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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새문안교회장로, 서울중앙기독청년회이사 등을 역임한 개신교인. 독립운동가, 교육자.
 
해방 이후 새문안교회장로, 서울중앙기독청년회이사 등을 역임한 개신교인. 독립운동가, 교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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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권문세족은 [[이천 서씨]],인주 이씨,해주 최씨,남양 홍씨가 4대 문벌귀족이다. 조선시대에는 [[이천서씨]]에서 분파한 [[대구 서씨]](大丘徐氏) [[서성(조선)|서성]](徐渻 증 영의정) 후손이 3대 정승([[서종태]](徐宗泰 영의정),[[서명균]](徐命均 좌의정),[[서지수]](徐志修 영의정)),3대 대제학([[서유신]](徐有臣 대제학),[[서영보(조선)|서영보]](徐榮輔 대제학),[[서기순]](徐箕淳 대제학))을 최초로 6대 연속과 [[서명응]](徐命膺 대제학),[[서호수]](徐浩修 직제학), [[서유구]] (徐有榘 대제학) 3대 대학자를 연속 배출하여 조선에서는 서지약봉(徐之藥峰)이요.홍지모당(洪之慕堂) 으로 유명했고, 연리광김(延李光金)와 더불어 [[대구 서씨]],풍산 홍씨,연안 이씨,광산 김씨가 조선 최고 4대 양반 가문으로 꼽힌다. 숙종때 이런 일화가 전한다.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비롯한 [[서씨]] 성을 가진 참판급 이상 중신이 30여명 이었다. 어느날 조회를 소집한 숙종이 용상에서 가만히 내려다보니, 오가는 대신들이 대부분 [[서씨]]들이라, “마치 어미 쥐가 새끼쥐를 거느리고 다니는 듯 하다!” 라고 말해 주변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숙종의 말씀이었으나,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어미쥐로 빗대 그 아래 웅성거리는 [[서씨]]대신들의 융성함을 나타내는 기막힌 표현이였다.[[대구 서씨]]는 [[달성 서씨]]라고도 부른다.
  
  

2022년 8월 15일 (월) 12:48 판

정의

해방 이후 새문안교회장로, 서울중앙기독청년회이사 등을 역임한 개신교인. 독립운동가, 교육자.

고려시대 권문세족은 이천 서씨,인주 이씨,해주 최씨,남양 홍씨가 4대 문벌귀족이다. 조선시대에는 이천서씨에서 분파한 대구 서씨(大丘徐氏) 서성(徐渻 증 영의정) 후손이 3대 정승(서종태(徐宗泰 영의정),서명균(徐命均 좌의정),서지수(徐志修 영의정)),3대 대제학(서유신(徐有臣 대제학),서영보(徐榮輔 대제학),서기순(徐箕淳 대제학))을 최초로 6대 연속과 서명응(徐命膺 대제학),서호수(徐浩修 직제학), 서유구 (徐有榘 대제학) 3대 대학자를 연속 배출하여 조선에서는 서지약봉(徐之藥峰)이요.홍지모당(洪之慕堂) 으로 유명했고, 연리광김(延李光金)와 더불어 대구 서씨,풍산 홍씨,연안 이씨,광산 김씨가 조선 최고 4대 양반 가문으로 꼽힌다. 숙종때 이런 일화가 전한다.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비롯한 서씨 성을 가진 참판급 이상 중신이 30여명 이었다. 어느날 조회를 소집한 숙종이 용상에서 가만히 내려다보니, 오가는 대신들이 대부분 서씨들이라, “마치 어미 쥐가 새끼쥐를 거느리고 다니는 듯 하다!” 라고 말해 주변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숙종의 말씀이었으나,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어미쥐로 빗대 그 아래 웅성거리는 서씨대신들의 융성함을 나타내는 기막힌 표현이였다.대구 서씨달성 서씨라고도 부른다.


대구 서씨 시조 서한 시제는 충남 예산군 대흥면 하탄방리에서 음력 10월1일에 거행된다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공조전서.정3품 .장관)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명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진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서씨일가연합회 [[1]]

내용

호는 송암. 황해도 장연 출신. 개신교 최초의 유아세례 수세자(受洗者). 아버지는 장로교 최초의 7인 목사 중의 한 사람인 서경조(徐景祚)이다.

1905년 경신학교(儆新學校)를 졸업하고 아버지가 설립한 해서제일학교(海西第一學校), 안창호(安昌浩)가 설립한 평양대성학교(大成學校), 모교인 경신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1914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난징(南京)금릉대학(金陵大學)을 다녔다.

1919년 김규식(金奎植)·여운형(呂運亨)·선우 혁(鮮于爀)·신석우(申錫雨)·장덕수(張德秀) 등과 함께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조직하고 당수로 취임하였다.

상하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조직된 뒤 제헌의정원 내무위원으로 활약하면서 국내에 잠입하여 동지의 연락과 독립자금모금에 전력하였다.

또한 교육과 사회사업에도 뜻을 두어 대한적십자회를 창설, 난징·미주·하와이 등지에서 모금한 돈으로 간도 지방 독립운동가 가족들을 도왔다.

1923년 상하이에 남화학원(南華學院)을 설립하고, 1933년 상하이의 인성학교(仁成學校)이사장, 상하이한인기독교청년회이사장, 한교협회이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8·15광복 후 1947년 귀국하여 새문안교회장로, 서울중앙기독청년회이사, 경신학교이사를 지냈고, 1950년 경신학교이사장이 되었다.

6·25전쟁 중 부산에서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 전시대책위원회위원장, 맹인협회·농아협회이사장으로 활약하였고, 환도 후에 기독교학교연합회를 조직하였으며, 1953년 경신학교교장에 취임하였다.

기독교아동복지회재단이사 및 안양기독보육원재단이사 등을 맡아 사회복지분야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1960년 경신학교에서 정년퇴직한 뒤 대한예수교장로회 경기노회 부회장을 지냈다. 1968년 대통령표창을 받았고,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