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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준섭, 《조선인물실록 1》, 도서출판 자작나무, 1996년. 中 8장 〈대동여지도의 김정호는 옥사하지 않았다〉 | **소준섭, 《조선인물실록 1》, 도서출판 자작나무, 1996년. 中 8장 〈대동여지도의 김정호는 옥사하지 않았다〉 |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0423 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정호"]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0423 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정호"] | ||
+ | *[https://ko.wikisource.org/wiki/%EA%B3%A0%EC%82%B0%EC%9E%90%EB%A5%BC_%ED%9A%8C%ED%95%A8 고산자를 회함] | ||
+ | **2차 자료: 최남선, <고산자를 懷함>, 1925년 8월 9일 및 10일자 《동아일보》 칼럼. | ||
*이향견문록 | *이향견문록 | ||
2016년 12월 27일 (화) 09:24 판
목차
개요
조선 후기 대표적 지리학자이며 지도 제작자. 자는 백원(伯源), 호는 고산자(古山子), 황해도 토산(兎山) 출생으로 본관은 청도(淸道)다. 한자가 다른 김정호(金正皡)로도 알려져 있다.
생애
김정호는 청도 김씨 봉산파로 황해도 토산에서 1804년[1] 무렵에 태어났다. 가정 형편은 빈한했고 지도 제작 등에 필요한 지식 등에 비추어 볼 때 몰락한 잔반(殘班)이나 중인으로 추정된다.[2]
언제 한양으로 이주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주한 뒤에는 남대문 밖 만리재에 살았다고 한다. 이는 김정호와 안면이 있는 한세진의 대인(對人) 증언을 근거로 한다.[3] 반면 동아일보 1925년 10월 9일자 기사에서는 그의 유허(遺墟, 옛 집터)가 남아 있는 남문 밖 약현에 기념비를 세우려 했음을 밝히고 있다. 서대문 밖 공덕리에 살았다는 설은 남대문 밖 공덕리를 잘못 설명한 듯이 보인다. 아무튼 만리재·약현·(남대문 밖) 공덕리는 김정호가 편찬한 지도와 지지에서 살펴보면 서로 가까운 곳에 있다.
동관(童冠)의 나이 때부터 지도와 지지에 관심을 가졌다[4] 고 최한기가 쓴 〈청구도〉 제문(題文)에 나타나 있다. ‘동관’은 18세나 19세로 추정한다.
1834년(순조 34년)에 지지 《동여도지》를 제1차 편찬하였고, 그 부도에 해당하는 지도 〈청구도〉도 펴내었다. 그 뒤 1851년(철종 2년) 무렵에 지지 《여도비지》를 편찬하였고, 1856년(철종 7년) 무렵에는 지도 〈동여도〉를 편찬하였다.
1861년(철종 12년)에는 앞서 만든 〈청구도〉와 〈동여도〉를 보완하여 〈대동여지도〉를 편찬한 뒤 1866년(고종 3년)까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착오를 정정하고 보궐(補闕)하기 위해 32권 15책의 《대동지지》를 편찬하며 살다가 그해에 남대문 밖 약현에서 폐질환으로 죽었으리라 여겨진다.
김정호의 사상
김정호는 자신에 대한 글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그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글은 《지도유설》과 《동여도지》 서문인데, 둘 다 김정호가 쓴 글이다. 다만 《지도유설》은 김정호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생각을 듣고 정리하여 쓴 글이며, 《동여도지》만 김정호의 사상을 나타낸 글이다. 《동여도지》에 나타난 김정호의 사상이나 역사지리 인식은 다음과 같다.
김정호는 지도(地圖)와 지지(地誌)가 서로 불가분의 관계라고 인식하였다. 지도로써 천하의 형세를 살필 수 있고 지지로써 역대의 제도와 문물을 헤아려 볼 수 있으므로 지도와 지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위국(爲國) 곧 치국(治國)의 대경(大經)이라고 지도와 지지의 관계를 강조하였다.
지도와 지지가 위와 같이 중요함에도 단기(檀箕; 단군과 기자) 이래로 지도가 없고 지지는 《삼국사기》에 이르러 비로소 만들어졌기 때문에 지지의 첫머리에 신라 이전의 사항을 두어 알게 하였다. 조선에 들어서는 초기에 《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되어 비로소 도적(圖籍)이 환연해졌지만, 김정호가 사는 때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편찬된 지 3백여 년이 지나 지리 정보에 차이가 많아졌으므로 이를 바로잡으려고 《동여도지》를 만들었다. 이에 따라 편목이나 구성이 《동국여지승람》의 구성과 비슷하다.
김정호는 또한 지도와 지지의 제작이 치국의 대경이라는 자신의 주장대로 치국경제에 유용하도록 《동여도지》 등을 제작할 때 문교무비(文敎武備)에 해당하는 관방과 역참, 학교와 서원 등 42개 편목을 자세히 설명하거나 표기하였다.
저서(작품)
지도와 지리지
김정호가 편찬한 지도와 지리지는 다음과 같다.
- 1834년(순조 34년) : 지지 《동여도지》 제1차 편찬 / 지도 〈청구도〉
- 1851년(철종 2년)부터 1856년(철종 7년) 사이 : 지지 《여도비지》
- 1856년(철종 7년)부터 1861년(철종 12년) 사이 : 지도 〈동여도〉
- 1861년(철종 12년) : 지도 〈대동여지도〉
- 1866년(고종 3년) : 지지 《대동지지》(1864년 편찬설이 있음)[5]
- 〈지구전후도〉(地球前後圖) : 최한기가 펴냈으며, 김정호가 판각하였다.[6]
위에서 〈청구도〉·〈동여도〉·〈대동여지도〉와 《동여도지》·《여도비지》·《대동지지》를 ‘김정호의 3대 지도와 3대 지지’라고도 부른다.
상훈과 추모
일제강점기인 1925년 10월 8일과 9일 2번에 걸친 『동아일보』의 「고산자를 회(懷)함」이란 글에서 김정호와 『대동여지도』를 통해 민족적 우수성을 되짚어보려고 하였다. 여기에서 처음으로 전국답사설·백두산등정설·판목몰수설이 나타났는데, 그 목적은 다음과 같다.
첫째, 김정호가 국가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신이 직접 측량하여 『대동여지도』를 제작했다는 점을 부각시켜 1800년(순조 즉위) 초반에 에도막부[江戶幕府]의 도움을 받아 전국을 답사하면서 일본을 측량하여 지도를 제작한 이노 다다타카[伊能忠敬]보다 더 뛰어나다는 것을 내세우려 하였다.
둘째, 근대식 측량지도 못지않은 정확한 지도가 조선에도 『대동여지도』란 이름으로 제작되었음을 부각시켜 민족적 우수함을 설명함으로써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 백성에게 자긍심을 불어넣어 주려고 하였다. 셋째, 관에 의한 판목몰수설을 통해 조선의 멸망을 백성 전체의 문제가 아니라 집권층의 무능력 탓으로 돌리려 하였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서 편찬한 『조선어독본(朝鮮語讀本)』에 김정호의 전기가 처음으로 수록되었는데, 전국답사설·백두산등정설·판목몰수설은 『동아일보』의 「고산자를 회함」에서 그대로 따왔다.
다만 첫째, 김정호와 『대동여지도』의 우수함을 부각시키려 비교의 대상으로 삼았던 이노 다다타카와 그가 제작한 지도에 대한 이야기를 생략하였다. 둘째, 김정호가 어린 시절에 보았던 조선의 지도가 정확성에서 엉터리라는 이야기를 삽입시킴으로써 김정호 이전 조선의 지도 제작 능력을 폄하시켰다. 셋째, 흥선대원군이란 구체적인 인물을 등장시켜 개항기 조선 정부의 무능력을 부각시킴으로써 조선이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편입된 것을 정당화시키려 하였다. 넷째, 조선 정부의 무능력을 더욱 부각시키기 위해 김정호 부녀의 옥사설을 추가하였다.
판목소각설은 『동아일보』의 기사나 『조선어독본』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 이야기로, 후대의 다른 자료에서 첨가된 것이다. 이와 같은 김정호의 전기는 1980년대까지도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으며, 1990년대부터 전국답사설·백두산등정설·옥사설·판목소각설이 모두 잘못된 이야기라는 새로운 연구가 나타나 점점 교정되기 시작했다.
김정호와 『대동여지도』에 관한 네 가지 설은 첫째, 전통시대에 필요한 거리 정보의 종류와 그것에 기초를 둔 지도의 제작 과정을 모르는 비전문가가 만들었기 때문에, 둘째, 김정호 이전에도 상당한 수준에 있었던 조선의 지도와 지리지 제작의 변천사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셋째, 김정호가 국토정보의 체계적 이해를 위해 평생에 걸쳐 지속적으로 지도와 지리지를 제작했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넷째, 김정호가 지도의 정확성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맞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 것이 이용의 편리였다는 점을 몰랐기 때문에 만들어진 잘못된 주장이다.
평가
유학자로서의 면모는 아래와 같다.
1572년(선조 5년)에 왕의 불공(佛供)을 반대하다가 파면되었다. 1574년 질정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그곳 문물제도 중 따를 만한 것을 적어 《동환봉사》(東還封事)를 내놓았다. 1581년(선조 14년) 공조좌랑에 임명, 전라도사로 나가 연산군 때 정해진 공안(貢案)의 개혁을 청하였다. 1582년 보은현감으로 소를 올려 단종의 후사(後嗣)를 세울 것과 사육신의 정문을 세워 표충할 것을 청하였다. 1589년 대궐에 엎드려 시정(時政)의 득실을 극론(極論)하다가 귀양갔다. 1589∼1591년 도요토미(豊臣秀吉)가 보낸 사신을 죽일 것을 청하고 왜적 대비책을 상소하였으나 거부되었다. 금산 전투에서 700의사(義士)와 함께 전몰하니 그 충성심은 길이 추앙받았다. 고경명·김천일·곽재우와 함께 임진 4충신(壬辰四忠臣)의 한 사람이다.
기타
민족기록화와의 연관성
최대섭의 1979년 민족기록화 작품 최대섭-화포와 화약을 제조하는 최무선의 중심 인물로 등장한다.
고려 말 왜구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적극적으로 화약을 비롯한 무기 연구 및 제조에 힘썼으며, 우리나라 무기제조사와 전쟁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이향견문록에서의 김정호
노드 및 관계
노드 | 관계 | 노드 | 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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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 | isTheSubjectOf | 김태-김정호의 대동여지도 | 김태-김정호의 대동여지도는 김정호를 소재로 그려진 민족기록화이다. |
김정호 | creates | 대동여지도 | 대동여지도는 김정호에 의해 제작된 기록이다. |
김정호 | isMentionedIn | 이향견문록 | 이향견문록은 김정호가 언급된 기록이다. |
김정호 | isMentionedIn | 청구도제 | 청구도제는 김정호가 언급된 기록이다. |
김정호 | isMentionedIn | 금당초고 | 금당초고는 김정호가 언급된 기록이다. |
김정호 | creates | 청구도 | 청구도는 김정호에 의해 제작된 기록이다. |
김정호 | isMentionedIn | 오주연문장전상고 | 오주연문장전상고는 김정호가 언급된 기록이다. |
김정호 | hasFriendshipWith | 최한기 | 최한기는 김정호와 친분관계가 있는 인물이다. |
김정호 | hasFriendshipWith | 김정희 | 김정희는 김정호와 친분관계가 있는 인물이다. |
함께 보기
- 최한기
- 신헌
- 청구도
- 대동여지도
- 대동지지
- 지도박물관
- 95016 김정호 - 김정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소행성의 이름에 김정호를 따서 지었다.
- 고산자로 - 서울특별시 성동구 행당동의 옛 청량리 부근. 김정호의 호를 따서 지었다.
- 《고산자, 대동여지도》 - 영화, 2016.09.07 개봉, 감독:강우석, 출연:차승원, 유준상
참고문헌
- 나무위키 "김정호"
- 위키백과 "김정호"
- 2차 자료: 이상태, 《한국 고지도 발달사》, 혜안, 1999년, 185~242쪽.
- 소준섭, 《조선인물실록 1》, 도서출판 자작나무, 1996년. 中 8장 〈대동여지도의 김정호는 옥사하지 않았다〉
- 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정호"
- 고산자를 회함
- 2차 자료: 최남선, <고산자를 懷함>, 1925년 8월 9일 및 10일자 《동아일보》 칼럼.
- 이향견문록
각주
- ↑ 김양선(金良善)의 주장.
- ↑ 청도 김씨 대동보에 따르면 청도 김씨 봉산파는 현재 한국 전쟁으로 실계(失系; 가계가 끊김)되었으며, 한국 전쟁 이전에 편찬된 예전 족보에도 김정호는 실려 있지 않다. 이를 근거로 김정호의 집안이 청도 김씨 봉산파이기는 하나 매우 한미한 집안이었음을 추측된다.
- ↑ 정인보(鄭寅普), 〈대동여지도〉, 《창원국학산고》 제2편 조선고서해제; 동아일보 1931년 3월 9일자와 16일자.
- ↑ 원문은 “金友正浩 年自童冠 深留意圖志”이다.
- ↑ 인용 오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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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가 잘못되었습니다;kjh1
라는 이름을 가진 주석에 제공한 텍스트가 없습니다 - ↑ 인용 오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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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자료
- 정명목 서용선 진행, 「작가와의 대담」, 『김태, 1952–1972』,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1996.
- "김정호, 20년 동안 골방에서 대동여지도 만들었다" - 김정호의 전국답사설을 비판하는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