직을 옮긴다.(1974년까지 교수를 지냈다) 문화자유전에 출품했다. 백양회 창립을 주도하였다.
1963년 5월 문예상 미술본상을 수상했고, 제7회 상파울로 비엔날레에도 한국 대표로 출품했다.
1964년 미국무성의 초청으로 도미(渡美)하였다.
1969년 재차 도미하여 뉴욕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1975년까지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 1970년 미술협회 부이사장 등을 역임하면서 화단과 교육계에서 커다란 활동을 했다.
1979년 한국농아복지회를 창설하여 초대회장에 취임하였다.
1984년 서울 역삼동에 청각장애인을 위한 복지센터인 청음회관을 설립하였다. 충북 청원에 '운보의 집'을 완공했다.
1989년 예술원 정회원이 되었다.
1993년 예술의 전당에서 '운보 김기창 팔순 기념 대회고전'을 개최하였다.
1994년 '운보 김기창 전작도록'을 발간하였다.
2000년 7월 개인전 '미수 기념 특별전'을 열었다.
2001년 1월 23일 사망했다.
대표적 작품과 경향성
자유롭고 활달한 필력으로 힘차고 동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하여, 풍속화에서부터 극단적인 추상에 이르기까지 구상과 추상의 전 영역을 망라하는 폭넓은 작품세계를 보여준다.
- 세종대왕_표준영정
- 군마도
- 청산도
- 소와 여인
- 가을
- 보리타작
-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
- 완전군장의 총후병사
전시와 수상경력 그리고 서훈
전시
생전 전시
사후 전시
수상경력
- 1971년 제12회 3.1 문화상
- 1972년 3.1문화상 심사위원 위촉
- 1977년 3.1문화상 심사위원 위촉
- 1981년 한독미술가협회 회장
- 1982년 중앙일보 중앙문화예술상 본상
- 1983년 예술원상
- 1985년 후소회 회장
- 1986년 '5.16민족상과 서울시 문화상'
-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동남아채묵전 추진위원장
- 1987년 '색동회상'
- 1988년 서울 올림픽 아트포스터 제작 작가
서훈
- 1977년 은관문화훈장
- 1981년 국민훈장 모란장
- 2001년 금관문화훈장(추서)
논란과 평가
친일행적에 대한 시선
김기창의 스승 이당 김은호는 친일 미술인 단체인 조선미술가협회 일본화부평의원으로 있었다. 스승의 영향으로 인해 김기창은 그림을 통해 일제의 전쟁동원에 간접적으로 협력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조선남화연맹전(1940.10), 애국백인일수전람회(1943.1)를 통해 일제의 기금 모집에 적극 협력 하였다.
친일 미술전의 핵심인 반도총후미술전(半島銃後美術展)에 후소회 동문인 장우성과 함께 일본화부 추천작가로 발탁되었다.(1942∼44)
이와 같은 김기창의 친일행적은 대중매체에 실린 삽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 총후병사(1944.4)
-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1943.8.6)
조선식산은행의 사보 《회심(會心)》지에 실린 그림과 훈련병을 그린 〈총후병사〉는 펜화에 담채를 가한 삽화이다. “완전군장으로 간이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병사의 옆모습을 포착한 것으로 얼굴과 주먹 쥔 손에는 성전에 참여한 멸사봉공의 굳은 의지가 생생하게 담겨있다”고 이태호 명지대 교수는 《친일파 99인》에서 밝혔다. 그러나 〈총후병사〉에 대해서 김기창은 "정식으로 그린 그림이 아니라 삽화에 불과해 친일한 작품으로 볼 수 없다."고 친일작품행위를 부정했다. 이러한 운보의 변명에도 불구하고 일제강점기에 당시 남양군도에서 대검을 소총에 끼운 채 적진을 향하고 있는 일본군의 육박전을 묘사한 〈적진육박〉(1944)이라는 작품이 공개되면서 이 말은 거짓말임이 드러나게 되었다. 1944년 식민지 조선에서 대규모의 미술전시회가 열렸던 적이 있었다. 그 전시회 이름이 '결전(決戰) 미술전람회'였다. 여기에 김기창이 출품한 작품이 바로 저 작품으로 이름이 '적진육박'이다. 이 작품으로 그 당시 전람회에서 '조선군 보도부장상'을 받았었다. 이에 대해 민족문제연구소는 “적진육박은 일제 군국주의를 찬양하고 소위 ‘황국신민’의 영광을 고취하기 위해 조선총독부의 후원을 받아 경성일보사가 1944년 3월부터 7개월간 서울에서 연 ‘결전’ 미술전람회에 출품됐다”고 밝혔다.
사후인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미술 분야에 선정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6점의 표준영정에 대한 재해석
김기창은 세종대왕, 을지문덕, 태종무열왕, 조헌, 김정호, 문무대왕 등 여러 역사인물의 초상화를 그렸으며 이 작품들은 모두 국가에 의해 표준영정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최근 친일파 인물로 평가받음에 따라 그가 그린 표준영정을 모두 바꾸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으며,
세종대왕 표준영정의 경우, 이를 기반으로 만원권 지폐 등 세종대왕을 묘사한 각종 도안과 동상 등이 제작되었는데, 김기창이 자신의 얼굴과 흡사하게 그렸다고 해서 대중적으로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멀티미디어 자료
*운보 김기창 판화전(2014.03.11~04.08)
관련정보
한글고문헌_전시자료
- 김기창은 세종대왕_표준영정을 그렸다.
인물
단체
- 운보문화재단은 김기창을 기념하는 단체이다.
공간
- 운보미술관은 김기창의 이름을 딴 공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