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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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헌은 9세에 출가하려 하였으나 어머니가 허락하지 않으므로 몰래 [[영주 부석사|부석사(浮石寺)]]로 가서 [[범체|범체대덕(梵體大德)]]의 제자가 되었다. 어느 날 어머니의 병보를 듣고 집으로 돌아가자 어머니의 병은 저절로 나았으나 그가 중병에 걸렸다. 어머니가 부처에게 자식의 병을 낫게 해주면 곧 출가를 시키겠다고 맹세하자 병이 나았다.<ref>조용길,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4256 지선]",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도헌은 9세에 출가하려 하였으나 어머니가 허락하지 않으므로 몰래 [[영주 부석사|부석사(浮石寺)]]로 가서 [[범휴|범휴대덕(梵休大德)]]의 제자가 되었다. 어느 날 어머니의 병보를 듣고 집으로 돌아가자 어머니의 병은 저절로 나았으나 그가 중병에 걸렸다. 어머니가 부처에게 자식의 병을 낫게 해주면 곧 출가를 시키겠다고 맹세하자 병이 나았다.<ref>조용길,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4256 지선]",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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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너무 슬퍼하여 거의 훼멸하였다. 추복승이 이를 가련히 여기고 논하여 말하기를, “덧없는 몸은 사라지기 쉬우나 장한 뜻은 이루기 어렵다. 옛날에 부처님께서 은혜를 갚으심에 큰 방편이 있었으니 그대는 이를 힘쓰라”고 하였다. 그로 인하여 느끼고 깨달아 울음을 거두고는 어머니께 불도에 돌아갈 것을 청하였다. 어머니는 그의 어린 것을 가엾게 여기고, 다시금 집안을 보전할 주인이 없음을 염려하여 굳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사는 부처님께서 출가하신 고사를 듣고 곧 도망해 가서 부석산에 나아가 배웠다. 문득 하루는 마음이 놀라 자리를 여러 번 옮겼는데, 잠시 뒤에 어머니가 그를 기다리다가 병이 났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급히 고향으로 돌아가 뵈오니 병도 뒤따라 나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를 완효서에 견주었다. 얼마 있지 않아서 대사에게 痼疾이 전염되어 의원에게 보여도 효험이 없었다. 여러 사람에게 점을 쳤더니 모두 말하기를, “마땅히 부처에게 이름을 예속시켜야 할 것이다”고 하였다. 어머니가 그전의 꿈을 돌이켜 생각해 보고는 조심스럽게 네모진 가사를 몸에 덮고 울면서 맹세하기를, “이 병에서 만약 일어나게 된다면 부처님께 아들로 삼아 달라고 빌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틀 밤을 자고 난 뒤에 과연 완쾌되었다. 우러러 어머니의 염려하심을 깨닫고, 마침내 평소에 품었던 뜻을 이루어, 제 자식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식을 부처에게 선뜻 내주도록 하고, 불도를 미덥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로 하여금 의심을 풀게 하였으니, 효성으로 신인을 감동시킨 것의 기이함이 셋째이다.
 
|아홉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너무 슬퍼하여 거의 훼멸하였다. 추복승이 이를 가련히 여기고 논하여 말하기를, “덧없는 몸은 사라지기 쉬우나 장한 뜻은 이루기 어렵다. 옛날에 부처님께서 은혜를 갚으심에 큰 방편이 있었으니 그대는 이를 힘쓰라”고 하였다. 그로 인하여 느끼고 깨달아 울음을 거두고는 어머니께 불도에 돌아갈 것을 청하였다. 어머니는 그의 어린 것을 가엾게 여기고, 다시금 집안을 보전할 주인이 없음을 염려하여 굳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사는 부처님께서 출가하신 고사를 듣고 곧 도망해 가서 부석산에 나아가 배웠다. 문득 하루는 마음이 놀라 자리를 여러 번 옮겼는데, 잠시 뒤에 어머니가 그를 기다리다가 병이 났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급히 고향으로 돌아가 뵈오니 병도 뒤따라 나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를 완효서에 견주었다. 얼마 있지 않아서 대사에게 痼疾이 전염되어 의원에게 보여도 효험이 없었다. 여러 사람에게 점을 쳤더니 모두 말하기를, “마땅히 부처에게 이름을 예속시켜야 할 것이다”고 하였다. 어머니가 그전의 꿈을 돌이켜 생각해 보고는 조심스럽게 네모진 가사를 몸에 덮고 울면서 맹세하기를, “이 병에서 만약 일어나게 된다면 부처님께 아들로 삼아 달라고 빌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틀 밤을 자고 난 뒤에 과연 완쾌되었다. 우러러 어머니의 염려하심을 깨닫고, 마침내 평소에 품었던 뜻을 이루어, 제 자식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식을 부처에게 선뜻 내주도록 하고, 불도를 미덥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로 하여금 의심을 풀게 하였으니, 효성으로 신인을 감동시킨 것의 기이함이 셋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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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0년([[신라 문성왕|문성왕]] 2) 17세에 [[경의|경의(瓊儀)]]에게서 [[구족계|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ref>한국사전연구사 편집부, 『종교학대사전』, 한국사전연구사, 1998.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632544&cid=50766&categoryId=50794 지선]", 종교학대사전,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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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0년([[신라 문성왕|문성왕]] 2) 17세에 [[경의|경의율사(瓊儀律師)]]에게서 [[구족계|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ref>한국사전연구사 편집부, 『종교학대사전』, 한국사전연구사, 1998.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632544&cid=50766&categoryId=50794 지선]", 종교학대사전,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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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 살에 이르러 구족계를 받고 비로소 강단에 나아갔다. 소매 속에 빛이 선명한 것을 깨닫고 이를 더듬어 한 구슬을 얻었다. 어찌 마음을 두고 구한 것이겠는가. 곧 발이 없이도 이른 것이니, 참으로 『六度集經』에서 비유한 바이다. 굶주려 부르짖는 것으로 하여금 제 스스로 배부르게 하고, 취해서 넘어지는 것으로 하여금 능히 깨어나도록 하였으니, 마음을 면려한 것의 기이함이 넷째이다.
 
|열일곱 살에 이르러 구족계를 받고 비로소 강단에 나아갔다. 소매 속에 빛이 선명한 것을 깨닫고 이를 더듬어 한 구슬을 얻었다. 어찌 마음을 두고 구한 것이겠는가. 곧 발이 없이도 이른 것이니, 참으로 『六度集經』에서 비유한 바이다. 굶주려 부르짖는 것으로 하여금 제 스스로 배부르게 하고, 취해서 넘어지는 것으로 하여금 능히 깨어나도록 하였으니, 마음을 면려한 것의 기이함이 넷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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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헌은 계람산(鷄藍山) [[수석사|수석사(水石寺)]]에서 고행정진하여 [[혜은|혜은(惠隱)]]의 선법(禪法)을 이어받았다.<ref>조용길,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4256 지선]",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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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부터 노성한 덕이 풍부하였고, 게다가 戒珠를 밝혔는지라, 후생들이 다투어 따르면서 배우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대사는 이를 거절하여 말하기를, “사람의 큰 걱정은 남의 스승이 되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슬기롭지 못한 사람들을 억지로 슬기롭게 하고자 해도 그것이 본보기가 되지 못한 사람들을 모범이 되게 하는 것과 같겠는가. 하물며 큰 바다에 뜬 지푸라기가 제 자신도 건너갈 겨를이 없음에랴. 그림자에게 형체를 쫓지 못하도록 한 것은 반드시 비웃음을 살 꼴이 되리라” 하였다. 뒤에 산길을 가는데 어떤 나뭇꾼이 앞길을 막으면서 말하기를, “선각이 후각을 깨닫게 하는 데 어찌 덧없는 몸을 아낄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그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니 문득 보이지 않았다. 이에 부끄러워 하면서도 깨닫고는 와서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을 막지 않으니, 鷄藍山 水石寺에 대나무와 갈대처럼 빽빽하게 몰려들었다. 얼마 뒤에 다른 곳에 땅을 골라 집을 짓고는 말하기를, “매이지 않는 것이 평소의 생각이나, 능히 옮겨가는 것이 귀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책의 글자만 보는 이로 하여금 세 가지를 반성하게 하고 보금자리를 꾸민 자로 하여금 아홉 가지를 생각하도록 하였으니, 훈계를 내린 것의 이상함이 여섯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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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한국고대사회연구소,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제3책 통일신라,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온라인 참조: "[http://db.history.go.kr/id/gskr_010_0010_0110_0030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해석문]",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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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경문왕|경문왕]]은 제자의 예를 갖추고 도헌을 초청하였으나 도헌은 이를 거절하였다.<ref>한국고대사회연구소,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제3책 통일신라,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온라인 참조: "[http://db.history.go.kr/id/gskr_010_0010_0110_0010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개관]",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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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사에 추증된 경문대왕께서는 마음으로는 儒·佛·道 3교에 융회한 분으로서 직접 대사를 만나 뵙고자 하였다. 멀리서 그의 생각을 깊이 하고, 자신을 가까이 하면서 도와주기를 희망하였다. 이에 서한을 부쳐 말하기를, “이윤은 사물에 구애받지 않은 사람이고, 송섬은 작은 것까지 살핀 사람입니다. 유교의 입장에서 불교에 비유하면, 가까운 곳으로부터 먼 곳으로 가는 것과 같습니다. 왕도 주위의 암거에도 자못 아름다운 곳이 있으니, 새가 앉을 나무를 가릴 수 있는 것처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봉황의 來儀를 아끼지 마십시오” 하였다. 근시 가운데 쓸만한 사람을 잘 골라 뽑았는데, 원성왕의 6대손인 立言을 사자로 삼았다. 이미 교지를 전함이 끝나자 거듭 제자로서의 예를 갖추었다. 대사가 대답하기를, “자신을 닦고 남을 교화시킴에 있어 고요한 곳을 버리고 어디로 나아가겠습니까. ‘새가 나무를 가려 앉을 수 있다’는 분부는 저를 위하여 잘 말씀하신 것이오니, 바라건대 그냥 이대로 있게 해주시어, 제가 거듭되는 부름을 피해 다른 곳으로 가지 않게 해주십시오” 하였다. 임금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더욱 진중히 여겼다. 이로부터 그의 명예는 날개가 없이도 사방으로 전해졌으며, 대중은 말하지 않는 가운데 아주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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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한국고대사회연구소,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제3책 통일신라,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온라인 참조: "[http://db.history.go.kr/id/gskr_010_0010_0110_0030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해석문]",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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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4년([[신라 경문왕|경문왕]] 4) [[단의장옹주|단의장옹주(端儀長翁主)]]가 현계산(賢溪山) 안락사(安樂寺)를 시납하자 그곳에 주석하였다.<ref>한국고대사회연구소,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제3책 통일신라,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온라인 참조: "[http://db.history.go.kr/id/gskr_010_0010_0110_0010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개관]",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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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통 5년(864) 겨울 端儀長翁主가 미망인을 자칭하며 當來佛에 귀의하였다. 대사를 공경하여 자신을 下生이라 이르고 上供을 후히 하였으며, 邑司의 영유인 賢溪山 安樂寺가 산수의 아름다움을 많이 가지고 있다 하여, 猿鶴의 주인이 되어 달라고 청하였다. 대사가 이에 그의 문도들에게 말하기를, “산의 이름이 賢溪이고 땅이 愚谷과 다르며 절의 이름이 安樂이거늘, 중으로서 어찌 주지하지 않으리오” 하고는, 그 말을 따라 옮겨서 머무른즉 교화되었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산과 같이 더욱 고요하게 하고, 땅을 고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신중히 생각토록 하였으니, 진퇴의 옳음이 첫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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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한국고대사회연구소,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제3책 통일신라,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온라인 참조: "[http://db.history.go.kr/id/gskr_010_0010_0110_0030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해석문]",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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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25일 (금) 15:58 판

도헌(道憲)
BHST Monk1.png
대표명칭 도헌
한자 道憲
생몰년 824년(헌덕왕 16)-882년(헌강왕 8)
시호 지증(智證)
도헌(道憲)
탑호 적조(寂照)
지선(智詵)
성씨 경주 김씨
승탑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
승탑비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정의

신라 말기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지증대사 도헌(智證大師 道憲)은 824년(헌덕왕 16) 경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찬괴(贊瓌)이며 어머니는 윤씨(伊氏)이다.

Quote-left.png 그의 세속 인연을 상고해 보면, 王都 사람으로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다. 호는 道憲이요 자는 智詵이다. 아버지는 贊瓌이며 어머니는 伊氏이다. 長慶 甲辰年에 세상에 태어나 中和 壬寅年에 세상을 뜨니, 自恣한 지 43년이고 누린 나이가 59세였다. Quote-right.png
출처: 한국고대사회연구소,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제3책 통일신라,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온라인 참조: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해석문",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탄생설화

과거 승견불(勝見佛) 때의 승려였던 자가 자주 분노하여 용이 되었는데, 이제 사람으로 태어나고자 하니 받아 줄 것을 간청하는 태몽을 꾸고 400일 만인 사월초파일에 대사를 낳았다.[1]

Quote-left.png 처음 어머니의 꿈에 한 거인이 나타나 고하기를, “나는 과거의 毘婆尸佛로서 말법의 세상에 중이 되었는데, 성을 낸 까닭으로 오랫동안 龍報를 따랐으나, 업보가 이미 다 끝났으니 마땅히 법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묘연에 의탁하여 자비로운 교화를 널리 펴기를 원합니다”고 하였다. 이내 임신하여 거의 4백일을 지나 灌佛會의 아침에 태어났는데, 일이 이무기의 復生故事에 징험되고 꿈이 佛母의 태몽고사에 부합되어, 스스로 경계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더욱 조심하고 삼가하게 하며, 가사를 두른 자로 하여금 정밀하게 불도를 닦도록 하였으니, 탄생의 기이한 것이 첫째이다.

태어난 지 여러 날이 되도록 젖을 빨지 않고, 짜서 먹이면 울면서 목이 쉬려고 하였다. 문득 어떤 道人이 문앞을 지나다가 깨우쳐 말하기를, “아이가 울지 않도록 하려면 葷菜 및 肉類를 참고 끊으시오”라고 하였다. 어머니가 그 말을 따르자 마침내 아무런 탈이 없게 되었다. 젖으로 기르는 이에게 더욱 삼가도록 하고 고기를 먹는 자에게 부끄러운 마음을 지니게 하였으니, 오랜 풍습의 기이한 것이 둘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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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고대사회연구소,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제3책 통일신라,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온라인 참조: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해석문",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유년기

태어나자 며칠 동안 젖을 먹지 않고 울기만 하였는데, 도인이 찾아와 어머니가 육식과 파·마늘 등을 금할 것을 깨우쳤다. 그대로 했더니 젖을 먹기 시작하였다.[2]

Quote-left.png 태어난 지 여러 날이 되도록 젖을 빨지 않고, 짜서 먹이면 울면서 목이 쉬려고 하였다. 문득 어떤 道人이 문앞을 지나다가 깨우쳐 말하기를, “아이가 울지 않도록 하려면 葷菜 및 肉類를 참고 끊으시오”라고 하였다. 어머니가 그 말을 따르자 마침내 아무런 탈이 없게 되었다. 젖으로 기르는 이에게 더욱 삼가도록 하고 고기를 먹는 자에게 부끄러운 마음을 지니게 하였으니, 오랜 풍습의 기이한 것이 둘째이다. Quote-right.png
출처: 한국고대사회연구소,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제3책 통일신라,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온라인 참조: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해석문",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출가수행

도헌은 9세에 출가하려 하였으나 어머니가 허락하지 않으므로 몰래 부석사(浮石寺)로 가서 범체대덕(梵體大德)의 제자가 되었다. 어느 날 어머니의 병보를 듣고 집으로 돌아가자 어머니의 병은 저절로 나았으나 그가 중병에 걸렸다. 어머니가 부처에게 자식의 병을 낫게 해주면 곧 출가를 시키겠다고 맹세하자 병이 나았다.[3]

Quote-left.png 아홉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너무 슬퍼하여 거의 훼멸하였다. 추복승이 이를 가련히 여기고 논하여 말하기를, “덧없는 몸은 사라지기 쉬우나 장한 뜻은 이루기 어렵다. 옛날에 부처님께서 은혜를 갚으심에 큰 방편이 있었으니 그대는 이를 힘쓰라”고 하였다. 그로 인하여 느끼고 깨달아 울음을 거두고는 어머니께 불도에 돌아갈 것을 청하였다. 어머니는 그의 어린 것을 가엾게 여기고, 다시금 집안을 보전할 주인이 없음을 염려하여 굳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사는 부처님께서 출가하신 고사를 듣고 곧 도망해 가서 부석산에 나아가 배웠다. 문득 하루는 마음이 놀라 자리를 여러 번 옮겼는데, 잠시 뒤에 어머니가 그를 기다리다가 병이 났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급히 고향으로 돌아가 뵈오니 병도 뒤따라 나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를 완효서에 견주었다. 얼마 있지 않아서 대사에게 痼疾이 전염되어 의원에게 보여도 효험이 없었다. 여러 사람에게 점을 쳤더니 모두 말하기를, “마땅히 부처에게 이름을 예속시켜야 할 것이다”고 하였다. 어머니가 그전의 꿈을 돌이켜 생각해 보고는 조심스럽게 네모진 가사를 몸에 덮고 울면서 맹세하기를, “이 병에서 만약 일어나게 된다면 부처님께 아들로 삼아 달라고 빌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틀 밤을 자고 난 뒤에 과연 완쾌되었다. 우러러 어머니의 염려하심을 깨닫고, 마침내 평소에 품었던 뜻을 이루어, 제 자식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식을 부처에게 선뜻 내주도록 하고, 불도를 미덥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로 하여금 의심을 풀게 하였으니, 효성으로 신인을 감동시킨 것의 기이함이 셋째이다. Quote-right.png
출처: 한국고대사회연구소,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제3책 통일신라,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온라인 참조: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해석문",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840년(문성왕 2) 17세에 경의율사(瓊儀律師)에게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4]

Quote-left.png 열일곱 살에 이르러 구족계를 받고 비로소 강단에 나아갔다. 소매 속에 빛이 선명한 것을 깨닫고 이를 더듬어 한 구슬을 얻었다. 어찌 마음을 두고 구한 것이겠는가. 곧 발이 없이도 이른 것이니, 참으로 『六度集經』에서 비유한 바이다. 굶주려 부르짖는 것으로 하여금 제 스스로 배부르게 하고, 취해서 넘어지는 것으로 하여금 능히 깨어나도록 하였으니, 마음을 면려한 것의 기이함이 넷째이다. Quote-right.png
출처: 한국고대사회연구소,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제3책 통일신라,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온라인 참조: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해석문",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활동

도헌은 계람산(鷄藍山) 수석사(水石寺)에서 고행정진하여 혜은(惠隱)의 선법(禪法)을 이어받았다.[5]

Quote-left.png 어렸을 때부터 노성한 덕이 풍부하였고, 게다가 戒珠를 밝혔는지라, 후생들이 다투어 따르면서 배우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대사는 이를 거절하여 말하기를, “사람의 큰 걱정은 남의 스승이 되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슬기롭지 못한 사람들을 억지로 슬기롭게 하고자 해도 그것이 본보기가 되지 못한 사람들을 모범이 되게 하는 것과 같겠는가. 하물며 큰 바다에 뜬 지푸라기가 제 자신도 건너갈 겨를이 없음에랴. 그림자에게 형체를 쫓지 못하도록 한 것은 반드시 비웃음을 살 꼴이 되리라” 하였다. 뒤에 산길을 가는데 어떤 나뭇꾼이 앞길을 막으면서 말하기를, “선각이 후각을 깨닫게 하는 데 어찌 덧없는 몸을 아낄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그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니 문득 보이지 않았다. 이에 부끄러워 하면서도 깨닫고는 와서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을 막지 않으니, 鷄藍山 水石寺에 대나무와 갈대처럼 빽빽하게 몰려들었다. 얼마 뒤에 다른 곳에 땅을 골라 집을 짓고는 말하기를, “매이지 않는 것이 평소의 생각이나, 능히 옮겨가는 것이 귀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책의 글자만 보는 이로 하여금 세 가지를 반성하게 하고 보금자리를 꾸민 자로 하여금 아홉 가지를 생각하도록 하였으니, 훈계를 내린 것의 이상함이 여섯째이다. Quote-right.png
출처: 한국고대사회연구소,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제3책 통일신라,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온라인 참조: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해석문",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경문왕은 제자의 예를 갖추고 도헌을 초청하였으나 도헌은 이를 거절하였다.[6]

Quote-left.png 태사에 추증된 경문대왕께서는 마음으로는 儒·佛·道 3교에 융회한 분으로서 직접 대사를 만나 뵙고자 하였다. 멀리서 그의 생각을 깊이 하고, 자신을 가까이 하면서 도와주기를 희망하였다. 이에 서한을 부쳐 말하기를, “이윤은 사물에 구애받지 않은 사람이고, 송섬은 작은 것까지 살핀 사람입니다. 유교의 입장에서 불교에 비유하면, 가까운 곳으로부터 먼 곳으로 가는 것과 같습니다. 왕도 주위의 암거에도 자못 아름다운 곳이 있으니, 새가 앉을 나무를 가릴 수 있는 것처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봉황의 來儀를 아끼지 마십시오” 하였다. 근시 가운데 쓸만한 사람을 잘 골라 뽑았는데, 원성왕의 6대손인 立言을 사자로 삼았다. 이미 교지를 전함이 끝나자 거듭 제자로서의 예를 갖추었다. 대사가 대답하기를, “자신을 닦고 남을 교화시킴에 있어 고요한 곳을 버리고 어디로 나아가겠습니까. ‘새가 나무를 가려 앉을 수 있다’는 분부는 저를 위하여 잘 말씀하신 것이오니, 바라건대 그냥 이대로 있게 해주시어, 제가 거듭되는 부름을 피해 다른 곳으로 가지 않게 해주십시오” 하였다. 임금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더욱 진중히 여겼다. 이로부터 그의 명예는 날개가 없이도 사방으로 전해졌으며, 대중은 말하지 않는 가운데 아주 달라졌다. Quote-right.png
출처: 한국고대사회연구소,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제3책 통일신라,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온라인 참조: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해석문",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864년(경문왕 4) 단의장옹주(端儀長翁主)가 현계산(賢溪山) 안락사(安樂寺)를 시납하자 그곳에 주석하였다.[7]

Quote-left.png 함통 5년(864) 겨울 端儀長翁主가 미망인을 자칭하며 當來佛에 귀의하였다. 대사를 공경하여 자신을 下生이라 이르고 上供을 후히 하였으며, 邑司의 영유인 賢溪山 安樂寺가 산수의 아름다움을 많이 가지고 있다 하여, 猿鶴의 주인이 되어 달라고 청하였다. 대사가 이에 그의 문도들에게 말하기를, “산의 이름이 賢溪이고 땅이 愚谷과 다르며 절의 이름이 安樂이거늘, 중으로서 어찌 주지하지 않으리오” 하고는, 그 말을 따라 옮겨서 머무른즉 교화되었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산과 같이 더욱 고요하게 하고, 땅을 고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신중히 생각토록 하였으니, 진퇴의 옳음이 첫째이다. Quote-right.png
출처: 한국고대사회연구소,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제3책 통일신라,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온라인 참조: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해석문",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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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조용길, "지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조용길, "지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조용길, "지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한국사전연구사 편집부, 『종교학대사전』, 한국사전연구사, 1998. 온라인 참조: "지선", 종교학대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5. 조용길, "지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6. 한국고대사회연구소,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제3책 통일신라,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온라인 참조: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개관",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7. 한국고대사회연구소,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제3책 통일신라,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온라인 참조: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개관",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참고문헌

  •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 금석문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소.
  • 곽철환,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2003. 온라인 참조: "도헌", 용어해설,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조용길, "지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지증",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지선",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한국사전연구사 편집부, 『종교학대사전』, 한국사전연구사, 1998. 온라인 참조: "지선", 종교학대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