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복문화제"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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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서귀포 예술인의 활동 지원 확대를 통해 관광여행시장, 중국·일본 등의 생태자원 활용사례, 불로장생 불로초 테마공원 조성 방안 등에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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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연령층과 젊은이들의 서복과 관련된 관심과 이해를 돕기 위해 서복 노래자랑대회, 서복청소년페스티벌 등 다양한 참여와 문화체험부스, 서복기원제 등 서복의 의미를 담은 불로장생 관련 홍보 및 체험관도 마련된다.
 
다양한 연령층과 젊은이들의 서복과 관련된 관심과 이해를 돕기 위해 서복 노래자랑대회, 서복청소년페스티벌 등 다양한 참여와 문화체험부스, 서복기원제 등 서복의 의미를 담은 불로장생 관련 홍보 및 체험관도 마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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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쪽의 서복에 대한 기록은 다양하다. 기원전에 최소 5000명 이상을 선박을 통해 최소 두차례에 걸쳐 이동시켜야 했기 때문에 북쪽인 허베이(河北)성 친황다오(秦皇島)시에서부터 저쟝(浙江)성 닝보(寧波)시까지 해안마을이라면 대부분 서복의 전설이 전래돼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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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복의 고향조차도 현재 다수설인 장수(江蘇)성 롄윈강(連運港)시라는 설 이외에 산둥(山東)성 옌타이(烟台)시도 서복의 고향이라며 그 논쟁에 뛰어든지 오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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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다 서복의 대선단이 출발했다는 항구도 옌타이시의 롱코우(龍口)와 칭다오(淸島)시 랑야타이, 닝보시와 그 인근의 저우산(舟山)시까지 다양하다. 이들 도시들은 저마다 서복과의 연관성을 강조하며 국제서복문화제(롱코우시), 서복해양문화제(롄윈강시), 서복국제동도문화절(저우산) 등의 축제를 통해 저마다 서복과의 인연을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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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중국 유학중이던 1999년 봄 20세기 서복연구의 길을 연 서주사범사대학 뤄치샹(羅其湘)교수를 어렵사리 찾아뵌 적이 있다. 지리학자였던 뤄 교수는 1984년 서복의 동도기록에 대한 고증을 통해 전설이 아닌 실제 역사였음을 밝혔던 분이다. 뤄 교수는 서복이 BC 219~210년까지 약 10년에 걸쳐 총 3차례 동도했다고 확신했다. 사기의 기록을 종합한 두 번의 동도와는 다른 주장이었다. 첫 시도에 실패한 후 진시황에게 폭풍을 만나서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왔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어 두 번째 시도를 한 후 돌아와서는 진시황에게 불로초를 발견했지만 커다란 상어 때문에 가져오지 못했다면서 상어를 제거해야만 한다고 했고, 진시황의 허락을 받고 마지막 세 번째 출항한 후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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뤄 교수의 주장 등을 종합해 보면 서복은 최소 5000명 이상의 대선단을 이끌고 최소 두차례에서 세차례 황해를 건너 불로초를 찾아 나섰다. 진시황 당시 30~40명이 탈 수 있는 선박을 건조했었다는 것은 중국쪽 사료의 일반적인 기록이다. 특히 최대 100명까지 탑승하고 장거리 항해할 수 있는 선박도 건조해야만 했다는 것이 현재의 추론이다. 최근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서복 선단의 규모는 최소 50~200여척으로 이런 대량의 선박을 건조하려면 닝보 등 당시의 선박을 건조했던 모든 연안의 항구도시에 일정량씩의 선박 건조를 할당했을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서복에 대한 전설이 중국내 각 해안도시마다 전승돼 내려왔던 것이 아닌가 추정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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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복의 동도’를 단순히 허구적 상상이라며 전설로 치부하기에는 그 범위가 너무 광범위 하다. 이 서복전설을 통해 역사적 사실을 방증하는 것은 물론 중국과 한국, 특히 제주와의 교류의 모티브로 삼아야 한다

2022년 9월 14일 (수) 20:43 판

서귀포 예술인의 활동 지원 확대를 통해 관광여행시장, 중국·일본 등의 생태자원 활용사례, 불로장생 불로초 테마공원 조성 방안 등에 대한 의견도 나눈다.

다양한 연령층과 젊은이들의 서복과 관련된 관심과 이해를 돕기 위해 서복 노래자랑대회, 서복청소년페스티벌 등 다양한 참여와 문화체험부스, 서복기원제 등 서복의 의미를 담은 불로장생 관련 홍보 및 체험관도 마련된다.


중국쪽의 서복에 대한 기록은 다양하다. 기원전에 최소 5000명 이상을 선박을 통해 최소 두차례에 걸쳐 이동시켜야 했기 때문에 북쪽인 허베이(河北)성 친황다오(秦皇島)시에서부터 저쟝(浙江)성 닝보(寧波)시까지 해안마을이라면 대부분 서복의 전설이 전래돼 온다.

서복의 고향조차도 현재 다수설인 장수(江蘇)성 롄윈강(連運港)시라는 설 이외에 산둥(山東)성 옌타이(烟台)시도 서복의 고향이라며 그 논쟁에 뛰어든지 오래다.

여기에다 서복의 대선단이 출발했다는 항구도 옌타이시의 롱코우(龍口)와 칭다오(淸島)시 랑야타이, 닝보시와 그 인근의 저우산(舟山)시까지 다양하다. 이들 도시들은 저마다 서복과의 연관성을 강조하며 국제서복문화제(롱코우시), 서복해양문화제(롄윈강시), 서복국제동도문화절(저우산) 등의 축제를 통해 저마다 서복과의 인연을 강조하고 있다.

필자는 중국 유학중이던 1999년 봄 20세기 서복연구의 길을 연 서주사범사대학 뤄치샹(羅其湘)교수를 어렵사리 찾아뵌 적이 있다. 지리학자였던 뤄 교수는 1984년 서복의 동도기록에 대한 고증을 통해 전설이 아닌 실제 역사였음을 밝혔던 분이다. 뤄 교수는 서복이 BC 219~210년까지 약 10년에 걸쳐 총 3차례 동도했다고 확신했다. 사기의 기록을 종합한 두 번의 동도와는 다른 주장이었다. 첫 시도에 실패한 후 진시황에게 폭풍을 만나서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왔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어 두 번째 시도를 한 후 돌아와서는 진시황에게 불로초를 발견했지만 커다란 상어 때문에 가져오지 못했다면서 상어를 제거해야만 한다고 했고, 진시황의 허락을 받고 마지막 세 번째 출항한 후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뤄 교수의 주장 등을 종합해 보면 서복은 최소 5000명 이상의 대선단을 이끌고 최소 두차례에서 세차례 황해를 건너 불로초를 찾아 나섰다. 진시황 당시 30~40명이 탈 수 있는 선박을 건조했었다는 것은 중국쪽 사료의 일반적인 기록이다. 특히 최대 100명까지 탑승하고 장거리 항해할 수 있는 선박도 건조해야만 했다는 것이 현재의 추론이다. 최근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서복 선단의 규모는 최소 50~200여척으로 이런 대량의 선박을 건조하려면 닝보 등 당시의 선박을 건조했던 모든 연안의 항구도시에 일정량씩의 선박 건조를 할당했을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서복에 대한 전설이 중국내 각 해안도시마다 전승돼 내려왔던 것이 아닌가 추정해 본다.

‘서복의 동도’를 단순히 허구적 상상이라며 전설로 치부하기에는 그 범위가 너무 광범위 하다. 이 서복전설을 통해 역사적 사실을 방증하는 것은 물론 중국과 한국, 특히 제주와의 교류의 모티브로 삼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