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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매년 11월  첫째주 토요일 오전 10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21(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매년 11월  첫째주 토요일 오전 10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21(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매년 11월  첫째주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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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매년 11월  첫째주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2022년 2월 12일 (토) 07:44 판

서눌(徐訥)
대표명칭 서눌
한자표기 徐訥
생몰년 ?-1042년(정종 8)
본관 이천(利川)
시호 원숙(元肅)
시대 고려
서희(徐熙)
자녀 원목왕후(元穆王后)



정의

고려 전기의 문신이다.

내용

아버지는 태보 내사령(太保內史令) 서희(徐熙)이다. 고려 제8대 현종의 제6비인 원목왕후(元穆王后)는 그의 딸이다.[1]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매년 11월 첫째주 토요일 오전 10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21(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매년 11월 첫째주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서눌(徐訥)은 성종 15년(996)에 〈과거에서〉 갑과(甲科)로 뽑혔고, 현종(顯宗) 때에 여러 차례 승진하여 상서이부시랑 겸 좌간의대부(尙書吏部侍郞 兼左諫義大夫)가 되었다가, 국자좨주 지이부사(國子祭酒 知吏部事)로 옮겼다. 왕이 서눌의 딸을 맞이하여 왕비로 삼았고, 서눌에게는 중추사 우산기상시(中樞使 右散騎常侍)를 제수했다가 차례를 건너뛰어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 판상서이부사(門下侍郞 同內史門下平章事 判尙書吏部事)로 임명하였다. 덕종(德宗) 초에 검교태사(檢校太師)를 더하였고,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승진하였다. 정종(靖宗) 때에는 판도병마사(判都兵馬使)가 되었다. 왕이 호부낭중(戶部郎中) 유선(庾先)을 거란(契丹)에 보내어 안무(安撫)에 대한 사의를 표하려 하자, 서눌이 아뢰어 이르기를, “지난해에 거란이 압록강 동쪽에 성과 보루를 증축하고서 이제 와서 다시 화친하려고 하니, 유선이 가는 길에 표문을 부쳐 파기할 것을 요청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이 그 말을 좇았다. 〈정종〉 7년(1041)에 〈왕이〉 궤장(几杖)을 하사하였고 중대광(重大匡)을 더하였으며, 이듬해에는 2번 표문을 올려 사직을 간청하였지만 허락하지 않았다. 서눌이 병들어 지장사(地藏寺)에서 머물렀는데, 왕이 우승선(右丞宣) 김정준(金廷俊)을 보내어 문병하였고, 어의(御衣) 2벌, 곡식 1,000석, 말 2필을 사원에 시주하여 복 받기를 빌게 하였다. 병이 위독해지자 친히 문병하고서 제서를 내려 삼중대광 내사령(三重大匡 內史令)으로 올리고, 자손에게는 영업전(永業田)을 하사하였다. 그가 죽자 왕은 애도하고, 간경(簡敬)이란 시호를 내렸으며, 후에 정종의 묘정에 배향하였다. 선종(宣宗) 3년(1086)에 선왕(先王)의 시호를 피하여 원숙(元肅)으로 고쳤다. 애초에 서필(徐弼)의 아버지 서신일(徐神逸)은 시골에 살았는데, 사슴이 도망하여 〈그에게〉 의탁하므로 서신일이 화살을 뽑고 숨겨주었더니, 사냥꾼이 추격해 왔으나 잡지 못하고 돌아갔다. 꿈에 신인이 나타나 감사하며 말하기를, “사슴은 바로 내 아들입니다. 그대 덕분에 죽지 않았으니, 공의 자손으로 하여금 대대로 고관대작이 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서신일은 나이 80에 서필을 낳았고, 서필·서희(徐熙)·서눌이 과연 이어서 재상이 되었다.

가족

  • 부인: 이천군대부인 최씨(利川郡大夫人 崔氏, 생몰년 미상)
    • 딸: 원목왕후 서씨(元穆王后 徐氏)
    • 아들: 서수(徐琇 종1품 문하시중 봉 희양대군)
  • 동생 : 서유걸(徐惟傑)(정2품 좌복야)
    • 조카: 서정(徐靖) (정2품 평장사.종1품 판삼사사)
    • 조카: 서존(徐存) (정3품 병부상서 태원군)
  • 동생 : 서유위(徐惟偉)(정3품 장야서령)
    • 조카: 서린(徐嶙) (종2품 판대부사)
  • 동생 :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조카: 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


서씨일가연합회 [[1]]


이천서씨 대종회 [[2]]

지식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서희 서눌 A는 B의 아버지이다 A ekc:hasDaughter B
서눌 원목왕후 A는 B의 아버지이다 A ekc:hasDaughter B

주석

  1. 오성, "서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 오성, "서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서눌",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