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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논문
** 안예진, 「조선후기 순흥안씨 직장공파의 창원 정착과정과 향촌활동」, 학위논문(석사)-- 경남대학교 대학원 : 인문학과 201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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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화봉·김세환, 「居昌 黃山마을 전통주거의 형성과정에 관한 연구」, 『농촌건축 : 한국농촌건축학회논문집』13, 한국농촌건축학회,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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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19일 (토) 18:36 판

거창 신씨(居昌 愼氏)
대표명칭 거창 신씨
한자표기 居昌 愼氏


정의

경상남도 거창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내용

유래

시조(始租) 신수는 본래 중국(中國) 송(宋)나라 개봉부(開封府) 출신으로 고려(高麗) 문종(文宗) 때 사신(使臣)으로 왔다가 정착(定着)하여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수사공(守司空)ㆍ좌복야(左僕射) 등을 지내고 참지정사(參知政事:중서문하성 종 2품 벼슬)에 이르러 치사(致仕:나이가 많아 벼슬을 내어놓고 물러남) 하였으며 학식(學識)과 의학에 정통하였다. 그후 7세손 집평(執平)고려 고종(高宗) 때 대장군(大將軍)에 올라 몽고군의 침입 때 죽도(竹島)에서 순절했고, 아들 성(成)이 군기감사(軍器監事)를 지낸 후 개경(開京)을 떠나 거창(居昌)에서 뿌리를 내림으로써 후손들은 본관(本貫)을 거창(居昌)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1],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 학술원 존경각.

조선후기 거창 신씨와 대표인물

거창 신씨요수 신권(1501-1573)을 중심으로 가문의 위상이 일신되어 거창 일대의 핵심 사족으로 성장하였다. 1728년 조선 영조 대의 무신란 이후 혼란한 정국 속에서 신수이(1688-1768) 도암 이재의 문인으로 활약한 것을 계기로 남인에서 노론으로 정치적 성향에도 변화가 생겼으며, 이를 바탕으로 18~19세기까지 지속적으로 사환을 유지할 수 있었다. [2]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거창 신씨 기일생신첩 A는 B와 관련이 있다

주석

  1. "거창신씨(居昌愼氏)", 『한국족보자료시스템』online
  2. "거창 장기 거창신씨", 한국고문서소장처, 『한국학자료센터』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더 읽을거리

  • 논문
    • 김화봉·김세환, 「居昌 黃山마을 전통주거의 형성과정에 관한 연구」, 『농촌건축 : 한국농촌건축학회논문집』13, 한국농촌건축학회,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