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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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선은 15세에 출가하여 월유산 [[구례 화엄사|화엄사(華嚴寺)]]에서 승려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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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 도갑사 도선국사·수미선사비문(靈巖 道岬寺 道詵國師·守眉禪師碑文)'에 따르면, 도선은 월남사로 출가하여 불경과 패엽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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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月南寺로 가서 佛經(貝葉)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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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이지관, "영암 도갑사 도선 수미 양대사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4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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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계산 옥룡사 증시 선각국사비명(白鷄山 玉龍寺 贈諡 先覺國師 碑銘)'에 따르면, 도선은 15세에 출가하여 월유산 [[구례 화엄사|화엄사(華嚴寺)]]에서 승려가 되었다.<ref>배종호,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5705 도선]",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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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서 희희(嬉戱)하거나, 우는 때에도 그의 뜻은 부처님을 경외함이 두터웠다. 그리하여 부모가 그는 반드시 불법을 담을 만한 그릇임을 알고, 마음으로 출가를 허락하기로 하였다. 15살이 되었을 때, 이미 영오(穎悟)하고 숙성할 뿐 아니라, 기술과 예술에까지 겸비하였다. 드디어 머리를 깎고 월유산 화엄사에 나아가서 大經을 독습하여 1년도 채 되지 않아 이미 大義를 통달하였다.
 
|려서 희희(嬉戱)하거나, 우는 때에도 그의 뜻은 부처님을 경외함이 두터웠다. 그리하여 부모가 그는 반드시 불법을 담을 만한 그릇임을 알고, 마음으로 출가를 허락하기로 하였다. 15살이 되었을 때, 이미 영오(穎悟)하고 숙성할 뿐 아니라, 기술과 예술에까지 겸비하였다. 드디어 머리를 깎고 월유산 화엄사에 나아가서 大經을 독습하여 1년도 채 되지 않아 이미 大義를 통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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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유명한 사찰을 다니면서 수행하다가, 846년(문성왕 8) 곡성 동리산(桐裏山)의 혜철(惠徹)을 찾아가 ‘무설설(無說說) 무법법(無法法)’의 법문을 듣고 오묘한 이치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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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선은 20세가 되던 846년([[신라 문성왕|문성왕]] 8)에 교법을 떠나 스스로 선정 수행을 하려 하였는데, 마침 [[혜철|혜철]]이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 현재의 전라남도 곡성군 동리산 [[곡성 태안사|대안사(大安寺)]]에서 가르침을 편다는 이야기를 듣고 [[혜철]]문하에 가서 수학하였다. 23세가 되던 849년([[신라 문성왕|문성왕]] 11)에는 [[혜철]]로 부터 [[구족계|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ref>최연식, "[http://yeongam.grandculture.net/Contents?local=yeongam&dataType=01&contents_id=GC04400988 도선]", <html><online style="color:purple">『디지털영암문화대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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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왕 8년 20살 때에 이르러 홀연히 스스로 생각한 나머지 말하기를, "대장부가 마땅히 교법을 여의고 스스로 靜慮하여야 할 것이어늘 어찌 능히 움직이지 않고 올올(兀兀)하게 문자에만 고수하고 있겠는가." 이때 혜철대사가 密印을 서당지장(西堂智藏) 禪師로부터 전해받고, 귀국하여 전라남도 곡성군 동리산 대안사에서 開堂하여 연설하고 있었으므로 법을 구하는 자가 구름처럼 모여 들었다. 스님도 선문에 구의(摳衣)하여 제자가 되려고 청하였다. 혜철대사가 그의 총명함을 가상하게 여겨 알뜰히 지도하였다. 무릇 이른바 말이 없는 말과 法이 없는 法을허중(虛中)에서 주고 받아 확연히 크게 깨달았다. 23살 때 혜철대사로부터 구족계를 받았다. 이미 一乘了義를 통달하고, 參學하여 일정한 곳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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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이지관, "광양 옥룡사 선각국사 증성혜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433-4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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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2일 (토) 18:38 판

도선(道詵)
대표명칭 도선
영문명칭 Doseon
한자 道詵
생몰년 827(흥덕왕 2)-898(효공왕 2)
시호 요공선사(了空禪師), 선각국사(先覺國師)
연기(烟起)
도선(道詵)
탑호 징성혜등(澄聖慧燈)
옥룡자(玉龍子), 옥룡(玉龍)
성씨 김씨(金氏), 최씨(崔氏)
출신지 영암(靈巖)
승탑비 영암 도갑사 도선국사 수미선사비



정의

신라 말기의 승려

내용

도선과 두 개의 비문

도선과 관련된 비문은 두 가지가 전해져오고 있다.

  • 영암 도갑사 도선국사ㆍ수미선사비(靈巖 道岬寺 道詵國師ㆍ守眉禪師碑) - 1653년 건립, 비 현존.
  • 백계산 옥룡사 증시 선각국사 비명(白鷄山 玉龍寺 贈諡 先覺國師 碑銘) - 1173년 건립, 비는 현존하지 않음, 『동문선(東文選)』을 통해 확인 가능.

가계와 탄생

도선(道詵)은 827년 전라남도 영암에서 태어났다. 집안의 내력은 기록이 남아 있지 않으나 태종 무열왕의 서얼손(庶孼孫)이라는 전승으로 보아 진골 귀족 출신일 가능성이 크다.[1]

Quote-left.png 스님의 휘는 도선(道詵)이요, 속성은 김씨이며, 신라국 영암 출신이다. 그의 세계에 있어서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史事는 유실하였다. 혹자는 이르기를 태종대왕의 서얼손 이라고도 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광양 옥룡사 선각국사 증성혜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432쪽.


탄생설화

'영암 도갑사 도선국사·수미선사비문(靈巖 道岬寺 道詵國師·守眉禪師碑文)'에 따르면, 도선의 어머니는 최씨(崔氏)로 강가에 떠내려오는 오이를 먹고 임신하였다고 한다.

Quote-left.png 어머니는 崔氏니 ...(중략)... 어머니가 겨울철 강가에서 빨래를 하다가 떠내려오는 오이를 건져 먹고 임신하여 俊秀한 아들을 낳았으니, 마치 后稷의 어머니 姜嫄이 巨人의 발자취를 밟고 感心하여 임신한 후 태어난 것과 같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영암 도갑사 도선 수미 양대사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421-422쪽.


'백계산 옥룡사 증시 선각국사비명(白鷄山 玉龍寺 贈諡 先覺國師 碑銘)'에 따르면, 도선의 어머니는 강씨(姜氏)로, 꿈에 어떤 사람이 광채나는 구슬 한 개를 주면서 삼키라고 하였는데 그 후 태기가 있었고, 만삭이 되도록 오직 독경과 염불에만 뜻을 두었다고 한다.[2]

Quote-left.png 어머니는 姜氏니, 어느 날 밤 꿈에 어떤 사람이 明珠 한 개를 건네 주면서 삼키라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임신하여 만삭이 되도록 오신채(五辛菜)와 누린내 나는 육류(肉類)는 일체 먹지 아니하고 오직 독경과 염불로써 佛事에 지극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광양 옥룡사 선각국사 증성혜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432쪽.


출가수행

'영암 도갑사 도선국사·수미선사비문(靈巖 道岬寺 道詵國師·守眉禪師碑文)'에 따르면, 도선은 월남사로 출가하여 불경과 패엽을 배웠다.

Quote-left.png 일찍이 月南寺로 가서 佛經(貝葉)을 배웠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영암 도갑사 도선 수미 양대사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423쪽.


'백계산 옥룡사 증시 선각국사비명(白鷄山 玉龍寺 贈諡 先覺國師 碑銘)'에 따르면, 도선은 15세에 출가하여 월유산 화엄사(華嚴寺)에서 승려가 되었다.[3]

Quote-left.png 려서 희희(嬉戱)하거나, 우는 때에도 그의 뜻은 부처님을 경외함이 두터웠다. 그리하여 부모가 그는 반드시 불법을 담을 만한 그릇임을 알고, 마음으로 출가를 허락하기로 하였다. 15살이 되었을 때, 이미 영오(穎悟)하고 숙성할 뿐 아니라, 기술과 예술에까지 겸비하였다. 드디어 머리를 깎고 월유산 화엄사에 나아가서 大經을 독습하여 1년도 채 되지 않아 이미 大義를 통달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광양 옥룡사 선각국사 증성혜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432-433쪽.


도선은 20세가 되던 846년(문성왕 8)에 교법을 떠나 스스로 선정 수행을 하려 하였는데, 마침 혜철이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 현재의 전라남도 곡성군 동리산 대안사(大安寺)에서 가르침을 편다는 이야기를 듣고 혜철의 문하에 가서 수학하였다. 23세가 되던 849년(문성왕 11)에는 혜철로 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4]

Quote-left.png 문성왕 8년 20살 때에 이르러 홀연히 스스로 생각한 나머지 말하기를, "대장부가 마땅히 교법을 여의고 스스로 靜慮하여야 할 것이어늘 어찌 능히 움직이지 않고 올올(兀兀)하게 문자에만 고수하고 있겠는가." 이때 혜철대사가 密印을 서당지장(西堂智藏) 禪師로부터 전해받고, 귀국하여 전라남도 곡성군 동리산 대안사에서 開堂하여 연설하고 있었으므로 법을 구하는 자가 구름처럼 모여 들었다. 스님도 선문에 구의(摳衣)하여 제자가 되려고 청하였다. 혜철대사가 그의 총명함을 가상하게 여겨 알뜰히 지도하였다. 무릇 이른바 말이 없는 말과 法이 없는 法을허중(虛中)에서 주고 받아 확연히 크게 깨달았다. 23살 때 혜철대사로부터 구족계를 받았다. 이미 一乘了義를 통달하고, 參學하여 일정한 곳이 없었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광양 옥룡사 선각국사 증성혜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433-434쪽.


활동

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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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시각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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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홍기승, "도선", 『디지털도봉구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이영숙, 「영암 도갑사 도선·수미비의 조성배경에 대한 고찰」, 『문화사학』32, 한국문화사학회, 2009, 178쪽.
  3. 배종호, "도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최연식, "도선", 『디지털영암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 이지관, "영암 도갑사 도선 수미 양대사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400-455쪽.
  • 이지관, "광양 옥룡사 선각국사 증성혜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422-448쪽.
  • "도갑사도선수미양대사비", 금석문 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소.
  • "옥룡사선각국사비", 금석문 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소.
  • 배종호, "도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도선",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홍기승, "도선", 『디지털도봉구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최연식, "도선", 『디지털영암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