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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불교 사찰의 승탑비문]]

2017년 3월 23일 (목) 22:50 판

자료 수집중

선림원터 홍각선사탑비의 비문글씨(도판 5)는 운철(雲徹)이라는 승려가 왕희지(王羲之, 321∼379년)의 글씨를 집자해 썼다. 그런데 왕희지체가 유행하던 불국시대에 집자된 나 에 비해 글씨 크기도 작고 각법(刻法; 새기는 솜씨)도 졸렬하여 그 품격이 크게 떨어진다. 선종이념을 기반으로 새 사회를 건설하려는 기운이 싹트는 상황에서 보수적인 서체를 그대로 고수하려 하니 이와 같은 노쇠현상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왕조 중기 이래로 왕희지체를 숭상하는 풍조가 크게 일어나면서 이 왕희지체 집자비는 그 품격 여하를 떠나 왕희지체 집자비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탁본의 수난을 겪게 되고 이를 견디다 못한 인근 백성들이 결국 비석을 파괴하여 묻어버렸던 듯하다. 이후 그중 한쪽이 영조 51년(1778)에 발견되어 양양군 관아로 옮겨졌다가 1914년 일제에 의해 경복궁으로 옮겨져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으로 보존되고 있다. [1]

주석

  1. 최완수, "최완수의 우리문화 바로보기 27 - 唐 유학생 출신이 빛낸 신라 塔碑미술", 『신동아』 2001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