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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2일 (목) 15:03 판
고려 목종(高麗 穆宗) | |
대표명칭 | 고려 목종 |
---|---|
한자표기 | 高麗 穆宗 |
생몰년 | 997년-1009년 |
이칭 | 왕송(王訟) |
자 | 효신(孝伸) |
시대 | 고려시대 |
국적 | 고려 |
배우자 | 선정왕후 |
부 | 경종 |
모 | 헌애왕후 |
전임자 | 고려 성종 |
후임자 | 고려 헌종 |
능묘 | 의릉(義陵) |
정의
고려의 7대 왕.
내용
경종이 죽었을 때 목종은 겨우 2세였던 터라, 당숙인 성종이 뒤를 잇고, 성종이 궁중에서 목종을 양육하여 990년(성종 9) 개령군(開寧君)으로 책봉했고, 후사로 지명한 뒤 7년 즉위했다. 그의 나이 19세 때였다. 즉위 첫해 12월에 문무양반 및 군인전시과를 개정하고, 1004년 과거시행법을 정하는 등 자못 왕정체제의 확립을 꾀하였으나, 시종 모후(母后) 천추태후(千秋太后)와 김치양(金致陽) 등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1]
이후 천추태후는 김치양과 간통하여 낳은 아들을 왕으로 삼고자 김치양과 함께 음모를 구몄다. 왕의 후계자인 당숙 대량원군(大良院君)을 승려로 만들어 죽이려고 한 것이다. 이를 간파한 목종은 서경(西京) 도순검사(都巡檢使) 강조(康兆)에게 대량원군의 호위를 명했으나, 강조에 의해 폐위되어 충주(忠州)로 가는 도중에 살해되었다.[2]
목종의 능은 의릉(義陵)이며 현재 위치는 알 수 없으나 개성 동쪽에 위치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3]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고려 목종 | 고려 성종 | A는 B의 친척이다 | A ekc:isAffinalKinOf B |
천추태후 | 고려 목종 | A는 아들 B가 있다 | A ekc:hasSon B |
고려 목종 | 김치양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kc:hasDescendant B |
고려 현종 | 고려 목종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kc:hasDescendant B |
시각자료
주석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