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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시대의 대표적 사찰이며, [[고려 문종]]의 원찰(願刹)로 창건되었다. 1056년(문종 10)에 착공하여 12년 만인 1067년(문종 21)에 준공한 대공사로서 고려 일대를 통해서 가장 큰 규모였다.<ref>이를 통해 당시 고려의 문물 발달이나 국가의 부력이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추론해볼 수 있다. 실제로 이제현의 《익재난고》에서는 나라의 부유함과 높은 문화수준을 묘사하며 이 시기를 태평성대라 적고 있기도 하다. 진홍섭,『묵재한화』, 대원사, 2011. 12, 온라인 참조: "[http://www.krpia.co.kr/viewer/open?plctId=PLCT00004978&tabNodeId=NODE04080191&nodeId=NODE04080198¤tLocale=ko 제 3화 흥왕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KRPia 한국의 지식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최종확인: 2017년 04월 24일.</ref> 사찰이 너무 장엄하고 사치스러워서 많은 신하들이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문종은 공사를 그대로 진행했다고 한다. 실제로 기록에 의하면 흥왕사는 개별 사찰만 2800여칸에 이르렀고 사찰에 딸린 원(院)은 수없이 많았다고 전해진다.<ref>"[http://luckcrow.egloos.com/2091044 한국의 사라진 대사찰(4) - 고려 흥왕사 & 안화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까마구둥지』<sup>online</sup></online></html>, 이글루스 블로그. 최종수정일: 2011년 4월 16일</ref> 흥왕사가 완공되고 9일동안은 연등회를 열었으며, 왕이 직접 행차를 했다.<ref> 진홍섭,『묵재한화』, 대원사, 2011. 12, 온라인 참조:"[http://www.krpia.co.kr/viewer/open?plctId=PLCT00004978&tabNodeId=NODE04080191&nodeId=NODE04080198¤tLocale=ko 제 3화 흥왕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KRPia 한국의 진홍섭,『묵재한화』, 대원사, 2011. 12, 온라인 참조:식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최종확인: 2017년 04월 25일.</ref> 1070년(문종 24) 6월에는 흥왕사에 성을 쌓았는데, 사찰에 성까지 쌓은 것은 고려시대에 지은 절 중에 유일하다.<ref>"[http://www.krpia.co.kr/viewer/open?plctId=PLCT00004978&tabNodeId=NODE04080191&nodeId=NODE04080198¤tLocale=ko 제 3화 흥왕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KRPia 한국의 지식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최종확인: 2017년 04월 25일.</ref> 1078년에는 금탑을 조성하였고 아울러 이 금탑을 보호하기 위하여 석탑을 조성하였는데, 숙종 때 송나라 조정에서 보내온 [[대장경]]을 이 탑 속에 봉안하였다. 문종이 죽은 뒤에는 문종의 진영(眞影)을 모셨으며, 그 뒤 고려의 여러 왕들이 자주 행차하였다. 이 절은 몽고의 병란으로 완전히 소실되었다가 그 뒤 여러 차례 중창하였으나 완벽하지 못하였고, 1330년(충숙왕 17)에 정조(晶照)·[[달환|달환(達幻)]] 등의 [[화엄종]] 고승들이 9년 동안 공사하여 이전의 면모를 되찾을 수 있었다. 또한, [[공민왕]] 때는 이 절에서 왕을 시해하려는 | + | 고려시대의 대표적 사찰이며, [[고려 문종]]의 원찰(願刹)로 창건되었다. 1056년(문종 10)에 착공하여 12년 만인 1067년(문종 21)에 준공한 대공사로서 고려 일대를 통해서 가장 큰 규모였다.<ref>이를 통해 당시 고려의 문물 발달이나 국가의 부력이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추론해볼 수 있다. 실제로 이제현의 《익재난고》에서는 나라의 부유함과 높은 문화수준을 묘사하며 이 시기를 태평성대라 적고 있기도 하다. 진홍섭,『묵재한화』, 대원사, 2011. 12, 온라인 참조: "[http://www.krpia.co.kr/viewer/open?plctId=PLCT00004978&tabNodeId=NODE04080191&nodeId=NODE04080198¤tLocale=ko 제 3화 흥왕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KRPia 한국의 지식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최종확인: 2017년 04월 24일.</ref> 사찰이 너무 장엄하고 사치스러워서 많은 신하들이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문종은 공사를 그대로 진행했다고 한다. 실제로 기록에 의하면 흥왕사는 개별 사찰만 2800여칸에 이르렀고 사찰에 딸린 원(院)은 수없이 많았다고 전해진다.<ref>"[http://luckcrow.egloos.com/2091044 한국의 사라진 대사찰(4) - 고려 흥왕사 & 안화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까마구둥지』<sup>online</sup></online></html>, 이글루스 블로그. 최종수정일: 2011년 4월 16일</ref> 흥왕사가 완공되고 9일동안은 연등회를 열었으며, 왕이 직접 행차를 했다.<ref> 진홍섭,『묵재한화』, 대원사, 2011. 12, 온라인 참조:"[http://www.krpia.co.kr/viewer/open?plctId=PLCT00004978&tabNodeId=NODE04080191&nodeId=NODE04080198¤tLocale=ko 제 3화 흥왕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KRPia 한국의 진홍섭,『묵재한화』, 대원사, 2011. 12, 온라인 참조:식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최종확인: 2017년 04월 25일.</ref> 1070년(문종 24) 6월에는 흥왕사에 성을 쌓았는데, 사찰에 성까지 쌓은 것은 고려시대에 지은 절 중에 유일하다.<ref>"[http://www.krpia.co.kr/viewer/open?plctId=PLCT00004978&tabNodeId=NODE04080191&nodeId=NODE04080198¤tLocale=ko 제 3화 흥왕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KRPia 한국의 지식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최종확인: 2017년 04월 25일.</ref> 1078년에는 금탑을 조성하였고 아울러 이 금탑을 보호하기 위하여 석탑을 조성하였는데, 숙종 때 송나라 조정에서 보내온 [[대장경]]을 이 탑 속에 봉안하였다. 문종이 죽은 뒤에는 문종의 진영(眞影)을 모셨으며, 그 뒤 고려의 여러 왕들이 자주 행차하였다. 이 절은 몽고의 병란으로 완전히 소실되었다가 그 뒤 여러 차례 중창하였으나 완벽하지 못하였고, 1330년(충숙왕 17)에 정조(晶照)·[[달환|달환(達幻)]] 등의 [[화엄종]] 고승들이 9년 동안 공사하여 이전의 면모를 되찾을 수 있었다. 또한, [[공민왕]] 때는 이 절에서 [[개성 흥왕사#흥왕사의 변|왕을 시해하려는 음모]]가 벌어지기도 하였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6036 흥왕사]", 정병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수정일: 2013년 3월 25일</ref> 1948년 11월 28일부터 12월 2일까지 5일간 국립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하였으며, 그 결과가 당시 조사에 참가하였던 박물감 황수영에 의해서 『백성욱 박사 송수기념 불교논문집(白性郁博士頌壽紀念 佛敎論文集)』에 발표되었다.<ref>흥암사의 현재 실태를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논문이라고 한다. 진홍섭,『묵재한화』, 대원사, 2011. 12, 온라인 참조:"[http://www.krpia.co.kr/viewer/open?plctId=PLCT00004978&tabNodeId=NODE04080191&nodeId=NODE04080198¤tLocale=ko 제 3화 흥왕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KRPia 한국의 지식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최종확인: 2017년 04월 25일.</ref> 현재는 건물은 없고 그 터만 남아있다고 한다.<ref>"[http://luckcrow.egloos.com/2091044 한국의 사라진 대사찰(4) - 고려 흥왕사 & 안화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까마구둥지』<sup>online</sup></online></html>, 이글루스 블로그. 최종수정일: 2011년 4월 16일</ref> |
2017년 4월 26일 (수) 14:25 판
개성 흥왕사 (開城 興王寺) |
|
대표명칭 | 개성 흥왕사 |
---|---|
한자 | 開城 興王寺 |
주소 | 경기도 개풍군 |
건립시기 | 1067년 |
창건자 | 고려 문종 |
목차
정의
경기도 개풍군 덕적산(德積山)에 있었던 절.[1]
내용
역사
고려시대의 대표적 사찰이며, 고려 문종의 원찰(願刹)로 창건되었다. 1056년(문종 10)에 착공하여 12년 만인 1067년(문종 21)에 준공한 대공사로서 고려 일대를 통해서 가장 큰 규모였다.[2] 사찰이 너무 장엄하고 사치스러워서 많은 신하들이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문종은 공사를 그대로 진행했다고 한다. 실제로 기록에 의하면 흥왕사는 개별 사찰만 2800여칸에 이르렀고 사찰에 딸린 원(院)은 수없이 많았다고 전해진다.[3] 흥왕사가 완공되고 9일동안은 연등회를 열었으며, 왕이 직접 행차를 했다.[4] 1070년(문종 24) 6월에는 흥왕사에 성을 쌓았는데, 사찰에 성까지 쌓은 것은 고려시대에 지은 절 중에 유일하다.[5] 1078년에는 금탑을 조성하였고 아울러 이 금탑을 보호하기 위하여 석탑을 조성하였는데, 숙종 때 송나라 조정에서 보내온 대장경을 이 탑 속에 봉안하였다. 문종이 죽은 뒤에는 문종의 진영(眞影)을 모셨으며, 그 뒤 고려의 여러 왕들이 자주 행차하였다. 이 절은 몽고의 병란으로 완전히 소실되었다가 그 뒤 여러 차례 중창하였으나 완벽하지 못하였고, 1330년(충숙왕 17)에 정조(晶照)·달환(達幻) 등의 화엄종 고승들이 9년 동안 공사하여 이전의 면모를 되찾을 수 있었다. 또한, 공민왕 때는 이 절에서 왕을 시해하려는 음모가 벌어지기도 하였다.[6] 1948년 11월 28일부터 12월 2일까지 5일간 국립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하였으며, 그 결과가 당시 조사에 참가하였던 박물감 황수영에 의해서 『백성욱 박사 송수기념 불교논문집(白性郁博士頌壽紀念 佛敎論文集)』에 발표되었다.[7] 현재는 건물은 없고 그 터만 남아있다고 한다.[8]
특징
흥왕사의 금탑
1078년(문종 32)에 조성된 금탑은 금 144근, 은 427근으로 만들어졌다.[9] 이 금탑은 그 후 약 200년 동안은 잘 보존되어 왔으나, 충렬왕(忠烈王) 때에 이르러 사변이 일어나게 되었다. 원나라 왕실의 딸로 고려에 시집온 제국공주가 금탑을 보고 탐내어 이를 강탈해 궁으로 가져온 것이다. 『고려사』열전에는 이와 관련된 기사가 실려있다.
공주(公主)가 흥왕사(興王寺) 금탑(金塔)을 가져다가 내궁(內宮)에 들여놓았는데 금탑을 꾸민 장엄(裝嚴)을 홀랄대(忽剌歹, 쿠라다이)와 삼가(三哥, 셍게) 등이 많이 훔쳐갔다. 공주가 장차 금탑을 허물어 〈마음대로〉 쓰고자 하니 왕이 그만두게 하였지만 듣지 않았고 다만 눈물을 흘리며 울 뿐이었다. 뒤에 왕이 공주와 더불어 흥왕사에 갔는데 승려들이 금탑을 돌려 달라고 간청하였으나 공주가 허락하지 않았다. |
||
출처: 『고려사』권89 열전 권제2 후비[10] |
그런데 금탑은 다음해에 뜻하지 않은 사태와 신하들의 기지로 다시 절로 돌아오게 된다. 충렬왕이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쓰러져서 사경을 헤매게 되었는데 제국공주는 일관(日官)이었던 오윤부에게 치료법을 물어보았다. 오윤부는 금탑을 흥왕사에 돌려주어야 한다고 말했고, 공주가 금탑을 돌려주자 충렬왕의 병이 씻은듯이 나은 것이다.[11]
흥왕사와 교장敎藏
흥왕사는 초대 주지인 의천에 의해 교장(敎藏)[12]의 간행사업이 이루어지고 실현된 사찰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깊다. 교장은 의천이 경. 율. 논 등의 삼장(三藏) 즉 대장경에 대해 연구하여 해석한 장소(章疏)를 수집하고 그 목록을 만들고 간행한 것이다.[13] 의천은 평소 송에서 수학하고자 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자, 1085년(선종 2)에 몰래 송에 건너가 경서 1천여 권을 가지고 귀국하였다. 다시 요ㆍ송 등에서 경전을 널리 수집하여 흥왕사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고 각국의 불서 4천 여권을 정리하여 간행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교장이다.[14]
흥왕사의 변
1363년(공민왕 12)에 김용(金鏞)이 흥왕사의 행궁에 머무르고 있던 공민왕을 시해하려고 한 사건이다. 홍건적이 대거 침입하자 공민왕은 잠시 복주(福州)와 청주(淸州)로 피신한 일이 있었으나 난이 진압되자 환도하여 잠시 흥왕사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때 왕의 신임이 두터웠던 김용(金鏞)이 역심을 품고 무리들과 함께 이 절에 침범하여 시위를 죽이고 왕까지 시해하려 하였다. 공민왕은 다급히 태후 밀실로 피신하였고, 노국공주(魯國公主)가 적도들의 칼을 막아 사직을 보전할 수 있었다. 이때 환관 안도치(安都赤)가 공민왕과 용모가 비슷하였으므로 반도들이 그를 왕으로 오해하여 죽였다고 한다. [15]
옛문헌 속 흥왕사
문종의 사원 창건 제고문制告文
“옛날 황제가 불교를 존숭하였음은 서적에서 볼 수 있다. 더구나 태조[聖祖] 이래 대대로 불사(佛寺)를 창건하여 나라의 복과 경사를 빌었다. 내가 왕위를 계승하여 덕정(德政)을 닦지 못하니 재변(灾變)이 빈번히 나타났다. 바라건대 부처의 힘에 의지하여 나라를 복되고 이롭게 하고자 하니, 유사(有司)로 하여금 적당한 지역을 택하여 절을 세우도록 하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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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고려사』권7 세가 권제7 문종 9년[16] |
사원 창건에 반대하는 문하성
문하성(門下省)에서 아뢰기를, “예로부터 훌륭한 황제나 현명한 왕이 사찰이나 탑을 세워 태평을 이룬 것은 아닙니다. 오직 불교를 숭배하고 정치를 신중히 하여 민력(民力)을 상하지 않으면, 자연 종묘와 사직이 장구할 것입니다. 옛날 달마(達磨)가 〈양(梁)〉 무제(武帝)에게 대답하기를 ‘절을 짓고 탑을 세워도 특별히 공덕이 없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무위공덕(無爲功德)을 숭상하는 것이고 유위공덕(有爲功德)을 숭상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태조께서 사찰을 창건한 것은 한편으로는 통합의 소원에 보답하는 것이고, 또 다른 편으로는 배치되는 산천의 정기를 진압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새 절을 더 세우려고 하면 급하지 않는 역사(役使)에 백성을 수고롭게 하는 것으로 원망이 연달아 일어날 것이며, 산천의 기운과 맥을 상하게 하여 반드시 재해가 일어날 것입니다. 신(神)과 사람이 함께 노여워할 것으로 태평을 이룩하는 길이 아닙니다."라고 하였으나 왕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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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고려사』권7 세가 권제7 문종 9년[17] |
흥왕사에서 열린 연등회
무진 특별히 흥왕사(興王寺)에서 5일 밤낮을 연등대회(燃燈大會)를 열었다. 칙서를 내려 모든 관사 및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개성부(開城府), 광주(廣州)·수주(水州)·양주(楊州)·동주(東州)·수주(樹州) 등 5개 주(州), 강화현(江華縣)·장단현(長湍縣) 등 2개 현(縣)에게 대궐 뜰에서 흥왕사 문까지 채붕(綵棚)을 얽되 연달아 서로 잇닿게 하고, 왕의 수레가 지나는 길 좌우에는 등산(燈山)과 화수(火樹)를 만들게 하니 불빛이 낮과 같았다. 이날에 왕이 의장을 갖추어 백관을 거느리고 행향(行香)하며 재물과 의복을 시납(施納)하니, 불교 행사의 성대함이 예로부터 일찍이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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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고려사』권8 세가 권제8 문종 21년[18] |
갤러리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
1056년 | 고려 문종의 뜻으로 흥왕사에 대한 공사가 시작되었다 |
1067년 | 공사를 시작한지 12년만에 흥왕사가 준공되었다 |
1070년 | 흥왕사에 성을 쌓았다 |
1078년 | 흥왕사에 금탑을 조성하였다 |
1092~1102년 | 의천이 교장도감에서 교장을 간행하였다 |
1276년 | 제국공주가 흥왕사의 금탑을 빼앗아 궁으로 가지고 왔다 |
1330년 | 몽고 병란으로 소실되었던 흥왕사를 정조(晶照)·달환(達幻) 등의 승려들이 중건하였다 |
1336년 | 김용이 공민왕을 시해하려고 시도한 '흥왕사의 변'이 일어났다 |
1948년 | 국립박물관에서 흥왕사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고려 문종 | 개성 흥왕사 | A는 B를 창건하였다 | |
의천 | 개성 흥왕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
교장도감 | 개성 흥왕사 | A는 B에 있었다 | |
개성 흥왕사 금탑 | 개성 흥왕사 | A는 B에 있었다 | |
개성 흥왕사 금탑 | 제국공주 | A는 B와 관련있다 | |
공민왕 | 개성 흥왕사 | A는 B와 관련있다 |
참고문헌
- 진홍섭,『묵재한화』, 대원사, 2011. 12
주석
- ↑ "흥왕사", 정병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수정일: 2013년 3월 25일 - ↑ 이를 통해 당시 고려의 문물 발달이나 국가의 부력이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추론해볼 수 있다. 실제로 이제현의 《익재난고》에서는 나라의 부유함과 높은 문화수준을 묘사하며 이 시기를 태평성대라 적고 있기도 하다. 진홍섭,『묵재한화』, 대원사, 2011. 12, 온라인 참조: "제 3화 흥왕사",
『KRPia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 최종확인: 2017년 04월 24일. - ↑ "한국의 사라진 대사찰(4) - 고려 흥왕사 & 안화사",
『까마구둥지』online , 이글루스 블로그. 최종수정일: 2011년 4월 16일 - ↑ 진홍섭,『묵재한화』, 대원사, 2011. 12, 온라인 참조:"제 3화 흥왕사",
『KRPia 한국의 진홍섭,『묵재한화』, 대원사, 2011. 12, 온라인 참조:식콘텐츠』online , 최종확인: 2017년 04월 25일. - ↑ "제 3화 흥왕사",
『KRPia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 최종확인: 2017년 04월 25일. - ↑ "흥왕사", 정병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수정일: 2013년 3월 25일 - ↑ 흥암사의 현재 실태를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논문이라고 한다. 진홍섭,『묵재한화』, 대원사, 2011. 12, 온라인 참조:"제 3화 흥왕사",
『KRPia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 최종확인: 2017년 04월 25일. - ↑ "한국의 사라진 대사찰(4) - 고려 흥왕사 & 안화사",
『까마구둥지』online , 이글루스 블로그. 최종수정일: 2011년 4월 16일 - ↑ 『고려사』 권 9 <세가> '문종 37년 6월 정묘호'에 따르면, "궁궐보다 더 사치스럽고, 사찰의 담장은 왕성과 비등하리만큼 높고, 또 황금으로 탑을 쌓아 모든 시설이 이와 맞게되었다."고 전한다고 한다."한국의 사라진 대사찰(4) - 고려 흥왕사 & 안화사",
『까마구둥지』online , 이글루스 블로그. 최종수정일: 2011년 4월 16일 - ↑ "원성공주가 흥왕사의 금탑을 내궁에 옮기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흥왕사",
『나무위키』online - ↑ 이전에는 '속장경'이라 불리기도 했다. 2005년 교육인적자원부가 일본식 오기(誤記)인 '속장경'을 '교장'으로 명칭을 바로잡고 국사교과서에 반영하였다."‘속장경→교장’ 새 국사교과서 반영, 서울신문, 2005년 1월 12일
- ↑ "교장",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확인: 2017년 4월 26일 - ↑ 진홍섭,『묵재한화』, 대원사, 2011. 12, 온라인 참조:"제 3화 흥왕사",
『KRPia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 최종확인: 2017년 04월 26일. - ↑ "교장",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확인: 2017년 4월 26일 - ↑ "사원 창건에 반대하는 문하성의 건의를 묵살하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사원 창건에 반대하는 문하성의 건의를 묵살하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흥왕사에서 연등회를 열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online , 국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