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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래의 난이 일어나게된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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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기군은 남진군·북진군으로 나뉘어 거병한 지 열흘만에 별다른 관군의 저항도 받지 않고 가산·곽산·정주·선천·철산 등 청천강 이북 10여 개 지역을 점령하였다. 이것은 특히 각지의 내응세력들의 적극적인 호응 속에서 가능하였다. 즉 이 때의 내응세력은 주로 좌수·별감·풍헌(風憲) 등 향임(鄕任)과 별장(別將)·천총·파총·별무사(別武士) 등 무임(武任) 중의 [[부호]]들이었다. 이들은 [[부농]]이나 [[사상인]]들로 대부분이 [[납전승향|납전승향(納錢陞鄕 : 돈을 주고 향임을 얻게 됨.)]]한 계층이었다.<ref>정석종,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3948 홍경래의 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봉기군은 남진군·북진군으로 나뉘어 거병한 지 열흘만에 별다른 관군의 저항도 받지 않고 가산·곽산·정주·선천·철산 등 청천강 이북 10여 개 지역을 점령하였다. 이것은 특히 각지의 내응세력들의 적극적인 호응 속에서 가능하였다. 즉 이 때의 내응세력은 주로 좌수·별감·풍헌(風憲) 등 향임(鄕任)과 별장(別將)·천총·파총·별무사(別武士) 등 무임(武任) 중의 [[부호]]들이었다. 이들은 [[부농]]이나 [[사상인]]들로 대부분이 [[납전승향|납전승향(納錢陞鄕 : 돈을 주고 향임을 얻게 됨.)]]한 계층이었다.<ref>정석종,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3948 홍경래의 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관군의 반격과 [[홍경래]] 반군이 가지고 있었던 취약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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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군의 반격과 [[홍경래]] 반군의 최후====
그러나 곧 전열을 수습한 관군의 추격을 받은 농민군은 박천·송림·곽산·사송야(四松野) 전투에서의 패배를 계기로 급속히 약화되어 [[정주성]]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농민군의 전세가 이와 같이 급격하게 변화하게 된 것은 농민군은 비록 [[안동 김씨]]의 세도정권으로 대표되는 봉건 지배층에 대한 공동의 이해가 있었다 하여도 지휘부인 [[부농]]·[[상인층]]과 일반 병졸을 구성하는 [[소농민|소농]]·[[빈농]]·[[유민]]·[[임노동자]]층이 가지는 상호 대립적 성격으로 인해 이들 하층민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지 못하였던 것이다.<ref>정석종,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3948 홍경래의 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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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곧 전열을 수습한 관군의 추격을 받은 농민군은 박천·송림·곽산·사송야(四松野) 전투에서의 패배를 계기로 급속히 약화되어 [[정주성]]으로 후퇴하게 되었다.<ref>정석종,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3948 홍경래의 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그러나 일단 [[정주성]]으로 퇴각한 농민군은 고립된 채 수적인 면에서나 군비에 있어 몇 배나 우세한 경군(京軍)·향군(鄕軍)·민병(民兵)의 토벌대와 맞서 거의 4개월간 공방전을 펼쳤다. 하지만 관군의 화약 매설에 의한 성의 폭파로 농민군은 진압되고, 생포자 가운데 남정(男丁) 1,917명과 [[홍경래]] 등 주모자가 모두 처형되었다.<ref>정석종,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3948 홍경래의 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정주성]]에서 결사적인 항전====
 
그러나 일단 [[정주성]]으로 퇴각한 농민군은 고립된 채 수적인 면에서나 군비에 있어 몇 배나 우세한 경군(京軍)·향군(鄕軍)·민병(民兵)의 토벌대와 맞서 거의 4개월간 공방전을 펼쳤다. 이러한 강인한 저항은 곧 주력부대의 구성상의 변화에 기인한 것이었다. 즉 [[정주성]]의 농민군은 이전의 [[급가고용]]이나 소극적 참여자가 아니라 주로 박천·가산 일대의 [[소농민]]들로 구성되었다. 이는 관군의 초토전술에 피해를 입은 이 지역의 대다수 농민들이 [[정주성]]에 퇴각해 적극적으로 저항했으며, 관군의 약탈에 피해를 입은 성밖의 농민들의 협조와 또 지휘부에서도 부민(富民)에 대한 가혹한 징발을 통해 평등한 분배를 제공한 때문이었다. 하지만 관군의 화약 매설에 의한 성의 폭파로 농민군은 진압되고, 생포자 가운데 남정(男丁) 1,917명과 [[홍경래]] 등 주모자가 모두 처형되었다.<ref>정석종,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3948 홍경래의 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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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래의 난]]이 일어나게된 원인===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게된 원인===

2017년 10월 28일 (토) 01:10 판

홍경래의 난(洪景來─亂)
대표명칭 홍경래의 난
한자표기 洪景來─亂
유형 사건
시대 조선시대
날짜 1811년 12월-1812년 4월
관련인물 홍경래 우군칙



정의

1811년(순조 11) 홍경래·우군칙(禹君則) 등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대규모 농민반란.

내용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게된 원인

조선 후기 농업생산기술의 변화와 상품화폐경제 발달로 계층 분화가 이루어지다

조선 후기 봉건사회는 17, 18세기에 이르러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되었다. 토지 겸병이 광범하게 진전되어 지주전호제(地主佃戶制)가 양적으로 팽창되어 갔다. 특히 이앙법(移秧法)·이모작으로 대표되는 농업 생산기술의 변화, 상품화폐경제의 발달로 농민층의 분해가 촉진되었다.[1]

변화되는 계층분화 속에서 소농민들은 더욱 고통을 받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다수의 소농민들은 몰락해 영세빈농·전호(佃戶)가 되었다. 토지에서 유리된 농민들은 유민이 되거나 임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이 시기 농민층 분해는 다수의 소농민들을 중세사회의 특징인 토지에 대한 긴박을 해체시켜 임노동자로 만들면서, 한편으로는 부농·서민지주로 양극 분해시켜 나아갔던 것이다. 상공업은 상품경제의 발달로 인해 부분적으로는 수공업자의 전업화(專業化)가 이루어지고 봉건적인 특권 상인에게 도전하는 사상인(私商人)들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봉건적인 신분 질서의 구조에도 부(富)를 통한 신분 상승의 확대로 양반의 증가와 평민·천민의 감소, 몰락양반의 다수 존재라는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이에 따라 양반 신분의 절대적인 권위도 동요되었다. 특히, 정치적으로 치열했던 17, 18세기의 당쟁이 끝나고 노론에 의한 안동 김씨 척족의 일당 전제가 성립됨으로써 삼정문란은 농민층 분해를 더욱 촉진시켰고, 특권상인지방 사상인간의 대립도 심화되었다.[2]

홍경래의 난 일어나다

홍경래 반란군의 조직에 대해서

이와 같은 사회·경제적 상황에서 이 난은 10여 년 간 준비되었던 조직적 반란이었다. 여기에는 홍경래·우군칙·김사용(金士用)·김창시(金昌始) 등으로 대표되는 몰락양반·유랑지식인들의 『정감록(鄭鑑錄)』 등에 의한 이념 제공이 있었다. 그리고 농민층 분해 과정에서 새로이 성장한 향무 중의 부호, 요호(饒戶)·부민(富民)부농·서민지주층사상인층의 물력(物力) 및 조직력이 결합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역노(驛奴)출신으로 대청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가산의 부호 이희저(李禧著)의 집이 있는 다복동(多福洞)을 거점으로 삼고, 각지의 부호·부상대고(富商大賈)들과 연계를 맺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운산 촛대봉 밑에 광산을 열고 광산노동자·빈농·유민 등을 급가고용(給價雇用)해 봉기군의 주력부대로 삼았다.[3]

홍경래의 군대 거침없이 진격하다

봉기군은 남진군·북진군으로 나뉘어 거병한 지 열흘만에 별다른 관군의 저항도 받지 않고 가산·곽산·정주·선천·철산 등 청천강 이북 10여 개 지역을 점령하였다. 이것은 특히 각지의 내응세력들의 적극적인 호응 속에서 가능하였다. 즉 이 때의 내응세력은 주로 좌수·별감·풍헌(風憲) 등 향임(鄕任)과 별장(別將)·천총·파총·별무사(別武士) 등 무임(武任) 중의 부호들이었다. 이들은 부농이나 사상인들로 대부분이 납전승향(納錢陞鄕 : 돈을 주고 향임을 얻게 됨.)한 계층이었다.[4]

관군의 반격과 홍경래 반군의 최후

그러나 곧 전열을 수습한 관군의 추격을 받은 농민군은 박천·송림·곽산·사송야(四松野) 전투에서의 패배를 계기로 급속히 약화되어 정주성으로 후퇴하게 되었다.[5] 그러나 일단 정주성으로 퇴각한 농민군은 고립된 채 수적인 면에서나 군비에 있어 몇 배나 우세한 경군(京軍)·향군(鄕軍)·민병(民兵)의 토벌대와 맞서 거의 4개월간 공방전을 펼쳤다. 하지만 관군의 화약 매설에 의한 성의 폭파로 농민군은 진압되고, 생포자 가운데 남정(男丁) 1,917명과 홍경래 등 주모자가 모두 처형되었다.[6]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홍경래 홍경래의 난 A는 B를 주도하였다 A edm:isRelatedTo B
몰락양반 홍경래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몰락양반 우군칙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몰락양반 김사용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몰락양반 김창시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몰락양반 홍경래의 난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부호 홍경래의 난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빈농 홍경래의 난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유민 홍경래의 난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광산노동자 홍경래의 난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상인층 홍경래의 난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홍경래의 난 안동 김씨 A는 B와 관련이있다 A edm:isRelatedTo B
홍경래의 난 정주성 A는 B와 관련이있다 A edm:isRelatedTo B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811년 12월-1812년 4월 홍경래가 주도한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다

공간정보

위도 경도 내용
39.695185 125.2142 홍경래의 난은 정주성에서 최후를 맞이하였다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1. 정석종, "홍경래의 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정석종, "홍경래의 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정석종, "홍경래의 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정석종, "홍경래의 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5. 정석종, "홍경래의 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6. 정석종, "홍경래의 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논문
  • 박현모, 「홍경래난을 통해서 본 19세기 조선정치」, 『동양정치사상사』, Vol-4, 2005, 131-148쪽.
  • 권내현, 「홍경래 난' 연구의 쟁점」, 『한국인물사연구』, Vol-11, 2009, 401-425쪽.

유용한 정보

  • 정석종, "홍경래의 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