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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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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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문인들이 부도 옆에 탑비를 세우기를 계획하고 스님의 제자인 만우로 하여금 행장을 짓게 하고 소안이 이를 갖고 가서 왕에게 아뢰었다. 그리하여 왕이 신 근(권근)에게 명하여 비문을 지으라고 하였다. ... (중략) ... 갑술년 3월  에 문인 선사 희진은 비를 세우고 문인인 선사 □□는 글자를 새기다.}}
 
{{Blockquote|문인들이 부도 옆에 탑비를 세우기를 계획하고 스님의 제자인 만우로 하여금 행장을 짓게 하고 소안이 이를 갖고 가서 왕에게 아뢰었다. 그리하여 왕이 신 근(권근)에게 명하여 비문을 지으라고 하였다. ... (중략) ... 갑술년 3월  에 문인 선사 희진은 비를 세우고 문인인 선사 □□는 글자를 새기다.}}
  
비문은 [[권근|손소(孫紹)]]짓고, [[문민|문민(文旻)]]이 새겼으며, 글쓴이는 알 수 없다. 비신이 파괴되어 문헌을 통해서 비문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금석총람|『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에는 결락이 극심하여 후반부분은 거의 마멸 상태이고, [[해동금석원|『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도 [[조선금석총람|『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보다는 덜하지만 역시 결락이 심하여 뜻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이며, [[한국금석전문|『한국금석전문(韓國金石全文)』]]은 거의 완비한 상태로 되어 있다.<ref>이지관</ref> 정간(井間)을 치고 쓴 이 비의 글씨는 [[왕희지|왕희지(王羲之)]]의 [[행서|행서(行書)]]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초서|초서(草書)]]도 간간히 나타나며, 또한 [[결체|결체(結體)]]에 있어서 약간의 무리와 과장이 여실한 [[김생|김생(金生)]]의 독특한 필치를 닮은 글씨들도 섞여 있다. 전반적으로 볼 때 필력이 건경(健勁)하며 아취와 신운(神韻)이 감도는 작품으로, 통일신라시대에 비하여 서예가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음을 보여주는 걸작이다.<ref>[네이버 지식백과] 곡성 태안사 광자대사탑비 [谷城泰安寺廣慈大師塔碑]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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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은 [[권근||권근(權近)]]짓고 글씨는 승려 천택(天澤)이 썼으며, 문인(門人)인 [[희진|희진(希進)]]이 세우고, 각자의 이름은 마멸되어 알 수 없다. 1394년(태조 3) 3월에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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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씨는 북위의 묘지명과 왕희지(王羲之), 그리고 우세남(虞世南) 등의 서풍들을 잘 융합하여 썼는데 필력이 뛰어나고, 결체가 조밀하여 빈틈이 없다. 또한 고박(古朴: 옛 풍미가 있어 질박함)신운(神韻: 신비롭고 고상한 운치)이 함께 어우러진 것으로서, 중국의 어느 명품에도 뒤지지 않을 만한 서격(書格)을 지니고 있다. 또한 전 조선시대에 걸쳐서도 이 비에 필적할 만한 글씨가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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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지식백과]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 [忠州靑龍寺址普覺國師塔碑]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가상현실'''==
 
=='''가상현실'''==

2017년 2월 23일 (목) 02:22 판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
(忠州 靑龍寺址 普覺國師塔碑)
대표명칭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
한자 忠州 靑龍寺址 普覺國師塔碑
이칭 청룡사보각국사정혜원융탑비(靑龍寺普覺國師定慧圓融塔碑)
주소 충북 충주시 소태면 오량리 산32-2번지
문화재 지정번호 보물 제658호
문화재 지정일 1979.05.22
찬자 권근(權近)
서자 천택[1]
각자 미상
승려 혼수(混修)
승탑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

정의

충청북도 충주시 소태면 청룡사지(靑龍寺址)에 있는 고려 말 조선 초의 고승 보각국사 혼수(普覺國師 混修)의 탑비.

탑비

전체높이 265.4cm, 비신높이 232.2cm, 너비 115.5cm, 두께 19.6cm.[2]

비는 1장의 돌로 된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몸돌이 서 있는데, 위로 머릿돌을 따로 얹지 않고, 몸돌 양 귀퉁이를 접듯이 깎아 마무리해 놓았다.[3]

비문

Quote-left.png 문인들이 부도 옆에 탑비를 세우기를 계획하고 스님의 제자인 만우로 하여금 행장을 짓게 하고 소안이 이를 갖고 가서 왕에게 아뢰었다. 그리하여 왕이 신 근(권근)에게 명하여 비문을 지으라고 하였다. ... (중략) ... 갑술년 3월 에 문인 선사 희진은 비를 세우고 문인인 선사 □□는 글자를 새기다. Quote-right.png
출처:


비문은 |권근(權近)이 짓고 글씨는 승려 천택(天澤)이 썼으며, 문인(門人)인 희진(希進)이 세우고, 각자의 이름은 마멸되어 알 수 없다. 1394년(태조 3) 3월에 건립되었다.

글씨는 북위의 묘지명과 왕희지(王羲之), 그리고 우세남(虞世南) 등의 서풍들을 잘 융합하여 썼는데 필력이 뛰어나고, 결체가 조밀하여 빈틈이 없다. 또한 고박(古朴: 옛 풍미가 있어 질박함)과 신운(神韻: 신비롭고 고상한 운치)이 함께 어우러진 것으로서, 중국의 어느 명품에도 뒤지지 않을 만한 서격(書格)을 지니고 있다. 또한 전 조선시대에 걸쳐서도 이 비에 필적할 만한 글씨가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 [네이버 지식백과]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 [忠州靑龍寺址普覺國師塔碑]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가상현실

답사 이후 추가 예정


갤러리

답사 이후 추가 예정


그래프

관련항목

각주

  1.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 (忠州 靑龍寺址 普覺國師塔碑)", 문화재검색, 문화재청.
  2. "청룡사보각국사정혜원융탑비(忠州靑龍寺普覺國師幻庵定慧圓融塔碑)",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 문화재청.
  3.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 (忠州 靑龍寺址 普覺國師塔碑)", 문화재검색,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