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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제22대 국왕[생몰년: ?∼477(문주왕 3), 재위: 475∼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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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주(文洲)’ 또는 ‘문주(文州)’라고도 한다. 제21대 개로왕(蓋鹵王)의 아들이고, 제23대 [[삼근왕]](三斤王)의 아버지이다.『삼국사기』연표(年表)에 [[문주왕]](文周王)의 재위기간이 3년간, 본기(本紀)에는 4년간으로 되어 있다. 한강유역 일대를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에게 빼앗긴 직후에 즉위하여 웅진(熊津)으로 천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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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로 있을 때 아버지 [[개로왕]]을 보좌하여, 최고관직인 상좌평(上佐平)을 역임하였다. 475년(개로왕 21) 9월 고구려에게 서울 한성(漢城)이 포위되는 위기를 맞자, 동맹국인 신라에 구원을 청하러 파견되었다. 그러나 신라 구원병 1만인을 얻어 돌아왔을 때는 이미 도성(都城)이 함락되고 개로왕은 살해된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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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주왕은 대내외적으로 국난의 상황에서 즉위하였다. 대내적으로 개로왕대의 전제권력 행사로 인해 야기된 지배세력 사이에서 대립과 분열이 끊이지 않았고, 대외적으로 고구려의 한성공격으로 야기된 후유증을 앓고 있었으며, 신라의 성장과 잠재적인 위협 등 어려운 국면을 맞고 있었던 것이다. 백제의 왕도(王都)인 한성은 고구려군의 공격으로 많은 시설이 불타 훼손되었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군이 퇴각하면서 한성에 거주하던 8천명의 백성을 포로로 잡아갔기 때문에 도읍지로서 기능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었다. 게다가 당시 신라는 보은지역에 삼년산성(三年山城)을 축조하여 상주와 소백산맥을 넘어 영동·옥천 등 금강 중·상류지역까지 진출해 중부 내륙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하여 백제를 위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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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10월 피난지인 웅진을 새 도성으로 정하고, 참담한 패전의 수습에 임하였다. 문주왕이 웅진으로 천도한 것은 정치적·군사적·경제적 이해관계를 종합적으로 고려한 것이다. 웅진은 지리적으로 북으로 차령산맥과 금강에 둘러싸여 있고, 동으로는 계룡산이 막고 있어서 고구려와 신라로부터 침략을 방어해주는 천험의 요새지였다. 그리고 475년 문주가 신라에 원병을 청하러 남행하였을 당시 목협만치(木協滿致)와 조미걸취(祖彌桀取) 등과 함께 한성 함락 이후를 대비하여 천도 후보지에 대한 문제를 어느 정도 검토했을 가능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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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진으로 천도하여 새로운 도읍지를 갖췄다고는 하지만 건국 이래의 중심지를 상실한 백제사회는 큰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우선 한강유역에서 온 난민들을 정착시켜야만 했다. 문주왕 2년(476) 2월에는 한성에서 남쪽으로 이주해 온 주민들을 아산의 대두산성(大豆山城) 등에 분산시켜 살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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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본거지를 잃은 왕족 [[부여씨]](扶餘氏)나 해씨(解氏)·진씨(眞氏) 등 [[부여족]] 계통 구귀족들의 지배권력은 남부에 토착하고 있던 사택씨(沙宅氏)·연씨(燕氏) 등 마한계(馬韓系) 세력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또한, [[개로왕]] 때의 왕권강화 및 왕족 위주의 집권체제에 억눌렸던 구귀족들의 반발로, 부여족 계통 구귀족들 내부에 갈등이 심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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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 후에도 계속 실권을 장악하려는 왕족들과 진씨·해씨·목씨(木氏)세력 등 귀족세력들 그리고 새로운 왕도 부근에 세력기반을 갖고 있었던 유력한 재지세력(在地勢力)들이 가세함으로써 정국의 주도권을 놓고 새로운 양상이 전개되었다. 신·구 귀족세력들은 이해관계 여하에 따라 합종연횡(合縱連橫) 모습을 보이면서 왕권과 정국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치열한 권력투쟁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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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담한 패전으로 왕실의 권위가 떨어졌으며, 난립된 귀족 파벌들을 조정해야 하는 상황에서 성품이 우유부단하였다고 하는 그는 정치적 판단을 내리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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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진천도에 협조한 정치세력으로 해구(解仇)로 대표되는 해씨 세력이 있다. 해구는 문주의 왕위 즉위부터 일정한 역할을 해온 것으로 추정된다. 해구가 병관좌평(兵官佐平)에 임명되면서 군사력을 배경으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자 이를 견제하려는 세력과의 불가피한 마찰이 야기되었다. 그 과정에서 해구는 문주왕의 측근세력인 목협만치와 권력 다툼을 벌려 이들을 중앙정계에서 축출한 것으로 보인다. 문주왕은 병관좌평 해구의 권력 독점에 불안을 느꼈다. 그리하여 궁실을 중수하고, 태자를 책봉하며, 일본에 있던 개로왕의 동생 곤지(昆支)를 불러들여 내신좌평(內臣佐平)에 임명하는 등 여러 가지 대책을 세워 왕권을 강화해 나가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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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대책은 왕위계승 상의 분쟁을 미연에 방지하고, 곤지와 권력이 비대해진 해구를 동시에 견제하여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는 정치적 의도로 판단된다. 문주왕과 곤지 그리고 해구 사이의 삼각 구도 속에서 치열한 권력다툼이 일어나 결국 두 달 뒤 내신좌평 곤지가 사망하였고, 이후 문주왕은 실권을 장악한 해구를 더 이상 견제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문주왕은 재위 3년만에 당시 정권을 장악한 병관좌평 해구(解仇)의 자객에 의하여 피살되었다.

2022년 8월 30일 (화) 09:24 판

(文周王)


백제 제22대 국왕[생몰년: ?∼477(문주왕 3), 재위: 475∼477].


‘문주(文洲)’ 또는 ‘문주(文州)’라고도 한다. 제21대 개로왕(蓋鹵王)의 아들이고, 제23대 삼근왕(三斤王)의 아버지이다.『삼국사기』연표(年表)에 문주왕(文周王)의 재위기간이 3년간, 본기(本紀)에는 4년간으로 되어 있다. 한강유역 일대를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에게 빼앗긴 직후에 즉위하여 웅진(熊津)으로 천도하였다.


왕자로 있을 때 아버지 개로왕을 보좌하여, 최고관직인 상좌평(上佐平)을 역임하였다. 475년(개로왕 21) 9월 고구려에게 서울 한성(漢城)이 포위되는 위기를 맞자, 동맹국인 신라에 구원을 청하러 파견되었다. 그러나 신라 구원병 1만인을 얻어 돌아왔을 때는 이미 도성(都城)이 함락되고 개로왕은 살해된 뒤였다.

문주왕은 대내외적으로 국난의 상황에서 즉위하였다. 대내적으로 개로왕대의 전제권력 행사로 인해 야기된 지배세력 사이에서 대립과 분열이 끊이지 않았고, 대외적으로 고구려의 한성공격으로 야기된 후유증을 앓고 있었으며, 신라의 성장과 잠재적인 위협 등 어려운 국면을 맞고 있었던 것이다. 백제의 왕도(王都)인 한성은 고구려군의 공격으로 많은 시설이 불타 훼손되었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군이 퇴각하면서 한성에 거주하던 8천명의 백성을 포로로 잡아갔기 때문에 도읍지로서 기능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었다. 게다가 당시 신라는 보은지역에 삼년산성(三年山城)을 축조하여 상주와 소백산맥을 넘어 영동·옥천 등 금강 중·상류지역까지 진출해 중부 내륙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하여 백제를 위협하고 있었다.

그해 10월 피난지인 웅진을 새 도성으로 정하고, 참담한 패전의 수습에 임하였다. 문주왕이 웅진으로 천도한 것은 정치적·군사적·경제적 이해관계를 종합적으로 고려한 것이다. 웅진은 지리적으로 북으로 차령산맥과 금강에 둘러싸여 있고, 동으로는 계룡산이 막고 있어서 고구려와 신라로부터 침략을 방어해주는 천험의 요새지였다. 그리고 475년 문주가 신라에 원병을 청하러 남행하였을 당시 목협만치(木協滿致)와 조미걸취(祖彌桀取) 등과 함께 한성 함락 이후를 대비하여 천도 후보지에 대한 문제를 어느 정도 검토했을 가능성도 있다.

웅진으로 천도하여 새로운 도읍지를 갖췄다고는 하지만 건국 이래의 중심지를 상실한 백제사회는 큰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우선 한강유역에서 온 난민들을 정착시켜야만 했다. 문주왕 2년(476) 2월에는 한성에서 남쪽으로 이주해 온 주민들을 아산의 대두산성(大豆山城) 등에 분산시켜 살게 하였다.

한편, 본거지를 잃은 왕족 부여씨(扶餘氏)나 해씨(解氏)·진씨(眞氏) 등 부여족 계통 구귀족들의 지배권력은 남부에 토착하고 있던 사택씨(沙宅氏)·연씨(燕氏) 등 마한계(馬韓系) 세력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또한, 개로왕 때의 왕권강화 및 왕족 위주의 집권체제에 억눌렸던 구귀족들의 반발로, 부여족 계통 구귀족들 내부에 갈등이 심화되었다.

천도 후에도 계속 실권을 장악하려는 왕족들과 진씨·해씨·목씨(木氏)세력 등 귀족세력들 그리고 새로운 왕도 부근에 세력기반을 갖고 있었던 유력한 재지세력(在地勢力)들이 가세함으로써 정국의 주도권을 놓고 새로운 양상이 전개되었다. 신·구 귀족세력들은 이해관계 여하에 따라 합종연횡(合縱連橫) 모습을 보이면서 왕권과 정국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치열한 권력투쟁을 벌였다.

참담한 패전으로 왕실의 권위가 떨어졌으며, 난립된 귀족 파벌들을 조정해야 하는 상황에서 성품이 우유부단하였다고 하는 그는 정치적 판단을 내리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웅진천도에 협조한 정치세력으로 해구(解仇)로 대표되는 해씨 세력이 있다. 해구는 문주의 왕위 즉위부터 일정한 역할을 해온 것으로 추정된다. 해구가 병관좌평(兵官佐平)에 임명되면서 군사력을 배경으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자 이를 견제하려는 세력과의 불가피한 마찰이 야기되었다. 그 과정에서 해구는 문주왕의 측근세력인 목협만치와 권력 다툼을 벌려 이들을 중앙정계에서 축출한 것으로 보인다. 문주왕은 병관좌평 해구의 권력 독점에 불안을 느꼈다. 그리하여 궁실을 중수하고, 태자를 책봉하며, 일본에 있던 개로왕의 동생 곤지(昆支)를 불러들여 내신좌평(內臣佐平)에 임명하는 등 여러 가지 대책을 세워 왕권을 강화해 나가고자 하였다.

이러한 대책은 왕위계승 상의 분쟁을 미연에 방지하고, 곤지와 권력이 비대해진 해구를 동시에 견제하여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는 정치적 의도로 판단된다. 문주왕과 곤지 그리고 해구 사이의 삼각 구도 속에서 치열한 권력다툼이 일어나 결국 두 달 뒤 내신좌평 곤지가 사망하였고, 이후 문주왕은 실권을 장악한 해구를 더 이상 견제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문주왕은 재위 3년만에 당시 정권을 장악한 병관좌평 해구(解仇)의 자객에 의하여 피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