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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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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민족기록화_장소_설록다원강진_전경.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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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출처= "전남 강진다원", <html><online style="color:purple">『대한민국 구석구석』<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관광공사.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30863&cid=42856&categoryId=42856 전남 강진다원]", 대한민국 구석구석,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최종확인: 2017년 04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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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설록다원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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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 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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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도= 34.7406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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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도= 126.70474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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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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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정약용이 월출산에서 나는 차가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좋은 차라고 할 만큼 이곳은 차 재배지로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는 곳이다. 월출산 제법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낮과 밤의 기온차가 크며 안개가 많이 생겨 이곳에서 생산된 차는 떫은 맛이 덜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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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록차로 유명한 (주)태평양에서 가꾸고 있는 4개의 차 재배지 중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진 곳으로 면적이 33㏊에 달하는데 단일 다원으로는 제주다원 다음가는 규모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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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의 대한다원 등이 많이 알려져 관광지화된 반면 이곳은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아 오가는 사람이 적어 한적하다. 특히 차밭 사이로 길게 난 길을 따라 차를 달리는 드라이브가 이곳에서 누리는 제일의 즐거움인데, 양옆으로 넓게 펼쳐진 푸른 차밭 풍경이 정말 시원하다. 천천히 달려도 뒤에서 누가 재촉하는 사람이 없어 좋은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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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지식백과] 설록차 강진다원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 2010. 1. 15., 마로니에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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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동 별서정원]]의 5대 주인으로, 4대 주인인 [[이덕휘]]의 양아들이자, [[정약용]]의 제자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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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의 금강산이라 불리우는 월출산은 큰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으로 그 경치가 마치 한폭의 산수화를 그려 놓은 것과 같이 산세가 뛰어나며 예로부터 산 주변의 여러 사찰을 중심으로 차나무가 재배 되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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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월출산 아래의 볼모 야산도 1981년 5월에 개간되기 시작는데, 이곳은 옛부터 녹차를 애호하는 문인 선비들의 전통사상이 면면이 이어져 온 곳으로 특히 강진 해남지역의 녹차 사랑은 초의선사와 다산 정약용의 영향으로 그 뿌리가 더욱 굳건했다. 그래서 기후조건이 적합한 월출산 남쪽기슭의 볼모지를 개간하여 약 10만여평의 다원을 조성하게 되었다. 예로부터 좋은 차는 명산에서 생산된다는 말이 있듯이 해방 직전까지 국내 최초의 녹차제품인 백운옥판차(白雲玉板茶)라는 전차(錢茶)를 생산하던 차산지이기도 한 월출산은 적당한 습도와 주야간 온도차가 크고 안개가 많아 차의 떫은 맛이 적고 향이 강한 것이 특징이다. 이 곳 다원은 이른 봄부터 어린싹을 채엽하기 시작하여 1년에 3~4회 채엽을 한다. 이곳은 잘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해마다 봄철이면 많은 관광객들이 방문하는 관광명소이다. 넓은 차밭과 서리방지용 휀이 설치되어 있어서 이국적인 면을 볼 수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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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월출산 다원 인근 관광지로 다산정약용 선생의 유배지인 다산초당, 백련사, 영랑생가, 강진고려청자도요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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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지식백과] 전남 강진다원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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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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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헌]]에 관해서는 특별히 남아 있는 기록이 없어 자세한 사정을 알기 어렵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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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동 별서정원]]의 5대 주인으로, 4대 주인인 [[이덕휘]]의 아우 [[이석휘]]의 아들로, 아들이 없었던 [[이덕휘]]의 양아들이 되어 대를 이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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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헌]]은 [[정약용]]의 [[백운동 별서정원]] 방문을 계기로 다산 문하 막내 제자로 합류하여 [[정약용]]과 사제의 인연을 맺게 되었는데, [[정약용]]이 유배에서 풀려나 상경한 뒤에도 편지를 주고받으며 교류를 이어갔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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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830년 스승 [[정약용|다산]]에게 떡차를 만들어 보냈고, 이후 27년이 지난 1857년까지도 차를 만들어 스승의 아들인 [[정학연]]에게 차를 보내며 친분을 유지하였다. 이는 1857년 11월 22일 [[정학연]]이 쓴 <백운산관에 보내는 정햑연의 답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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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내온 글에 서폭 가득 넘치는 것은 온통 지난날을 말하고 우의를 얘기하는 말뿐이어서 편쳐 읽는 동안 마음이 뭉클하여 맑은 눈물이 눈에 어리기까지 하였소. 다만 안타깝기는 그대가 이쪽으로 올라오지 못하고 나는 여유가 없어 이생에서 서로 만나 손을 잡아보기는 마치 까마귀의 머리가 희어지고 황하의 물이 맑아지는 것과 같다 하겠소. 그러니 이를 어찌하오...<ref>정민, 『강진 백운동 별서정원』, 글항아리, 2015, 148-149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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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성근묵|근재 성근묵]]의 문인이 되어 중앙 학계와도 소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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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민족기록화_인물_이덕휘_다산이차를요청한편지.jpg|다산이 차를 요청한 편지<ref>김태식,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1563335 다산이 차를 요청한 편지]", 『연합뉴스』, 작성일: 2007년 3월 4일.</ref><ref>기사에는 이덕휘에게 보낸 편지라고 잘못 나와있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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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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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민, 『강진 백운동 별서정원』, 글항아리,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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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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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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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민족기록화]][[분류:인물]][[분류: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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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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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4월 23일 (일) 16:35 판

설록다원강진()
[[file:|270px|thumb|center|]]
대표명칭 설록다원강진
유형 관광농원


정의

일찍이 정약용이 월출산에서 나는 차가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좋은 차라고 할 만큼 이곳은 차 재배지로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는 곳이다. 월출산 제법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낮과 밤의 기온차가 크며 안개가 많이 생겨 이곳에서 생산된 차는 떫은 맛이 덜하다고 한다.

설록차로 유명한 (주)태평양에서 가꾸고 있는 4개의 차 재배지 중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진 곳으로 면적이 33㏊에 달하는데 단일 다원으로는 제주다원 다음가는 규모라고 한다.

보성의 대한다원 등이 많이 알려져 관광지화된 반면 이곳은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아 오가는 사람이 적어 한적하다. 특히 차밭 사이로 길게 난 길을 따라 차를 달리는 드라이브가 이곳에서 누리는 제일의 즐거움인데, 양옆으로 넓게 펼쳐진 푸른 차밭 풍경이 정말 시원하다. 천천히 달려도 뒤에서 누가 재촉하는 사람이 없어 좋은 길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설록차 강진다원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 2010. 1. 15., 마로니에북스)


백운동 별서정원의 5대 주인으로, 4대 주인인 이덕휘의 양아들이자, 정약용의 제자이다.


남한의 금강산이라 불리우는 월출산은 큰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으로 그 경치가 마치 한폭의 산수화를 그려 놓은 것과 같이 산세가 뛰어나며 예로부터 산 주변의 여러 사찰을 중심으로 차나무가 재배 되었던 곳이다.

강진 월출산 아래의 볼모 야산도 1981년 5월에 개간되기 시작는데, 이곳은 옛부터 녹차를 애호하는 문인 선비들의 전통사상이 면면이 이어져 온 곳으로 특히 강진 해남지역의 녹차 사랑은 초의선사와 다산 정약용의 영향으로 그 뿌리가 더욱 굳건했다. 그래서 기후조건이 적합한 월출산 남쪽기슭의 볼모지를 개간하여 약 10만여평의 다원을 조성하게 되었다. 예로부터 좋은 차는 명산에서 생산된다는 말이 있듯이 해방 직전까지 국내 최초의 녹차제품인 백운옥판차(白雲玉板茶)라는 전차(錢茶)를 생산하던 차산지이기도 한 월출산은 적당한 습도와 주야간 온도차가 크고 안개가 많아 차의 떫은 맛이 적고 향이 강한 것이 특징이다. 이 곳 다원은 이른 봄부터 어린싹을 채엽하기 시작하여 1년에 3~4회 채엽을 한다. 이곳은 잘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해마다 봄철이면 많은 관광객들이 방문하는 관광명소이다. 넓은 차밭과 서리방지용 휀이 설치되어 있어서 이국적인 면을 볼 수 있는 곳이다.

강진 월출산 다원 인근 관광지로 다산정약용 선생의 유배지인 다산초당, 백련사, 영랑생가, 강진고려청자도요지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남 강진다원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내용

이시헌에 관해서는 특별히 남아 있는 기록이 없어 자세한 사정을 알기 어렵다.
백운동 별서정원의 5대 주인으로, 4대 주인인 이덕휘의 아우 이석휘의 아들로, 아들이 없었던 이덕휘의 양아들이 되어 대를 이었다.
그는 백운동 별서정원의 중흥조라 할 만한 인물로, 선대의 문집과 행록을 펴내고, 집안에 전해오던 필묵들을 묶어 책자로 만듦으로써 백운동 별서정원의 역사를 오늘날 전하게 해주었다. 특히, 그가 저술한 『백운세수첩(白雲世守帖)』에는 역대 명류들이 백운동 8영을 읊은 연작시가 다수 실려있고, 이시헌의 문집 『자이집(自怡集)』에는 백운동의 14경을 노래한 시를 비롯해 백운동 별서정원에서의 일상이 기록되어 있다.
이시헌정약용백운동 별서정원 방문을 계기로 다산 문하 막내 제자로 합류하여 정약용과 사제의 인연을 맺게 되었는데, 정약용이 유배에서 풀려나 상경한 뒤에도 편지를 주고받으며 교류를 이어갔다.
이시헌다산 해배 후 다산의 부탁으로 백운동 운당원 대숲에서 자생하는 찻잎을 채취해 삼증삼쇄 떡차를 만들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현재 백운동 별서정원 인근에 형성된 설록다원강진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는 1830년 스승 다산에게 떡차를 만들어 보냈고, 이후 27년이 지난 1857년까지도 차를 만들어 스승의 아들인 정학연에게 차를 보내며 친분을 유지하였다. 이는 1857년 11월 22일 정학연이 쓴 <백운산관에 보내는 정햑연의 답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보내온 글에 서폭 가득 넘치는 것은 온통 지난날을 말하고 우의를 얘기하는 말뿐이어서 편쳐 읽는 동안 마음이 뭉클하여 맑은 눈물이 눈에 어리기까지 하였소. 다만 안타깝기는 그대가 이쪽으로 올라오지 못하고 나는 여유가 없어 이생에서 서로 만나 손을 잡아보기는 마치 까마귀의 머리가 희어지고 황하의 물이 맑아지는 것과 같다 하겠소. 그러니 이를 어찌하오...[1]

이후 근재 성근묵의 문인이 되어 중앙 학계와도 소통하였다.

시각자료

사진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정약용 이시헌 A는 B의 스승이다
성근묵 이시헌 A는 B의 스승이다
이시헌 이덕휘 A는 B의 아들이다
이시헌 정학연 A는 B와 교유하였다
이시헌 백운동 별서정원 A는 B의 주인이다
이시헌 설록다원강진 A는 B와 관련이 있다
이시헌 백운세수첩 A는 B를 저술하였다
이시헌 자이집 A는 B를 저술하였다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공간정보

위도 경도 내용
34.7419353 126.6975985 백운동 별서정원은 설록다원강진과 관련이 있다
34.7406953 126.7047464 설록다원강진은 설록다원강진과 관련이 있다

참고문헌

  • 정민, 『강진 백운동 별서정원』, 글항아리, 2015.

주석

  1. 정민, 『강진 백운동 별서정원』, 글항아리, 2015, 148-149쪽.
  2. 김태식, "다산이 차를 요청한 편지", 『연합뉴스』, 작성일: 2007년 3월 4일.
  3. 기사에는 이덕휘에게 보낸 편지라고 잘못 나와있다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의순 설록다원강진 A는 B와 관련이 있다



이시헌은 1830년 스승 다산에게 떡차를 만들어 보냈고, 이후 27년이 지난 1857년까지도 여전히 차를 만들어 다산의 아들에게 차를 보냈음 이는 1857년 11월 22일 정학연이 쓴 <백운산관에 보내는 정햑연의 답장>에서 확인가능 다산 해배 후 다산의 부탁으로 백운동 운당원 대숲에서 자생하는 찻잎을 채취해 삼증삼쇄 떡차를 만들기 시작. 이후 향명 또는 작설차의 이름을 걸고 후손에 이르기까지 백운동 차는 지속적으로 생산되었다. 현재 백운동 별서 인근에는 광범위하게 태평양 설로갇원이 조성되어 있어 주요한 차 생산지의 한 곳으로 각광받고 있다. 이전의 차 재배와 차 생산의 전통이 기업과 만나 발전적 형태로 자리잡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