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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10월에 열리는 백제문화제 때 이곳에서 삼충제(三忠祭)
 
매년 10월에 열리는 백제문화제 때 이곳에서 삼충제(三忠祭)
  
백제 말의 세 충신인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에게 올리는 제사. 매년 충남 부여와 공주에서 개최되는 백제 문화제 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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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말의 세 충신인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에게 올리는 제사. 매년 충남 부여와 공주에서 개최되는 백제 문화제 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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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5호. 소재지 : 충남(忠南) 부여군(扶餘郡) 부여읍(扶餘邑) 쌍북리(雙北里) 40-1번지. 백제(百濟)의 충신이었던 [[성충]](成忠)ㆍ[[흥수]](興首)ㆍ[[계백]](階伯)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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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충]](成忠)은 백제 [[의자왕]](義慈王: 재위 641∼660) 때 충신으로, 좌평(佐平)으로 있으면서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 애쓰다 옥중에서 단식을 하다 죽었다. 흥수(興首)는 백제 [[의자왕]] 20년(660) 나당연합군이 공격해 오자 탄현을 지키다 대신들의 반대로 지키지 못하고 결국은 멸망하였다. [[계백]](階伯)은 나당연합군이 공격해 오자 결사대 5,000여명을 뽑아 지금의 연산인 황산에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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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지은 이 사당은 1981년 다시 지어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해마다 10월 백제문화재 때 삼충제(三忠祭)를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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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마르이 3충신 [[성충]](成忠)⋅[[흥수]](興首)ㆍ[[계백]](階伯)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으로, 1957년에 건립한 것을 1981년에 대대적으로 개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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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충]](成忠)은 백제 [[의자왕]](義慈王) 때의 충신으로, 왕이 주색(酒色)에 빠져 국운이 위태로워짐을 타이르니 왕이 노하여 그를 옥에 가두었다. [[성충]](成忠)은 옥에 걷혀서도 만약 적이 쳐들어올 경우에 대비하여 그 방책을 글로 써 올렸으나, 의자왕은 귀를 귀울이지 않았고, 드디어는 백제가 망하게 되자 왕은 그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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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수]](興首) 역시 [[의자왕]] 때의 지략가(智略家)였는데, 그를 귀양보냈으며,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이 쳐들어오자 그는 적을 방비하는 지략을 내놓았으나 의자왕이 듣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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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백]](階伯) 장군은 660년([[의자왕]] 20) 나당연합군이 쳐들어올 때 달솔(達率)에서 장군이 되어 기울어져 가는 백제를 구하고자 결사대(決死隊) 5천 명을 뽑아 거느리고 자기의 처자(妻子)들도 손수 죽여 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릴 것을 굳게 맹세하고 황산벌 싸움터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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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결사대는 신라 김유신(金庾信)의 5만여 군사와 네 차례나 싸워 이겼으나, 결국 나이어린 화랑 관창(官昌)의 전사(戰死)에 흥분되어 노도처럼 밀려드는 신라군에게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계백]] 장군은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2022년 9월 20일 (화) 17:14 판

매년 10월에 열리는 백제문화제 때 이곳에서 삼충제(三忠祭)

백제 말의 세 충신인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에게 올리는 제사. 매년 충남 부여와 공주에서 개최되는 백제 문화제 중의 하나이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5호. 소재지 : 충남(忠南) 부여군(扶餘郡) 부여읍(扶餘邑) 쌍북리(雙北里) 40-1번지. 백제(百濟)의 충신이었던 성충(成忠)ㆍ흥수(興首)ㆍ계백(階伯)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성충(成忠)은 백제 의자왕(義慈王: 재위 641∼660) 때 충신으로, 좌평(佐平)으로 있으면서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 애쓰다 옥중에서 단식을 하다 죽었다. 흥수(興首)는 백제 의자왕 20년(660) 나당연합군이 공격해 오자 탄현을 지키다 대신들의 반대로 지키지 못하고 결국은 멸망하였다. 계백(階伯)은 나당연합군이 공격해 오자 결사대 5,000여명을 뽑아 지금의 연산인 황산에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1957년 지은 이 사당은 1981년 다시 지어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해마다 10월 백제문화재 때 삼충제(三忠祭)를 지내고 있다.


백제 마르이 3충신 성충(成忠)⋅흥수(興首)ㆍ계백(階伯)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으로, 1957년에 건립한 것을 1981년에 대대적으로 개축하였다.

성충(成忠)은 백제 의자왕(義慈王) 때의 충신으로, 왕이 주색(酒色)에 빠져 국운이 위태로워짐을 타이르니 왕이 노하여 그를 옥에 가두었다. 성충(成忠)은 옥에 걷혀서도 만약 적이 쳐들어올 경우에 대비하여 그 방책을 글로 써 올렸으나, 의자왕은 귀를 귀울이지 않았고, 드디어는 백제가 망하게 되자 왕은 그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하였다.

흥수(興首) 역시 의자왕 때의 지략가(智略家)였는데, 그를 귀양보냈으며,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이 쳐들어오자 그는 적을 방비하는 지략을 내놓았으나 의자왕이 듣지 않았다.

계백(階伯) 장군은 660년(의자왕 20) 나당연합군이 쳐들어올 때 달솔(達率)에서 장군이 되어 기울어져 가는 백제를 구하고자 결사대(決死隊) 5천 명을 뽑아 거느리고 자기의 처자(妻子)들도 손수 죽여 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릴 것을 굳게 맹세하고 황산벌 싸움터로 나아갔다.

그의 결사대는 신라 김유신(金庾信)의 5만여 군사와 네 차례나 싸워 이겼으나, 결국 나이어린 화랑 관창(官昌)의 전사(戰死)에 흥분되어 노도처럼 밀려드는 신라군에게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계백 장군은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