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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서관은 서적의 인쇄 반포 및 판본 관리 등을 담당하는 기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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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23일 (일) 01:10 판

정의

교서관은 서적의 인쇄 반포 및 판본 관리 등을 담당하는 기관이다.

내용

교서관의 설립

조선은 중문주의(重文主意)를 표장하는 나라였다. 때문에 중앙관청 중 서책의 인쇄, 출판 등을 관장하는 기관이 1392년 개국 당시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개국 초에는 교서감(校書監)이라는 이름의 관정이었으며 고려시대의 비서성(秘書城)의 역할을 계승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교서감과 서적원(書籍院)이라는 이름을 병행하여 사용하다가 1401년 태종이 즉위하면서 관제를 개혁할 때부터 비로소 '교서관'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으며 기존의 교서감과 서적원의 기능을 병합, 확대하는 기관으로서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 시기부터 교서관의 인쇄, 출판을 위한 실무기능 쳬제가 갖춰지고 성종대에 완비된 『경국대전』에 의해 제도화되면서 '서적의 인출'을 비롯한 반사(頒賜), 도장(圖章) 인전(印篆), 향축(香祝)의 일 등을 겸직하는 기관으로서의 체제를 완성하게 되었다.[1]

교서관의 변화

교서관은 당대 왕의 정책에 따라 교서감-교서관-전교서-교서관으로 여러 차례 이름이 바뀌었으며 이에 따라 실질적인 기능 및 입지도 변화해왔다. 특히 세조 대에는 주자소를 혁파하면서 이를 교서관에 합속시켜 교서관의 기능이 강화되었으나 1461년(세조 7)에 간경도감을 설치하고, 이 시기 이후 기획, 출판되는 불경을 비롯한 많은 서적들의 인출, 간행을 간경도감에서 주관하도록 유도함으로서 교서관의 입지는 급격히 축소되었고 1466년(세조 12)에는 이름도 전교서(典校署)로 변경되었다. [2]
성종 즉위 후인 1471년(성종 2) 교서관이 혁파되고 그 기능이 다시 전교서로 옮겨왔지만 아직까지 기관의 명칭은 그대로였다. 전교서가 이전의 관제를 회복한 시기는 1484년으로, 전교서의 명칭을 다시 교서관으로 환원하면서 관제 또한 3품의 아문으로 승격, 조정하였다. [3]

교서관의 기능

교서관은 유학의 여러 경서 및 제반도서를 출간하여 지방 관청에 배포하였다. 문치주의를 주장하는 조선 왕실에 있어서 경서의 인쇄, 반포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고 인쇄 기반시설이 재대로 갖춰지지 않은 지방에서 자체적으로 경서를 출간할 수는 없었기에 이러한 일이 교서관의 가장 주요한 업무가 되었다. [4]
조선 조정에서는 건국 이래로 목판 활자본의 관리는 교서관에서 주로 담당하고 있었다. 1435년(세종 17)에는 주자소를 경복궁 내로 이전하면서 주자소의 건물을 목판본 보관소로 사용하고 이를 교서관이 관장하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지방 관사 및 사찰 등에 보관되어 있던 목판본의 관리도 교서관이 주관하도록 하였다. 이 외에도 장서와 주자를 관리하는 등 출간에 필요한 판본과 서적 전반의 관리를 담당하였다.
주자소가경복궁 내로 이전하기 전까지 교서관의 기능은 인전을 제작, 관장하고 향축을 관장하는 일을 주로 맡고 있었다. 주자소의 궁내 이전 이후 주자, 활자의 관리와 출간 및 배포가 교서관에서 이뤄졌지만 여전히 인전과 향축 업무 또한 담당하고 있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금속활자의주조는 주자소와 정음청, 간경도감 등의 임시기관을 설치하여 수행하였고 조선 중기에는 훈련도감 등에서 활자의 주조를 대행하는 등 금속활자에 대한 기능은 이러한 기관들이 수행하고 있었다. 교서관이 금속활자의 주조를 담당하게 된 것은 임란 이후이며 교서관인서체자등을 주조하면서 금속활자 주조 기능을 본격적으로 담당하게 되었다.
이를 통해 살펴본 교서관의 기능은 대략 ① 서적의 인쇄, 출간 및 반사, ② 목판, 장서, 주자의 관리, ③ 인전, 향축의 관장, ④ 활자 주조 등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5]
이 외에도 교서관은 시험을 담당하거나 책을 판매하는 서적상의 역할도 맡고 있었는데 인쇄되는 수량이 적고 대부분 기관이나 대신들에게 반사되었기 때문에 책이 특히 귀했던 조선시대에서 교서관의 이러한 기능은 주변 환경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가난하여 돈이없는 유생들은 교서관에서 인출한 서적을 곡물 등으로 교환, 구입하고자 하였고 저렴하게 서적을 구매할 수 있는 교서관 주변의 필동, 남산골 등에 유생들의 마을이 형성되었다.

주석

  1. 김성수, 「조선시대 국가 중앙인쇄기관의 조직·기능 및 업무활동에 관한 연구」, 『서지학연구』 vol. 42, 서지학연구, 2009. 4-8쪽
  2. 김성수, 「조선시대 국가 중앙인쇄기관의 조직·기능 및 업무활동에 관한 연구」, 『서지학연구』 vol. 42, 서지학연구, 2009. 9쪽
  3. 김성수, 「조선시대 국가 중앙인쇄기관의 조직·기능 및 업무활동에 관한 연구」, 『서지학연구』 vol. 42, 서지학연구, 2009. 9-10쪽
  4. 김성수, 「조선시대 국가 중앙인쇄기관의 조직·기능 및 업무활동에 관한 연구」, 『서지학연구』 vol. 42, 서지학연구, 2009. 180쪽
  5. 김성수, 「조선시대 국가 중앙인쇄기관의 조직·기능 및 업무활동에 관한 연구」, 『서지학연구』 vol. 42, 서지학연구, 2009. 17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