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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 28일 (화) 23:28 판

송시열 분재 편지
한글팀 송시열 분재편지.png
영문명칭 Song Siyeol’s writing to his daughter-in-law
작자 송시열
간행시기 1671년(현종12)
소장처 국립청주박물관
유형 고문서
크기(세로×가로) 33.0×102.5㎝
판본 필사본
수량 1장
표기문자 한글



정의

1671년(현종12) 5월 10일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손자 며느리 박씨에게 써준 글이다.

내용

1671년(현종12) 5월 10일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손자 며느리 박씨에게 써준 글이다. 송시열은 후사가 없던 형의 부부의 신주를 자신의 손자 송은석(宋殷錫)에게 모시게 하였다. 신주를 당부하며 제사 비용을 위한 땅과 노비의 상세 내역을 기록해 송은석에게 주었는데, 그 내용을 손자 며느리가 알기 쉽도록 한글로 풀어 써준 것이 바로 이 문서이다.[1]

부연항목

참고 [1]

  • 이 편지에서 언급되는 형은 송시열의 맏형인 송시희(宋時熹)이다.
  • 송시희는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오랑캐 기병(騎兵)이 침범해 들어오자 목숨을 걸고 홀로 싸우다가 죽었다.
  • 송시희의 아내는 충의위(忠義衛) 김성진(金聲振)의 딸 안동 김씨로, 남편의 죽음을 몹시 슬퍼하다 같은 해에 죽어서 합장(合葬)하였다.
  • 무후한 자식의 봉사는 종가에서 그 신주를 모시고 죽은 사람의 4대에 이르는 후손이 없을 때까지 제사를 지내주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송씨가 종손인 송흠조(宋欽祚)는 서자만 두었을 뿐만 아니라 그마저도 일찍 죽어 제사를 지낼 형편이 되지 못하였다. 이에 송시열 의 어머니 선산 곽씨는 송시희 내외의 제사를 송시열이 모시도록 하였다
  • 송시열은 송기태(宋基泰)를 양자로 입양했다.
  • 송기태(宋基泰)의 친부는 송시열의 숙부인 송희조(宋熙祚)의 양자인 송시영(宋時瑩)-'송시열과 사촌지간'이다. 친형제들 사이에서도 자식이 귀해 사촌형제의 자식을 양자로 들인 것이다.
  • 송기태(宋基泰)의 아내 즉, 며느리 이씨는 전주 이씨이다.
  • 송기태(宋基泰)의 아들은 송은석(宋殷錫)이다.
  • 송은석(宋殷錫)의 아내 즉, 손자 며느리 박씨는 밀양 박씨이며 그 아버지는 박승건(朴承健)이다.
  • 송시열은 자신의 사당 옆에 형 송시희의 사당을 지어 신주를 모셔 달라고 당부한다. 그리고 송은석과 밀양박씨가 죽은 후에는 묘제사만 지내도록 자손들에게 전하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밀양박씨는 시조부 송시열보다 8년이나 먼저 세상을 떠났으므로 송은석과 그의 아들 송일원(宋一源) 내외가 그의 분부를 받들게 되었다.
  • 봉사조

부연

이 편지에서 언급되는 송시열의 형은 맏형인 송시희(宋時熹)이다. 송시희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오랑캐 기병(騎兵)이 침범해 들어오자 목숨을 걸고 홀로 싸우다가 죽었다. 송시희의 아내는 충의위(忠義衛) 김성진(金聲振)의 딸 안동 김씨인데, 남편의 죽음을 몹시 슬퍼하다 같은 해에 죽어서 합장(合葬)하였다. 후손이 없는 자식에 대한 제사는 종가에서 그 신주를 모시고 죽은 사람의 4대에 이르는 후손이 없을 때까지 제사를 지내주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송씨 가문의 종손인 송흠조(宋欽祚)는 서자만 두었을 뿐만 아니라 그마저도 일찍 죽어 제사를 지낼 형편이 되지 못하였다. 이에 송시열의 모친인 선산 곽씨송시희 내외의 제사를 송시열이 모시도록 하였다. 이때 송시열송기태(宋基泰)를 양자로 입양한 상황이었다. 송기태(宋基泰)의 친부는 송시열의 숙부인 송희조(宋熙祚)의 양자 송시영(宋時瑩)-송시열과 사촌지간-이었는데, 친형제들 사이에서도 자식이 귀해 사촌형제의 자식을 양자로 들인 것이다. 송기태의 아내 즉, 송시열의 며느리 이씨는 전주 이씨이다. 그리고 송기태의 아들은 송은석(宋殷錫)인데, 송은석의 아내 즉, 송시열의 손자 며느리는 밀양 박씨이며 그 아버지는 박승건(朴承健)이다. 송시열은 65세에 분재 문서와 편지를 써서 자신의 제사 및 맏형 송시희의 제사를 장손인 송은석과 그의 처 박씨에게 맡긴다. 양아들인 송기태는 당시 홀아비가 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송시열은 자신의 사당 옆에 형 송시희의 사당을 지어 신주를 모셔 달라고 당부한다. 그리고 송은석밀양 박씨가 죽은 후에는 묘제사만 지내도록 자손들에게 전하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밀양 박씨는 시조부인 송시열보다 8년이나 먼저 세상을 떠났으므로 송은석과 그의 아들 송일원(宋一源) 내외가 그의 분부를 받들게 되었다. 봉사조 노비와 전지는 대대로 장자(長子)가 맡고, 혹 시동생(송은석의 동생들)이나 그 자손들 중 패가(敗家)하는 이가 있다면 가서 살게 하고, 묘제사를 지내려고 한다면 그 전지를 잠시 주고 나중에는 다시 종손이 차지해야 한다고 명시하였다. 송시열송은석에게 분재 문서를 전하고, 한글로 손자며느리에게도 제사 방식과 봉사조 내용을 알려 주었다. 봉사조 노비는 노 4구과 비 6구로 총 10명이었다. 그러나 노비 가운데 제현이는 죽고, 귀인이는 도망을 갔으므로 최종적으로는 노 2구과 비 6구가 된다. 한편 노비들의 자식들도 모두 맏집이 차지하여 지손들이 차지하지 않도록 못을 박았다.[2]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송시열(宋時烈) 송시열 분재 편지 A는 B를 작성하였다 1671년

시간정보

시간 내용
1671년 송시열송시열 분재 편지를 작성하였다.

공간정보

위도 경도 내용
36.649161 127.512186 송시열 분재 편지가 국립청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주석

  1.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06.28, 178쪽.
  2.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서 2017년 1월 20일에 진행한 금요강독회 '발표내용'(박꽃새미)에서 발췌 및 수정 적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