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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 지역 부여서씨 입향조 서정수 묘 및 묘표-논산 가야곡 두월리)
(논산 지역 부여서씨 입향조 서정수 묘 및 묘표-논산 가야곡 두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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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명(墓銘)은 조봉대부예산현감서정수지묘영인여주민씨부우(朝奉大夫禮山縣監徐貞壽之墓令人麗州閔氏祔右)라고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서정수(고려1)|서정수]]가 논산에 묘를 쓴 이유와 자손들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서정수가 예산현감(종6품수령)으로 부임하였던 당시 왕의 행차가 있었는데, 금주령이 내렸음에도 몸이 좋지 않아 술에 의지하던 장인을 돕기 위해 술 한 그릇을 올렸다가 은진으로 유배되었다고 합니다.
 
묘명(墓銘)은 조봉대부예산현감서정수지묘영인여주민씨부우(朝奉大夫禮山縣監徐貞壽之墓令人麗州閔氏祔右)라고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서정수(고려1)|서정수]]가 논산에 묘를 쓴 이유와 자손들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서정수가 예산현감(종6품수령)으로 부임하였던 당시 왕의 행차가 있었는데, 금주령이 내렸음에도 몸이 좋지 않아 술에 의지하던 장인을 돕기 위해 술 한 그릇을 올렸다가 은진으로 유배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유배를 당한 서정수는 고향인 부여와 가까운 논산에 부모의 묘를 모시고 자신도 묻히게 되었다고 새겨져 있습니다. 또한 오랜 세월 비, 바람에 풍화되어 글자들이 닳고 보이지 않아 후손들이 [[서열(고려)|서열]] 묘표와 함께 다시 세우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또 가야곡면 삼전리에 서익의 묘소와 묘갈이 있다. 비문은 이재가 짓고 5대손 [[서정덕]]이 써서 1672년(헌종 13)에 건립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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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유배를 당한 서정수는 고향인 부여와 가까운 논산에 부모의 묘를 모시고 자신도 묻히게 되었다고 새겨져 있습니다. 또한 오랜 세월 비, 바람에 풍화되어 글자들이 닳고 보이지 않아 후손들이 [[서열(고려)|서열]] 묘표와 함께 다시 세우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또 가야곡면 삼전리에 [[서익(조선)|서익]]의 묘소와 묘갈이 있다. 비문은 이재가 짓고 5대손 [[서정덕]]이 써서 1672년(헌종 13)에 건립하였습니다. 
  
 
== 부여 서씨(扶餘徐氏) ==
 
== 부여 서씨(扶餘徐氏) ==

2022년 8월 25일 (목) 17:30 판

서정수(徐貞壽) 판내부시사


가족 관계

시조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부총리)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省).종 1품.국무총리)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종 1품.국무총리)

  • 서존(徐存 태원군(太原君). 병부상서(兵曹尙書).장관)
    • 서청습(徐淸習 금오위별장 동정(金吾衛別將同正).판전의시사(判典醫寺事).장관)
      • 서효리(徐孝理 문림랑(文林郞) 태창서승(太倉署丞).좌복야(尙書左僕射).정 2품. 부총리)
        • 서찬(徐贊 백주지사 중현대부(中顯大夫).감문위 대호군(대장군). 종3품 차관).정당문학(政當文學.종 2품 .부총리)

시조는 백제 의자왕의 첫째(혹은 셋째 아들이라고도 함, 아직도 학계의 설이 분분함) 아들 부여융(扶餘隆)이다. 660년(의자왕 20)에 백제가 나당(羅唐) 연합군에 패한 뒤에 멸망되어 의자왕과 태자 등 2,000여명은 당나라에 압송되었다. 당나라 고종은 의자왕에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의 품계를 내리고, 아들 부여융에게 서씨의 성을 하사하여 본국으로 보냈다고 한다. 부여서씨의 문호는 열렸으나, 그 후 세계는 알 수 없었는데 서융(부여융)의 원손으로 이천 서씨(利川徐氏) 아간공 (阿干公) 서신일(徐神逸)의 5세 후손인 고려 때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내고 태원군(太源君)에 봉해진 서존(徐存)을 1세조로 받들고 부여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서존의 11대손은 서수손(徐秀孫)이다.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매년 11월 첫째주 토요일 오전 10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21(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매년 11월 첫째주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이천 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대구달성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명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진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서씨일가연합회 [[1]]

가족

시조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부총리)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省).종 1품.국무총리)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종 1품.국무총리)

  • 큰고고고조할아버지: 서눌(徐訥) 종1품 문하시중門下侍中)
  • 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유걸(徐惟傑)(정2품 좌복야)
    • 큰고고조할아버지: 서정(徐靖) (정2품 평장사.종1품 판삼사사)
    • 고고조할아버지: 서존(徐存) (정3품 병부상서 태원군)
      • 고조할아버지: 서청습(徐淸習 정2품 판전의시사)
        • 증조할아버지: 서효리(徐孝理 정2품 좌복야)
          • 할아버지:서찬(徐贊 종2품 정당문학)
            • 아버지: 서희팔(徐希八 종2품 정당문학)
              • 본인: 서춘(徐椿 정2품 판내부사사)
                • 아들: 서첨(徐詹 예빈사(禮賓寺) 소윤(少尹)
              • 동생: 서능(서릉)(徐稜 종1품 문하시중)
              • 동생: 서박(徐樸 봉례공)
              • 동생: 서적(徐迪남양군)
              • 동생: 서직(徐稷 연성군)
  • 작은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유위(徐惟偉)(정3품 장야서령)
    • 작은고고조할아버지: 서면(徐冕 정4품 주부)
      • 작은고조할아버지: 서린(徐嶙) (정2품 판대부사)
  • 작은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작은고고조할아버지: 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


술 한 잔으로 맺은 인연, 서정수(徐貞壽)

조선시대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의 부여현 성씨조에는 서씨가 부여의 토성으로 기록되어 있고, 고려시대 효자 서공(徐恭)의 일화가 있는 것으로 보아 부여 서씨는 고려시대에 부여현의 유력한 성씨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부여서씨가 육곡리에서는 언제부터 살았던 것일까. 후손들은 백제가 멸망할 때부터 육곡리 일대에 은거했을 것이라고 전하고 있으나, 그들의 구체적인 행적이 보이는 시기는 조선 초기 무렵이다. 처음 논산시 가야곡면 일대로 입향하였다고 전해지는 인물은 조선의 7대왕인 세조 시기 문관을 지냈던 서정수(徐貞壽)이다. 그가 가야곡면과 인연을 맺게 된 사연은 그의 묘비명에 자세히 기록되어 후손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서정수는 세조 때 영의정을 지내던 민효열(여흥민씨)의 딸과 혼인하여 과거 급제 후 예산현감으로 부임하였다. 그때는 마침 나라의 곳곳이 어려워 임금이 친히 금주령까지 내리던 때였다. 그런데 어느 날 세조가 자신의 피부병을 고치기 위해 온양 온천에 오게 되고 서정수의 장인 민효열이 이 행차를 따라나섰다. 당시 민효열은 나이가 많은데다 몸이 노쇠하여 임금의 행차를 따라 보필하기가 무척 어려운 때였다. 가까스로 약간의 술에 의지하며 억지로 길을 재촉했는데 왕이 직접 명령한 금주령 때문에 이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서정수는 장인의 어려운 처지를 못 본 척 할 수 없어 급기야 어두운 밤 몰래 술 한 그릇을 올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 일이 그만 발각되고 말았고, 그는 관직마저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 일로 갖은 고초를 겪은 서정수는 결국 유배를 가게 되고 유배지가 지금의 논산시 은진면과 가야곡면 일대였던 은진 땅이었다. 이렇게 좋지 않은 사연으로 맺은 인연이었지만 서정수는 고향인 부여와 가까웠던 이곳에 자신의 터전을 마련하고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현 가야곡면 두월리에 안장하였다. 또한 자신도 같은 하강마을에 묘를 안장하므로써 본격적으로 부여서씨들이 이곳에 자리를 잡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논산 지역 부여서씨 입향조 서정수 묘 및 묘표-논산 가야곡 두월리

1694년 후손 서경조(徐敬祖)가 세웠습니다.

부여서씨 관련유적으로는 논산시 가야곡면 두월리에 <서정수 묘표>가 있다. 두월리 호남고속도로 옆 동남향에 부여서씨 묘역이 있고, 묘역 안 서열 묘소에서 동쪽으로 서정수 묘소 앞에 묘표가 있습니다.

가야곡면에 처음 입향한 입향조 서정수(徐貞壽)의 묘 앞에 세운 묘표로서 1694년(숙종 20)에 후손인 서경조(徐敬祖)가 세웠습니다.

묘명(墓銘)은 조봉대부예산현감서정수지묘영인여주민씨부우(朝奉大夫禮山縣監徐貞壽之墓令人麗州閔氏祔右)라고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서정수가 논산에 묘를 쓴 이유와 자손들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서정수가 예산현감(종6품수령)으로 부임하였던 당시 왕의 행차가 있었는데, 금주령이 내렸음에도 몸이 좋지 않아 술에 의지하던 장인을 돕기 위해 술 한 그릇을 올렸다가 은진으로 유배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유배를 당한 서정수는 고향인 부여와 가까운 논산에 부모의 묘를 모시고 자신도 묻히게 되었다고 새겨져 있습니다. 또한 오랜 세월 비, 바람에 풍화되어 글자들이 닳고 보이지 않아 후손들이 서열 묘표와 함께 다시 세우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또 가야곡면 삼전리에 서익의 묘소와 묘갈이 있다. 비문은 이재가 짓고 5대손 서정덕이 써서 1672년(헌종 13)에 건립하였습니다. 

부여 서씨(扶餘徐氏)

부여융(서융)을 시조로 하고 서정수를 입향조로 하는 충청남도 논산시 세거 성씨.

부여서씨는 의자왕의 아들 서융(徐隆, 부여융이라고도 함)을 시조로 하고 있다. 서융은 660년(의자왕 22)에 백제가 나당연합군에게 패하여 멸망한 뒤 의자왕과 함께 당나라에 끌려갔다. 당나라 고종은 서융에게 서씨의 성을 하사하여 본국으로 돌려보냈다고 전한다. 이후 세계(世系)는 알 수 없으나, 서융의 원손으로 고려 때 병부상서를 지낸 태원군 서존(徐存)을 1세조로 받들고 부여를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조선 세조 때 예산현감으로 있던 서정수(徐貞壽)가 논산의 은진 지역으로 유배 왔다가 가야곡면 두월리 강청마을에 부친 서열(徐悅)의 묘를 안장하고 살았다. 그 후 자손들이 은진현에 세거하였는데, 은진의 토착 성씨였던 남양홍씨나 장수황씨, 진주강씨 등과 인척으로 연결되면서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였다. 입향 후 지역에 영향력을 가질 정도로 성장하게 된 것은 조선 중·후기에 들어서였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서인(徐益, 1542~1587)이다. 그는 송강 정철, 중봉 조헌, 제봉 고경명 등 저명한 기호 유현들과 깊은 교분이 있었다. 은진현에 취규재(聚奎齋)라는 서재를 열어 후학을 양성하고, 고산(高山)에 대나무 만 그루를 심고 만죽정(萬竹亭, 세심정이라고도 함)을 지어 스스로 호를 만죽헌이라 하였다.


2008년 기준으로 논산시 가야곡면 육곡리에 30여 호가 살고 있다. 부여서씨의 관련유적으로는 논산시 가야곡면 두월리에 서정수 묘표가 있다. 묘표는 높이 120㎝, 너비 61㎝, 두께 27㎝로, 서역조가 글을 짓고 썼다. 또 가야곡면 삼전리에 서익의 묘소와 묘갈이 있다. 묘비는 복련형 이수를 올린 형태로, 비문은 이재가 짓고 5대손 서정덕이 써서 1672년(헌종 13)에 건립하였다. 가야곡면 산노리에 서익을 비롯하여 양응춘, 김문기, 김성휘 등을 모셨던 효암서원이 있다. 1867년(고종 4) 서익이 퇴위되어 6위만 모셨다가 1868년(고종 5)에 서원 철폐령에 의하여 폐철되었고, 1925년 사우를 복원하였다. 논산시 가야곡면 육곡리에 있는 행림서원은 1867년(고종 4) 만죽헌 서익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서원이다. 서익은 산노리의 갈산사에 배향되었다가 행림서원으로 분향되었다.

서정수 묘표徐貞壽墓表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두월리관련항목 보기에 있는 조선 후기 서정수의 묘표. [개설] 서정수 묘표는 논산시 가야곡면의 세거성씨인 부여서씨 중 가야곡면에 처음 입향한 입향조 서정수(徐貞壽)의 묘 앞에 세운 묘표로서, 1694년(숙종 20)에 후손인 서경조(徐敬祖)가 세웠다. 비명은 서정수가 찬(撰)하고 서(書)하였다. [위치] 가야곡면사무소에서 지방도 602호선을 따라 동쪽으로 난 육곡교를 건넌 후 북쪽으로 향하는 지방도 643호선을 타고 다시 약 1.6㎞ 정도를 가면 군계보 다리가 나온다. 이 다리를 건너 동쪽으로 800m 정도 가면 두월리 호남고속도로 옆 구릉 동남향 사면에 부여서씨들의 묘역이 있다. 이 묘역 안에서 서열 묘소에서 동쪽으로 50m가량 떨어진 서정수의 묘소 앞에 있다. [금석문] 묘표는 대리석의 원두 비신으로 되어 있으며, 높이 120㎝, 폭 61㎝, 두께 27㎝로 되어 있다. 묘표의 앞면에는 ‘조봉대부예산현감서정수지묘영인여주민씨부우(朝奉大夫禮山縣監徐貞壽之墓令人麗州閔氏祔右)’이라고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서정수의 성과 이름을 시작으로 논산에 묘를 쓴 이유와 자손들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서정수가 예산현감으로 부임하였던 당시 이곳에 왕의 행차가 있었는데, 금주령이 내렸음에도 몸이 좋지 않아 술에 의지하던 장인을 돕기 위해 술 한 그릇을 올렸다가 은진으로 유배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유배를 당한 서정수는 고향인 부여와 가까운 논산에 부모의 묘를 모시고 자신도 묻히게 되었다고 새겨져 있다. 또한 오랜 세월 비, 바람에 풍화되어 글자들이 닳고 보이지 않아 후손들이 이를 안타깝게 여겨 돈을 모아 서열 묘표와 함께 다시 세우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현황] 서정수 묘표는 부여서씨 종중에서 관리하고 있으나,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각자가 많이 마모되었다. [의의와 평가] 서정수는 부여서씨의 논산 입향조이다. 그의 묘표를 통해 부여서씨들이 논산에 터를 잡고 세거성씨로 집성촌을 이루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