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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희(徐熙)의 아버지는 내의령(內議令)을 지낸 [[서필|서필(徐弼)]]이다. 할아버지인 [[서신일|서신일(徐神逸)]] 때까지는 이천 지방에 토착한 호족으로 보인다. 아들로는 [[서눌|서눌(徐訥)]]·[[서유걸|서유걸(徐惟傑)]]이 있으며, [[서눌|서눌]]의 딸은 [[고려 현종|현종(顯宗)]]의 비가 되어 외척가문의 하나로 등장하게 되었다.<ref>박용운,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8321 서희]",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서희(徐熙)의 아버지는 내의령(內議令)을 지낸 [[서필|서필(徐弼)]]이다. 할아버지인 [[서신일|서신일(徐神逸)]] 때까지는 이천 지방에 토착한 호족으로 보인다. 아들로는 [[서눌|서눌(徐訥)]]·[[서유걸|서유걸(徐惟傑)]]이 있으며, [[서눌|서눌]]의 딸은 [[고려 현종|현종(顯宗)]]의 비가 되어 외척가문의 하나로 등장하게 되었다.<ref>박용운,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8321 서희]",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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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0년([[고려 광종|광종]] 11)에 과거에 급제, 광평원외랑(廣評員外郞)을 거쳐 내의시랑(內議侍郞)이 되었다. 972년([[고려 광종|광종]] 23)에 사신으로 송나라에 다녀왔으며 [[고려 성종|성종]] 때는 근정의 책임을 맡은 병관어사(兵官御事)가 되고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를 거쳐 태보(太保)·내사령(內史令)까지에 이르렀다. 993년([[고려 성종|성종]] 12) 거란이 남침하자 중군사(中軍使)로 북계에 나가 적과 대진했는데, 이때 일부 중신들은 서경 이북의 땅을 거란에게 주어 화평하자고 주장했으나, 서희는 이를 반대하고 스스로 거란 진영에 가서 적장 [[소손녕|소손녕(蕭遜寧)]]과 담판해 거란군을 퇴각하게 할 뿐 아니라, 압록강 이남의 장흥(長興)·귀화(歸化) 2진(鎭)과 곽주(郭州)·귀주(龜州)에 성을 쌓았으며, 다음해 안의(安義)·흥화(興化) 2진(鎭), 또 이듬해에 선주(宣州)·맹주(孟州) 2주에 성을 쌓았다. 996년([[고려 성종|성종]] 15) 병이 나 998년에 57세의 나이로 죽었다.<ref>한국사사전편찬회, 『한국고중세사사전』, 가람기획, 2007.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18524&cid=42957&categoryId=42957 서희]", 한국고중세사사전,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지식관계망'''==
 
=='''지식관계망'''==

2017년 9월 1일 (금) 23:26 판

서희(徐熙)
대표명칭 서희
한자표기 徐熙
생몰년 942년(태조 25)-998(목종 1)
본관 이천(利川)
시호 장위(章威)
염윤(廉允)
시대 고려



정의

고려 전기의 정치가 및 외교가.

내용

서희(徐熙)의 아버지는 내의령(內議令)을 지낸 서필(徐弼)이다. 할아버지인 서신일(徐神逸) 때까지는 이천 지방에 토착한 호족으로 보인다. 아들로는 서눌(徐訥)·서유걸(徐惟傑)이 있으며, 서눌의 딸은 현종(顯宗)의 비가 되어 외척가문의 하나로 등장하게 되었다.[1]

960년(광종 11)에 과거에 급제, 광평원외랑(廣評員外郞)을 거쳐 내의시랑(內議侍郞)이 되었다. 972년(광종 23)에 사신으로 송나라에 다녀왔으며 성종 때는 근정의 책임을 맡은 병관어사(兵官御事)가 되고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를 거쳐 태보(太保)·내사령(內史令)까지에 이르렀다. 993년(성종 12) 거란이 남침하자 중군사(中軍使)로 북계에 나가 적과 대진했는데, 이때 일부 중신들은 서경 이북의 땅을 거란에게 주어 화평하자고 주장했으나, 서희는 이를 반대하고 스스로 거란 진영에 가서 적장 소손녕(蕭遜寧)과 담판해 거란군을 퇴각하게 할 뿐 아니라, 압록강 이남의 장흥(長興)·귀화(歸化) 2진(鎭)과 곽주(郭州)·귀주(龜州)에 성을 쌓았으며, 다음해 안의(安義)·흥화(興化) 2진(鎭), 또 이듬해에 선주(宣州)·맹주(孟州) 2주에 성을 쌓았다. 996년(성종 15) 병이 나 998년에 57세의 나이로 죽었다.[2]

지식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1. 박용운, "서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한국사사전편찬회, 『한국고중세사사전』, 가람기획, 2007. 온라인 참조: "서희", 한국고중세사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