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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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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중기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에 의해 이루어진 혁신불교적인 신앙결사(信仰結社)의 단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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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중기 [[지눌|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에 의해 이루어진 혁신불교적인 신앙결사(信仰結社)의 단체명.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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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 배경===
 
===설립 배경===
고려 중기의 불교계는 현종 이후 교종(敎宗) 계통의 화엄종(華嚴宗)과 법상종(法相宗)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 두 종파는 신앙 면보다는 학파적인 성격이 강한 학문 불교이며, 체제적인 성격이 강한 귀족불교였다. 예종대에 이르러 화엄종과 법상종 외에 선종이 약세 속에서 점차 대두해 귀족사회에 널리 퍼졌다. 중기의 불교는 교종은 학문불교요 체제불교이며, 선종은 은둔불교적인 성격이 강한 것으로 자연히 일반 대중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리고 교종 내의 각 종파 사이에 대립 갈등이 있었으며, 교종과 선종 사이에도 선·교 우열의 교리적인 갈등이 심각하였다. 이러한 불교계의 상황은 무신정변(武臣政變) 이후 고려 후기로 들어서면서 변하였다. 결사운동은 고려 중기부터 개경 중심의 귀족불교가 공허화하여 가는 것에 대한 반발에서 나온 것으로서 불교계를 비판해 불자의 각성을 촉구하려는 강렬한 비판의식이 작용하고 있었다. 이러한 신앙결사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선종에서는 수선사이며, 천태종에서는 백련사(白蓮社)였다. 지눌의 수선사는 무신정변 이후 정치사회적인 변화 속에서 고려 중기 이래의 불교계를 비판 반성하면서 성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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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중기의 불교계는 [[고려 현종|현종]] 이후 교종(敎宗) 계통의 [[화엄종|화엄종(華嚴宗)]][[법상종|법상종(法相宗)]]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 두 종파는 신앙 면보다는 학파적인 성격이 강한 학문 불교이며, 체제적인 성격이 강한 귀족불교였다. [[고려 예종|예종]]대에 이르러 [[화엄종]]과 [[법상종]] 외에 선종(禪宗)이 약세 속에서 점차 대두해 귀족사회에 널리 퍼졌다. 중기의 불교는 교종은 학문불교요 체제불교이며, 선종은 은둔불교적인 성격이 강한 것으로 자연히 일반 대중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리고 교종 내의 각 종파 사이에 대립 갈등이 있었으며, 교종과 선종 사이에도 선·교 우열의 교리적인 갈등이 심각하였다. 이러한 불교계의 상황은 [[무신정변|무신정변(武臣政變)]] 이후 고려 후기로 들어서면서 변하였다. 결사운동은 고려 중기부터 개경 중심의 귀족불교가 공허화하여 가는 것에 대한 반발에서 나온 것으로서 불교계를 비판해 불자의 각성을 촉구하려는 강렬한 비판의식이 작용하고 있었다. 이러한 신앙결사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선종에서는 [[수선사]]이며, [[천태종]]에서는 [[백련사|백련사(白蓮社)]]였다. 지눌의 수선사는 무신정변 이후 정치사회적인 변화 속에서 고려 중기 이래의 불교계를 비판 반성하면서 성립되었다.<ref>신안식,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1457 수선사]", </ref>
  
 
===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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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0년(명종 20)에 공산(公山:지금의 팔공산) 거조사(居祖社)에서 결성되었다. 초명은 정혜사(定慧社)이며 뒤에 송광사(松廣寺)로 개칭되었다. 결사 초기에는 당시 집권세력인 무신들과 직접적인 관계를 갖지 않았으나 제2세 진각국사 혜심(慧諶) 때에 이르러 왕실과 무신 귀족, 유학자 관료 등이 입사함으로써 중앙의 정치세력과 연결되었다. 이에 따라 교단은 크게 발전하였고 제3세 몽여(夢如), 제4세 혼원(混元), 제5세 천영(天英) 국사를 거치면서 중앙세력과 더욱 밀착되어갔다. 이후 무신정권이 붕괴되고 원나라의 간섭을 받게 되면서 새로이 권문세족으로 등장한 재추(宰樞)들이 후원세력의 중심이 되었다.<ref>두산백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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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0년(명종 20)에 공산(公山:지금의 팔공산) [[영천 거조사|거조사(居祖社)]]에서 결성되었다. 초명은 정혜사(定慧社)이며 뒤에 송광사(松廣寺)로 개칭되었다. 결사 초기에는 당시 집권세력인 무신들과 직접적인 관계를 갖지 않았으나 제2세 진각국사 [[혜심|혜심(慧諶)]] 때에 이르러 왕실과 무신 귀족, 유학자 관료 등이 입사함으로써 중앙의 정치세력과 연결되었다. 이에 따라 교단은 크게 발전하였고 제3세 [[몽여|몽여(夢如)]], 제4세 [[혼원|혼원(混元)]], 제5세 [[천영|천영(天英)]] 국사를 거치면서 중앙세력과 더욱 밀착되어갔다. 이후 무신정권이 붕괴되고 원나라의 간섭을 받게 되면서 새로이 권문세족으로 등장한 재추(宰樞)들이 후원세력의 중심이 되었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78690&cid=40942&categoryId=31543 수선사]", 두산백과</ref>
  
 
===기능과 역할===
 
===기능과 역할===
지눌의 수선사 결사는 정혜쌍수(定慧雙修), 즉 불교 수행의 핵심을 이루는 정(定)과 혜(慧)를 함께 닦자는 실천운동이며 여기에 화엄사상을 도입하여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을 세워 화엄과 선이 근본에 있어서는 둘이 아니라는 것을 밝혔다. 이러한 기초 위에서 대혜종고의 간화선(看話禪)을 받아들여 전통적인 선사상을 펼쳐나감으로써 수선사의 지눌사상은 선교일치(禪敎一致)의 완성된 철학세계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수선사의 성립은 선교일치의 완성과 간화선의 선양이라는 불교사상적인 의미 외에 실천불교로서의 임무를 이루었다는 의미를 함께 지닌다. 수선사는 고려 말에 이르기까지 모두 16국사를 배출하며 동방 제일의 도량으로서 위치를 확고히 하였으며 고려 후기 불교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ref> (두산백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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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눌]]의 수선사 결사는 [[정혜쌍수(定慧雙修)]], 즉 불교 수행의 핵심을 이루는 정(定)과 혜(慧)를 함께 닦자는 실천운동이며 여기에 화엄사상을 도입하여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을 세워 화엄과 선이 근본에 있어서는 둘이 아니라는 것을 밝혔다. 이러한 기초 위에서 대혜종고의 [[간화선|간화선(看話禪)]]을 받아들여 전통적인 선사상을 펼쳐나감으로써 수선사의 지눌사상은 선교일치(禪敎一致)의 완성된 철학세계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수선사의 성립은 선교일치의 완성과 [[간화선]]의 선양이라는 불교사상적인 의미 외에 실천불교로서의 임무를 이루었다는 의미를 함께 지닌다. 수선사는 고려 말에 이르기까지 모두 16국사를 배출하며 동방 제일의 도량으로서 위치를 확고히 하였으며 고려 후기 불교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78690&cid=40942&categoryId=31543 수선사]", 두산백과</ref>
  
 
=='''지식관계망'''==
 
=='''지식관계망'''==

2017년 10월 6일 (금) 11:24 판

수선사(修禪社)
대표명칭 수선사
한자표기 修禪社
영문명칭 Suseonsa
유형 단체
창립자 지눌
창립일 1190년



정의

고려 중기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에 의해 이루어진 혁신불교적인 신앙결사(信仰結社)의 단체명.

내용

설립 배경

고려 중기의 불교계는 현종 이후 교종(敎宗) 계통의 화엄종(華嚴宗)법상종(法相宗)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 두 종파는 신앙 면보다는 학파적인 성격이 강한 학문 불교이며, 체제적인 성격이 강한 귀족불교였다. 예종대에 이르러 화엄종법상종 외에 선종(禪宗)이 약세 속에서 점차 대두해 귀족사회에 널리 퍼졌다. 중기의 불교는 교종은 학문불교요 체제불교이며, 선종은 은둔불교적인 성격이 강한 것으로 자연히 일반 대중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리고 교종 내의 각 종파 사이에 대립 갈등이 있었으며, 교종과 선종 사이에도 선·교 우열의 교리적인 갈등이 심각하였다. 이러한 불교계의 상황은 무신정변(武臣政變) 이후 고려 후기로 들어서면서 변하였다. 결사운동은 고려 중기부터 개경 중심의 귀족불교가 공허화하여 가는 것에 대한 반발에서 나온 것으로서 불교계를 비판해 불자의 각성을 촉구하려는 강렬한 비판의식이 작용하고 있었다. 이러한 신앙결사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선종에서는 수선사이며, 천태종에서는 백련사(白蓮社)였다. 지눌의 수선사는 무신정변 이후 정치사회적인 변화 속에서 고려 중기 이래의 불교계를 비판 반성하면서 성립되었다.[1]

변천

1190년(명종 20)에 공산(公山:지금의 팔공산) 거조사(居祖社)에서 결성되었다. 초명은 정혜사(定慧社)이며 뒤에 송광사(松廣寺)로 개칭되었다. 결사 초기에는 당시 집권세력인 무신들과 직접적인 관계를 갖지 않았으나 제2세 진각국사 혜심(慧諶) 때에 이르러 왕실과 무신 귀족, 유학자 관료 등이 입사함으로써 중앙의 정치세력과 연결되었다. 이에 따라 교단은 크게 발전하였고 제3세 몽여(夢如), 제4세 혼원(混元), 제5세 천영(天英) 국사를 거치면서 중앙세력과 더욱 밀착되어갔다. 이후 무신정권이 붕괴되고 원나라의 간섭을 받게 되면서 새로이 권문세족으로 등장한 재추(宰樞)들이 후원세력의 중심이 되었다.[2]

기능과 역할

지눌의 수선사 결사는 정혜쌍수(定慧雙修), 즉 불교 수행의 핵심을 이루는 정(定)과 혜(慧)를 함께 닦자는 실천운동이며 여기에 화엄사상을 도입하여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을 세워 화엄과 선이 근본에 있어서는 둘이 아니라는 것을 밝혔다. 이러한 기초 위에서 대혜종고의 간화선(看話禪)을 받아들여 전통적인 선사상을 펼쳐나감으로써 수선사의 지눌사상은 선교일치(禪敎一致)의 완성된 철학세계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수선사의 성립은 선교일치의 완성과 간화선의 선양이라는 불교사상적인 의미 외에 실천불교로서의 임무를 이루었다는 의미를 함께 지닌다. 수선사는 고려 말에 이르기까지 모두 16국사를 배출하며 동방 제일의 도량으로서 위치를 확고히 하였으며 고려 후기 불교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3]

지식관계망

"그래프 삽입"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1. 신안식, "수선사",
  2. "수선사", 두산백과
  3. "수선사", 두산백과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