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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원(포천 [[서성(조선)|서성]]종가 종손)(徐基源)
 
서기원(포천 [[서성(조선)|서성]]종가 종손)(徐基源)
  
본관은 [[대구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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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서씨]](大丘 徐氏) - 유교적 범절과 德으로 지켜온 '흔들림 없는' 명문가 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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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서씨]] 藥峯 [[서성(조선)|서성]] 15대 종손 [[서동성(포천)|서동성]], 소년 시절 큰집으로 양자… 중학생 때부터 불천위 제사 모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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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포천군 포천읍 설운리에는 명문가 [[대구 서씨]] 약봉 [[서성(조선)|서성]] 선생의 종택이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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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내에서 종가와 종택 그리고 종손과 불천위 사당을 고루 갖추고, ‘봉제사 접빈객(奉祭祀 接賓客)’을 실천해 종가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는 집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약봉 종가는 이 모든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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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를 지나 하송우리라는 이정표와 육군 제1291부대 표지판을 보며 종택을 찾았다. 마침 묘소를 단장하고 있는 15대 종손인 [[서동성(포천)|서동성]](徐東晟, 1955년생)씨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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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손은 소년 시절에 백부(伯父)에게 출계(出系·양자로 들어가서 그 집의 대를 이음)하여 약봉의 종통(宗統)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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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生家·생부모 집) 부친은 약봉의 14대손인 [[서기원(포천)|서기원]](徐基源, 1925년생)씨다. 80이 넘은 고령임에도 건강하고 온화한 모습에 절로 경의가 표해진다. 종택에 얽힌 이야기를 요청하자 한국전쟁 때의 수난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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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역의 대표적 종택에 걸맞는 건물 규모 때문에 인민군 사령부로 사용되었고, 펄럭이는 인공기가 목표점이 돼 미군기의 집중 폭격을 받아 전소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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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하게도 안동의 [[소호헌]](蘇湖軒·조선 중종 때 약봉의 부친 [[서해(조선)|서해]] 선생이 서재로 쓰기 위해 지은 별당) 앞에서 고색창연하게 자라던 50여 그루의 노송 역시 이 무렵 폭격으로 모두 소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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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수 없이 묘소 아래의 재실(齋室·사당 옆에 제사를 지내려고 지은 집)을 보수해 살기 시작한 것이 오늘의 이 집이라고 한다. 첫눈에도 약봉 종택의 위상으로는 다소 미흡한 단촐한 신식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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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곱게 단청한 불천위 사당과 재실은 그런대로 규모를 갖추고 있었고 최근엔 신도비의 비각까지 조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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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봉 종가는 [[서기원(포천)|서기원]]씨의 백씨(伯氏)인 서세원씨(1917년생)가 무남독녀를 남긴 채 일찍(25세) 세상을 떠나면서 종통의 맥이 끊길 위기를 맞았다. 당시 [[서기원(포천)|서기원]]씨는 열세 살의 어린 나이였다고 한다. 종가를 지키기 위한 고단한 여정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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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은 60세 전에 돌아가셨지만 아들들에게 평소 명문가라는 가르침과 경조 사상에 대해서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교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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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를 수호하고 상대(上代)의 묘사 날짜를 조정하는 문제, 대종회와의 협조, 종친들과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 등에 대해서 생전에 세세히 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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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통을 잇기 위해 아들을 양자로 보낸 [[서기원(포천)|서기원]]씨의 처지를 영남지방에서는 보통 ‘대원군’이라 칭한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지만 400여 년을 사이에 두고 되풀이된 약봉가의 역사 순환엔 참으로 묘한 기분마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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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헌공 [[서엄]], 가풍 잇게 한 일등 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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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약봉가는 당연히 약봉 [[서성(조선)|서성]] 선생의 성취에 뿌리를 둔다. 그러나 그 기반에는 약봉의 부친인 함재 [[서해(조선)|서해]], 그리고 그의 부인인 [[고성 이씨 부인]], 약봉의 중부(仲父)인 춘헌공(春軒公) [[서엄]](徐山+奄)의 뒷받침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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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춘헌공은 약봉을 학문의 길로 인도했고 명문가 규수를 배필로 맞게 했다. 그는 또한 장래에 가문을 일으킬 인물임을 알아본 지인지감(知人之感)을 지녔고 지속적으로 도움도 주었다. 말하자면 후견인, 시쳇말로 멘토(mentor)인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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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책으로만 보았던 춘헌공의 역할을 오늘날 약봉 종손의 부친인 [[서기원(포천)|서기원]]씨를 통해 다시 확인했다. 종통의 끊어짐은 종가의 문을 닫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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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위기의 순간에 [[서기원(포천)|서기원]]씨가 심사원려(深思遠慮)를 발휘했다. 종가에서 종손이 후사를 잇지 못하면 당내(堂內) 또는 근친 간에서 양자를 구하게 된다. 종손으로 양자를 가게 되면 자신은 종손이지만 생가의 부친은 종손이 아닌 ‘대원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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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지방의 대표적 명문 광산 김씨 양간공파 후조당(後彫堂) 김부필(金富弼) 선생의 종가 역시 그러한 경우다. 김준식씨가 종손이고 생가 부친인 죽초(竹肖) 김택진(金澤鎭)씨는 ‘대원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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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대원군으로 가장 유명한 흥선대원군의 경우 소위 수렴청정을 통해 정사에 적극 개입했다. 왕가가 그러할진대 사가(私家)의 종가 역시 생가의 부친은 종가의 일에 개입할 여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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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개입이 정도(正道)를 넘어 욕심에서 나오면 이는 흥선대원군이 나라를 그르친 이상으로 나쁜 폐해를 낳을 수 있다. 그러나 약봉 종가의 생가 부친인 [[서기원(포천)|서기원]]씨는 문중의 학덕이 높은 어른인 문장(門長)과 같은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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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손 [[서동성(포천)|서동성]]씨가 받았을 중압감은 일반인으로서는 헤아리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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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1학년 때 약봉 선조의 불천위 제사를 모셨다는 그는 이미 그때 문중사나 의례에 익숙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문중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고등학교밖에 못나왔다고 말하지만, 그가 보인 예의와 언사 등은 대학을 졸업한 사람 이상으로 예사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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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늦둥이를 보았는데, 이제 초등학교 5학년인 그 녀석도 제사 절차에 대해선 훤히 알아요”라는 말에서 명문가는 역시 뭔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고, 그것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게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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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손의 맏아들은 올해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재료공학부에 입학했다. 그의 이름은 상덕(尙德)이다. 상덕은 퇴계 선생을 모신 도산서원의 사당 이름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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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봉의 부친인 함재 서해 선생이 젊은 시절 안동의 퇴계 선생을 찾아가 학문을 배워 크게 인정을 받았던 일이 오버랩된다. 역사의 반복을 또 한번 느낀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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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봉가의 가훈 - 勿怠爲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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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자 : 서정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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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봉은 무옥(誣獄)에 연루되어 옥에 갇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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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여러 아들들에게, "나라 일이 이지경이 되었는데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 너희들은 아이들을 잘 가르치고 그들로 하여금 부지런히 글을 읽고 선(善)을 행하도록 하여라. 가화(家禍)가 있다고 해서 상심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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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약봉가는 이 말을 요약해 '勿怠爲善(물태위선)'을 가훈으로 쓰고 있다. "착한 일을 하는 데에 게으르지 말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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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가집 위치:경기도 포천시 설운동 1-14번지
 
종가집 위치:경기도 포천시 설운동 1-14번지

2024년 2월 15일 (목) 14:36 판

서기원(포천 서성종가 종손)(徐基源)

대구 서씨(大丘 徐氏) - 유교적 범절과 德으로 지켜온 '흔들림 없는' 명문가 위상

대구 서씨 藥峯 서성 15대 종손 서동성, 소년 시절 큰집으로 양자… 중학생 때부터 불천위 제사 모셔

경기도 포천군 포천읍 설운리에는 명문가 대구 서씨 약봉 서성 선생의 종택이 자리잡고 있다. 경기도 내에서 종가와 종택 그리고 종손과 불천위 사당을 고루 갖추고, ‘봉제사 접빈객(奉祭祀 接賓客)’을 실천해 종가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는 집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약봉 종가는 이 모든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의정부를 지나 하송우리라는 이정표와 육군 제1291부대 표지판을 보며 종택을 찾았다. 마침 묘소를 단장하고 있는 15대 종손인 서동성(徐東晟, 1955년생)씨를 만났다.

종손은 소년 시절에 백부(伯父)에게 출계(出系·양자로 들어가서 그 집의 대를 이음)하여 약봉의 종통(宗統)을 이었다.

생가(生家·생부모 집) 부친은 약봉의 14대손인 서기원(徐基源, 1925년생)씨다. 80이 넘은 고령임에도 건강하고 온화한 모습에 절로 경의가 표해진다. 종택에 얽힌 이야기를 요청하자 한국전쟁 때의 수난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이 지역의 대표적 종택에 걸맞는 건물 규모 때문에 인민군 사령부로 사용되었고, 펄럭이는 인공기가 목표점이 돼 미군기의 집중 폭격을 받아 전소됐다고 한다.

불행하게도 안동의 소호헌(蘇湖軒·조선 중종 때 약봉의 부친 서해 선생이 서재로 쓰기 위해 지은 별당) 앞에서 고색창연하게 자라던 50여 그루의 노송 역시 이 무렵 폭격으로 모두 소실되었다.

하는 수 없이 묘소 아래의 재실(齋室·사당 옆에 제사를 지내려고 지은 집)을 보수해 살기 시작한 것이 오늘의 이 집이라고 한다. 첫눈에도 약봉 종택의 위상으로는 다소 미흡한 단촐한 신식 건물이다.

하지만 곱게 단청한 불천위 사당과 재실은 그런대로 규모를 갖추고 있었고 최근엔 신도비의 비각까지 조성했다.

약봉 종가는 서기원씨의 백씨(伯氏)인 서세원씨(1917년생)가 무남독녀를 남긴 채 일찍(25세) 세상을 떠나면서 종통의 맥이 끊길 위기를 맞았다. 당시 서기원씨는 열세 살의 어린 나이였다고 한다. 종가를 지키기 위한 고단한 여정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부친은 60세 전에 돌아가셨지만 아들들에게 평소 명문가라는 가르침과 경조 사상에 대해서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교육했다.

묘소를 수호하고 상대(上代)의 묘사 날짜를 조정하는 문제, 대종회와의 협조, 종친들과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 등에 대해서 생전에 세세히 알려주었다.

종통을 잇기 위해 아들을 양자로 보낸 서기원씨의 처지를 영남지방에서는 보통 ‘대원군’이라 칭한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지만 400여 년을 사이에 두고 되풀이된 약봉가의 역사 순환엔 참으로 묘한 기분마저 든다.

춘헌공 서엄, 가풍 잇게 한 일등 공신

오늘날의 약봉가는 당연히 약봉 서성 선생의 성취에 뿌리를 둔다. 그러나 그 기반에는 약봉의 부친인 함재 서해, 그리고 그의 부인인 고성 이씨 부인, 약봉의 중부(仲父)인 춘헌공(春軒公) 서엄(徐山+奄)의 뒷받침이 있었다.

특히 춘헌공은 약봉을 학문의 길로 인도했고 명문가 규수를 배필로 맞게 했다. 그는 또한 장래에 가문을 일으킬 인물임을 알아본 지인지감(知人之感)을 지녔고 지속적으로 도움도 주었다. 말하자면 후견인, 시쳇말로 멘토(mentor)인 셈이었다.

필자는 책으로만 보았던 춘헌공의 역할을 오늘날 약봉 종손의 부친인 서기원씨를 통해 다시 확인했다. 종통의 끊어짐은 종가의 문을 닫는 것을 의미한다.

그 위기의 순간에 서기원씨가 심사원려(深思遠慮)를 발휘했다. 종가에서 종손이 후사를 잇지 못하면 당내(堂內) 또는 근친 간에서 양자를 구하게 된다. 종손으로 양자를 가게 되면 자신은 종손이지만 생가의 부친은 종손이 아닌 ‘대원군’인 것이다.

안동 지방의 대표적 명문 광산 김씨 양간공파 후조당(後彫堂) 김부필(金富弼) 선생의 종가 역시 그러한 경우다. 김준식씨가 종손이고 생가 부친인 죽초(竹肖) 김택진(金澤鎭)씨는 ‘대원군’이다.

역사상 대원군으로 가장 유명한 흥선대원군의 경우 소위 수렴청정을 통해 정사에 적극 개입했다. 왕가가 그러할진대 사가(私家)의 종가 역시 생가의 부친은 종가의 일에 개입할 여지가 있었다.

그런데 그 개입이 정도(正道)를 넘어 욕심에서 나오면 이는 흥선대원군이 나라를 그르친 이상으로 나쁜 폐해를 낳을 수 있다. 그러나 약봉 종가의 생가 부친인 서기원씨는 문중의 학덕이 높은 어른인 문장(門長)과 같은 역할을 했다.


종손 서동성씨가 받았을 중압감은 일반인으로서는 헤아리기 어렵다.

중학교 1학년 때 약봉 선조의 불천위 제사를 모셨다는 그는 이미 그때 문중사나 의례에 익숙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문중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고등학교밖에 못나왔다고 말하지만, 그가 보인 예의와 언사 등은 대학을 졸업한 사람 이상으로 예사롭지 않다.

“제가 늦둥이를 보았는데, 이제 초등학교 5학년인 그 녀석도 제사 절차에 대해선 훤히 알아요”라는 말에서 명문가는 역시 뭔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고, 그것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게 아닌 것이다.

종손의 맏아들은 올해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재료공학부에 입학했다. 그의 이름은 상덕(尙德)이다. 상덕은 퇴계 선생을 모신 도산서원의 사당 이름과 같다.

약봉의 부친인 함재 서해 선생이 젊은 시절 안동의 퇴계 선생을 찾아가 학문을 배워 크게 인정을 받았던 일이 오버랩된다. 역사의 반복을 또 한번 느낀다고나 할까.

약봉가의 가훈 - 勿怠爲善

소장자 : 서정용 약봉은 무옥(誣獄)에 연루되어 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때 여러 아들들에게, "나라 일이 이지경이 되었는데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 너희들은 아이들을 잘 가르치고 그들로 하여금 부지런히 글을 읽고 선(善)을 행하도록 하여라. 가화(家禍)가 있다고 해서 상심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지금도 약봉가는 이 말을 요약해 '勿怠爲善(물태위선)'을 가훈으로 쓰고 있다. "착한 일을 하는 데에 게으르지 말라"는 뜻이다.


종가집 위치:경기도 포천시 설운동 1-14번지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고려시대 권문세족은 이천 서씨,인주 이씨,해주 최씨,남양 홍씨가 4대 문벌귀족이다. 조선시대에는 이천서씨에서 분파한 대구 서씨(大丘徐氏) 서성(徐渻 증 영의정) 후손이 3대 정승(서종태(徐宗泰 영의정),서명균(徐命均 좌의정),서지수(徐志修 영의정)),3대 대제학(서유신(徐有臣 대제학),서영보(徐榮輔 대제학),서기순(徐箕淳 대제학))을 최초로 6대 연속과 서명응(徐命膺 대제학),서호수(徐浩修 직제학), 서유구 (徐有榘 대제학) 3대 대학자를 연속 배출하여 조선에서는 서지약봉(徐之藥峰)이요.홍지모당(洪之慕堂) 으로 유명했고, 연리광김(延李光金)와 더불어 대구 서씨,풍산 홍씨,연안 이씨,광산 김씨가 조선 최고 4대 양반 가문으로 꼽힌다. 숙종때 이런 일화가 전한다.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비롯한 서씨 성을 가진 참판급 이상 중신이 30여명 이었다. 어느날 조회를 소집한 숙종이 용상에서 가만히 내려다보니, 오가는 대신들이 대부분 서씨들이라, “마치 어미 쥐가 새끼쥐를 거느리고 다니는 듯 하다!” 라고 말해 주변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숙종의 말씀이었으나,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어미쥐로 빗대 그 아래 웅성거리는 서씨대신들의 융성함을 나타내는 기막힌 표현이였다.대구 서씨달성 서씨라고도 부른다.

이천 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서씨일가연합회 [[1]] [[2]]

가족

시조: 서신일 (徐神逸 아간공. 종1품)

임청각(臨淸閣)

임청각에서 세 명의 정승이 태어난다는 예언이 전해온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임청각에는 정승 두 명이 태어났습니다. 조선조 중엽의 서성 선생(1558년-1631)과 조선조 말엽의 유후조 선생(1798-1876)이 그들입니다. 두 사람 모두 임청각의 외손으로 모친들이 친정에 와서 이들을 출산했던 것입니다. 서성 선생의 어머니(고성 이씨 부인)는 이명 선생의 손녀입니다. 그런데 이 분은 시각장애인었다고 합니다. 서성 선생의 부친은 서해라는 분인데 어려서 부친을 여의어서 숙부가 후견인이 되어 조카의 혼사를 진행했습니다.

소호헌(蘇湖軒)

안동 소호헌(安東 蘇湖軒)은 경상북도 안동시에 있는, 조선 중종 때 문신 서해(徐懈) 선생이 서재로 쓰기 위해 명종(재위 1545∼1567) 때 지은 별당이다. 1968년 12월 19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475호로 지정되었다.

규모는 앞면 4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부속된 방은 지붕 양식이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왼쪽 3칸은 대청, 오른쪽 1칸은 누마루며 앞쪽으로 온돌방 2칸을 붙여 집의 구조가 T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약주(藥酒)

선조 때에 문신 [[서성(조선)|서성][(徐渻)의 집에서 빚은 술이 유명하였다. 그의 호가 약봉(藥峰)이었고, 그가 사는 곳이 약현(藥峴)이어서 좋은 청주를 약주라 하게 되었다는 설이다. 『임원경제지』에서도 “서충숙공이 좋은 청주를 빚었는데 그의 집이 약현에 있었기 때문에 그 집 술을 약산춘이라 한다”고 하였다. 이 약산춘이 약주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고성 이씨 부인은 중종 34년(1539년)에 나서 광해군 7년(1615년)까지 살았던 시각장애인으로, 젊은 나이에 남편을 일찍 여의고도 자식을 훌륭하게 길러 냈으며, 약식약과, 약주, 약포 등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아 가난한 집안을 일으킨 여성 사업가였다.

고성 이씨 부인은 명종 때 청풍군수를 지낸 고성 이씨(固城 李氏) 무금정(無禁亭) 이고(李股)의 무남독녀로 태어나, 함재(涵齋) 서해(徐嶰, 1537~1559)와 결혼하여 약봉(藥峯) 서성(徐渻, 1558~1631) 을 낳았고 사후에는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약식(藥食)

고성 이씨 부인은 중종 34년(1539년)에 나서 광해군 7년(1615년)까지 살았던 시각장애인으로, 젊은 나이에 남편을 일찍 여의고도 자식을 훌륭하게 길러 냈으며, 약식약과, 약주, 약포 등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아 가난한 집안을 일으킨 여성 사업가였다.

고성 이씨 부인은 명종 때 청풍군수를 지낸 고성 이씨(固城 李氏) 무금정(無禁亭) 이고(李股)의 무남독녀로 태어나, 함재(涵齋) 서해(徐嶰, 1537~1559)와 결혼하여 약봉(藥峯) 서성(徐渻, 1558~1631) 을 낳았고 사후에는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약과(藥果)

고성 이씨 부인은 중종 34년(1539년)에 나서 광해군 7년(1615년)까지 살았던 시각장애인으로, 젊은 나이에 남편을 일찍 여의고도 자식을 훌륭하게 길러 냈으며, 약식약과, 약주, 약포 등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아 가난한 집안을 일으킨 여성 사업가였다.

고성 이씨 부인은 명종 때 청풍군수를 지낸 고성 이씨(固城 李氏) 무금정(無禁亭) 이고(李股)의 무남독녀로 태어나, 함재(涵齋) 서해(徐嶰, 1537~1559)와 결혼하여 약봉(藥峯) 서성(徐渻, 1558~1631) 을 낳았고 사후에는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약포(藥脯)

고성 이씨 부인은 중종 34년(1539년)에 나서 광해군 7년(1615년)까지 살았던 시각장애인으로, 젊은 나이에 남편을 일찍 여의고도 자식을 훌륭하게 길러 냈으며, 약식약과, 약주, 약포 등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아 가난한 집안을 일으킨 여성 사업가였다.

고성 이씨 부인은 명종 때 청풍군수를 지낸 고성 이씨(固城 李氏) 무금정(無禁亭) 이고(李股)의 무남독녀로 태어나, 함재(涵齋) 서해(徐嶰, 1537~1559)와 결혼하여 약봉(藥峯) 서성(徐渻, 1558~1631) 을 낳았고 사후에는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이섭대천(利涉大川)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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