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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목 서용선 진행, 「작가와의 대담」, 『김태, 1952–1972』,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1996. | *정명목 서용선 진행, 「작가와의 대담」, 『김태, 1952–1972』,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1996. | ||
+ | *[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SS2D&office_id=143&article_id=0000040057§ion_id=103§ion_id2=245&menu_id=103 “김정호, 20년 동안 골방에서 대동여지도 만들었다”] - 김정호의 전국답사설을 비판하는 기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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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27일 (화) 08:35 판
목차
개요
조선 후기 대표적 지리학자이며 지도 제작자. 자는 백원(伯源), 호는 고산자(古山子), 황해도 토산(兎山) 출생으로 본관은 청도(淸道)다. 한자가 다른 김정호(金正皡)로도 알려져 있다.
생애
김정호는 청도 김씨 봉산파로 황해도 토산에서 1804년[1] 무렵에 태어났다. 가정 형편은 빈한했고 지도 제작 등에 필요한 지식 등에 비추어 볼 때 몰락한 잔반(殘班)이나 중인으로 추정된다.[2]
언제 한양으로 이주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주한 뒤에는 남대문 밖 만리재에 살았다고 한다. 이는 김정호와 안면이 있는 한세진의 대인(對人) 증언을 근거로 한다.[3] 반면 동아일보 1925년 10월 9일자 기사에서는 그의 유허(遺墟, 옛 집터)가 남아 있는 남문 밖 약현에 기념비를 세우려 했음을 밝히고 있다. 서대문 밖 공덕리에 살았다는 설은 남대문 밖 공덕리를 잘못 설명한 듯이 보인다. 아무튼 만리재·약현·(남대문 밖) 공덕리는 김정호가 편찬한 지도와 지지에서 살펴보면 서로 가까운 곳에 있다.
동관(童冠)의 나이 때부터 지도와 지지에 관심을 가졌다[4] 고 최한기가 쓴 〈청구도〉 제문(題文)에 나타나 있다. ‘동관’은 18세나 19세로 추정한다.
1834년(순조 34년)에 지지 《동여도지》를 제1차 편찬하였고, 그 부도에 해당하는 지도 〈청구도〉도 펴내었다. 그 뒤 1851년(철종 2년) 무렵에 지지 《여도비지》를 편찬하였고, 1856년(철종 7년) 무렵에는 지도 〈동여도〉를 편찬하였다.
1861년(철종 12년)에는 앞서 만든 〈청구도〉와 〈동여도〉를 보완하여 〈대동여지도〉를 편찬한 뒤 1866년(고종 3년)까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착오를 정정하고 보궐(補闕)하기 위해 32권 15책의 《대동지지》를 편찬하며 살다가 그해에 남대문 밖 약현에서 폐질환으로 죽었으리라 여겨진다.
김정호의 사상
김정호는 자신에 대한 글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그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글은 《지도유설》과 《동여도지》 서문인데, 둘 다 김정호가 쓴 글이다. 다만 《지도유설》은 김정호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생각을 듣고 정리하여 쓴 글이며, 《동여도지》만 김정호의 사상을 나타낸 글이다. 《동여도지》에 나타난 김정호의 사상이나 역사지리 인식은 다음과 같다.
김정호는 지도(地圖)와 지지(地誌)가 서로 불가분의 관계라고 인식하였다. 지도로써 천하의 형세를 살필 수 있고 지지로써 역대의 제도와 문물을 헤아려 볼 수 있으므로 지도와 지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위국(爲國) 곧 치국(治國)의 대경(大經)이라고 지도와 지지의 관계를 강조하였다.
지도와 지지가 위와 같이 중요함에도 단기(檀箕; 단군과 기자) 이래로 지도가 없고 지지는 《삼국사기》에 이르러 비로소 만들어졌기 때문에 지지의 첫머리에 신라 이전의 사항을 두어 알게 하였다. 조선에 들어서는 초기에 《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되어 비로소 도적(圖籍)이 환연해졌지만, 김정호가 사는 때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편찬된 지 3백여 년이 지나 지리 정보에 차이가 많아졌으므로 이를 바로잡으려고 《동여도지》를 만들었다. 이에 따라 편목이나 구성이 《동국여지승람》의 구성과 비슷하다.
김정호는 또한 지도와 지지의 제작이 치국의 대경이라는 자신의 주장대로 치국경제에 유용하도록 《동여도지》 등을 제작할 때 문교무비(文敎武備)에 해당하는 관방과 역참, 학교와 서원 등 42개 편목을 자세히 설명하거나 표기하였다.
김정호와 관련한 오해
김정호의 전국 답사설
틀:위키문헌 김정호의 대작은 1861년에 제작한 대동여지도이다. 김정호는 조선의 지리를 연구하고 지도를 제작하기 위해 직접 조선 전역을 답사하였다고 알려져 있으나,[5] 일부 학자들은 김정호가 직접 탐사하여 지도를 그리지 않았다고 주장했고[6][7] 김정호가 해당 지역의 관찬 지도와 '가장지도'(家藏地圖)를 참고하였음을 근거로 들었다. 가장지도란 각 지역 유력 집안에서 사사로이 만든 지도로, 대체로 그들 소유의 임야나 농경지를 표시하고 있으며, 그 정확성은 관찬 지도에 못지않았다.[7]
또한 유재건의 《이향견문록》에서 “(김정호가) 여지학(지리학)을 좋아하여 깊이 고찰하고 널리 수집하여…”[8] 라는 구절은 답사에만 의존하지 않았을 가능성을 시사하며, 정상기·최한기·신헌 등도 전국을 답사하지 않고 기존의 지도를 두루 모아 집대성했음을 밝히고 있다. 프랑스의 지도 제작자인 당빌 역시 프랑스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음에도 당시로는 가장 정확한 세계지도를 만든 것과 비슷한 예다.
애초에 국가 단위의 지도를 개인이 오로지 답사에만 의존해 제작했단 자체가 넌센스이며, 과거 민족사관에 힘입어 부각되고 조명된 여러 역사인물들이 그러했듯 민족적 긍지를 드높이기 위한 차원에서 김정호 역시 백두산을 수차례 오르고 전국을 낱낱이 답사해 지도를 만들었단 식으로 다소 과장되고 미화된 것으로 보인다. 허나 제작자가 서로 다른 수많은 지역도를 모아 집대성한 것만으로 그만한 정확도를 갖추긴 어려웠을 것이고 이전 지도보다 개선되었음을 감안할 때, 일관성 있는 편집 및 검증 차원에서라도 어느 정도의 면밀한 답사는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김정호 옥사설
김정호는 1866년경에 죽었는데, 이에 대해서 흥선대원군이 김정호를 이적행위자로 몰아 옥사시켰다는 주장이 있으나,[5][9] 이는 식민사관을 가진 일본의 엘리트 역사학자들이 흥선대원군을 새로운 문물 흡수를 거부하는 폐쇄적인 인물로 인식시키고, 한민족에게 훌륭한 인물을 스스로 죽였다는 거짓 역사관을 가르쳐주기 위해 알려준 역사라는 주장도 있다.[6] 1934년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어독본에는 '흥선 대원군은 완성된 지도가 외국에 알려질 경우를 두려워하여 수십 년 고생하여 만든 목판을 불태워 버리고 김정호와 그의 딸을 함께 옥사시켰다'고 기술하였다.[10] 그러나, 흥선대원군의 측근인 신헌 등이 김정호의 오랜 지기였음이 밝혀졌으며, 또한 그들이 벌을 받지 않았음이 밝혀져 이 주장에 신빙성을 더하고 있다.[11]
더구나 김정호가 만든 지도나 펴낸 지지가 손상되지 않은 채 오늘날까지 남아 있고(일부는 멸실되었다), 압수하여 불태워 버렸다는 지도의 판목이 남아 있으며[6][12][13], 그와 교유했던 최한기나 후원자였던 신헌은 처벌 받은 기록이 없다. 유재건의 《이향견문록》에도 죄인이 수록되지는 않았으리라 보이며, 김정호의 죽음을 '몰'(沒; 죽다)로 표현하고 물고(物故; 죄인이 벌을 받아 죽다) 등으로 적시하진 않았다.[6] 또한 《고종실록》·《승정원일기》·《추국안》 등의 사료에도 김정호가 투옥된 기록은 없다.[13] 게다가 최근 연구에서 신헌 등이 비변사와 규장각의 지도를 김정호에게 제공한 것으로 추측되는지라 김정호의 지도 제작을 사실상 조선 정부에서 지원했다는 주장도 있다.[6]
김정호의 〈지구전후도〉 중간설
한때 〈지구전후도〉 중간자가 김정호라는 설이 퍼졌다. 이에 따라 태연재(泰然齋)가 김정호의 당호라는 설도 퍼졌다. 그러나 나중에 이규경이 쓴 백과사전 《오주연문장전산고》의 지구도변증설(地球圖辨證說)에서는 〈지구전후도〉 중간자를 최한기라고 적고 있음이 밝혀졌다.
지도와 지리지
김정호가 편찬한 지도와 지리지는 다음과 같다.
- 1834년(순조 34년) : 지지 《동여도지》 제1차 편찬 / 지도 〈청구도〉
- 1851년(철종 2년)부터 1856년(철종 7년) 사이 : 지지 《여도비지》
- 1856년(철종 7년)부터 1861년(철종 12년) 사이 : 지도 〈동여도〉
- 1861년(철종 12년) : 지도 〈대동여지도〉
- 1866년(고종 3년) : 지지 《대동지지》(1864년 편찬설이 있음)[14]
- 〈지구전후도〉(地球前後圖) : 최한기가 펴냈으며, 김정호가 판각하였다.[15]
위에서 〈청구도〉·〈동여도〉·〈대동여지도〉와 《동여도지》·《여도비지》·《대동지지》를 ‘김정호의 3대 지도와 3대 지지’라고도 부른다.
기타
함께 보기
참고 자료
생애
경기도 김포에서 태어난 조헌은 5살 때에 글을 읽는 등 어려서부터 자질이 뛰어나고 효성이 있고 유순했다. 집은 가난하였으나 12세 때부터 김황(金滉)에게 시와 글을 배워 1565년 성균관에 입학하였고, 1567년(명종 22년)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관에 속하였다. 이후 정주(定州)교수로 3년간 있으면서 그곳 선비의 풍속을 일신시켰다. 파주 교수로 옮겨 성혼을 찾아 가르침을 청하니 성혼은 사양하면서 감히 사제 간의 예로 대하지 않았다.
1572년(선조 5년) 홍문관 정자(正字)로 왕의 불공이 옳지 않음을 말하다가 파면되었다. 1574년 질정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그곳의 문물과 제도의 따를 만한 것을 조목별로 적어 《동환봉사》(東還封事)를 내놓았다. 후에 박사(博士), 호·예 2조 좌랑, 전적(典籍), 감찰 등을 거쳐 경기도 통진(通津) 현감으로 다스리다가 법을 어긴 궁노비를 취조 중 장살(杖殺)하고 부평에 귀양 갔다. 1581년에 공조 좌랑에 임명되었고, 전라도사로 나가 소를 올려 연산군 때의 공안(貢案)이 민폐가 되므로 개혁할 것을 청하고 이율곡 등의 선비들과 친분을 유지하였다.
1582년에는 보은 현감으로 소를 올려 노산군(단종)의 후사(後嗣)를 세울 것과 사육신의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할 것을 청했으나 모함을 받아 파면되었다. 1586년 조정에서 학제(學制)를 수정하고 각도 제독(提督)을 창설할 때 공주(公州) 제독이 되어 선비의 규율을 엄하게 하고 앞장서서 실천하니 찾아드는 선비가 많았다. 이때 또 소를 올리는 한편 정여립의 행패를 따지고 공격하였으나 관찰사가 화를 두려워하여 여러 번 물리치므로 벼슬을 내놓고 옥천(沃川)으로 돌아갔다. 1589년에는 대궐에 엎드려 소를 올려 시정(詩政)의 장단점을 철저히 논하였는데 광론(狂論)이라 하여 삼사의 배척을 받고 드디어 길주(吉州)로 귀양 갔으나 그해 겨울 정여립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앞날을 내다보는 지혜가 있다 하여 석방되었다. 이렇듯 조헌은 철저한 유교적 입장에서 많은 개혁안을 상소하고 정론(正論)을 폈다.
1591년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게이테쓰 겐소(景轍玄蘇) 등을 보내와서 명나라를 칠 것을 전달하여 임금과 신하가 머뭇거리고 있을 때 상소를 올려 겐소 등을 죽일 것을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상경하여 왜군을 대비할 책을 상소했으나 정부에서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시골에 내려가 왜란에 대비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호남의 고경명, 김천일, 영남의 곽재우, 정인홍과 함께, 호서에서 최초로 의병을 일으켰다.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조헌은 보은으로 가는 통로를 차단하였으나 순찰사 윤선각(尹先覺) 등의 시기로 홍성 지방에 옮겨가서 또 의병 천여 명을 모집했다. 이때 왜군은 청주에서 진을 치고 있어 관군이 여러 번 패하였는데, 승장(僧將) 영규와 함께 청주성을 수복하여 충청도 공략의 본거지를 탈환하는 등 전과를 세웠다.
곧이어 의주로 북상하기 전에, 관군의 시기와 방해로 흩어지고 남은 700명의 의병을 이끌게 되었다. 그때 당시 금산(錦山)의 왜군이 충청도 일대로 세력을 넓힐 기세라는 소식을 듣고 그 길로 영규와 함께 금산을 향해 가서 왜군에게 함락된 금산의 10리 밖에 이르렀다. 당초 호남 순찰사 권율과 합세하여 적을 협공할 약속이었으나 권율로부터 그 기일을 미루자는 편지를 받은 상태였다. 그러나 왜군은 이미 조헌이 거느린 의병의 약점을 알고 역습해 왔다. 그의 군사는 역전 분투하여 왜군에게 많은 손해를 주었으나 많은 수를 대적하지 못하여 조헌과 7백의사가 전멸했다. 그러나 이를 통해 호남 방어의 근거지였던 금산을 회복하게 된다.
1604년(선조 37년)에 이조판서로 추증되고 1609년(광해군 1년)에 그의 사당에 '표충(表忠)'이라는 액이 하사되었으며, 1754년(영조 30년)에 영의정으로 추증, 문묘에 종사되었다.
원래는 문신이었다. 정여립과 대립으로 정치적으로는 정철과 함께 서인 측 강경파로 분류되었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의병장, 행동하는 선비로 길이 남게 된다.
전쟁 전에는 이이를 열렬히 숭배하는 서인 강경파이자[3] 전투적인 성질로 유명했고 이이의 제자였다가 이이를 비판하고 동인으로 전향한 정여립을 맹렬히 비난했다. 관직에 있다가 자기 의견이 안 받아들여진다 싶으면 물러나면서도 물러난 이후에도 계속 정치 현안에 대한 상소를 올리는 등 독한 면모를 지니고 있어서, 선조가 "조헌 이 자는 서인 놈들 중에서도 간귀이니 앞으로도 마천령을 넘게 될 것이다(=유배 보낼 것이다.)."라고 깔 정도였다. 임진왜란이 터지기 전에는 서인 내 주전론자의 중심이었고, 전쟁을 대비하자는 상소를 자주 올렸다.
또한 상소를 올릴 때 도끼를 함께 가져가거나 머리를 여러 번 땅에 치는 등 상소를 강경하게 올리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이렇듯 도끼를 들고 가서 상소를 올리는 일이 바로 '지부상소'(持斧上疏)', 이른 바 '도끼 상소'라 알려진 것이다. 요컨대, 상소를 가납하지 않을 것이라면 차라리 가져간 도끼로 자기를 찍어 죽이라는(!!) 것. 상소를 올릴 당시에는 허세로 보였을지도 모르겠지만, 후에 이 양반이 하는 일을 본다면 아마 이건 진담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흠좀무. 조헌의 이 지부상소는 후대에도 일부 양반, 유생들이 따라 행한 바가 있다. 대표적으로 숙종조의 윤지완, 고종조의 최익현 등이 있다. 이러한 지부상소를 두고는 호의적인 평을 하는 사람도 있었던 반면 무례한 일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존재했다. 가령 심노숭이라는 양반이 쓴 '자저실기'에서는 조헌 때문에 임금 앞에서 도끼 들고 함부로 설치는 못된 풍조가 생겨났다는 투로 지부상소를 비판하고 있다.
낙향한 후에도 지방관을 하는 친구들에게 편지를 보내서 전쟁에 대비할 것을 촉구했지만 다들 무슨 마약하시길래 이런생각을 했어요라고 비웃었다. 오로지 연안성을 지키던 신각 장군만 그의 말을 옳게 여겨서 성을 정비했고, 이는 나중에 이정암이 연안성에서 일본군에 맞서 승리를 거두는 밑거름이 된다. 신각은 약탈하던 일본군 수십명을 임진강 어귀에서 섬멸하여 조선군 사상 첫 승리를 거두었지만 도원수 김명원이 사실관계를 파악 않고 장계를 올리는 중대한 실수를 하여 적전도주 죄목으로 목이 잘리는 어처구니없는 운명을 맞이한다.
각설하고 그가 우려했던 것처럼 임진왜란이 일어났으며, 조선군은 일본군을 감당하지 못했다. 자신의 경고가 현실이 된 상황에서 조헌은 이제 의병으로 전쟁터에 뛰어들 결심을 했다. 입만 놀리는 주전론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조헌은 1592년 5월, 옥천에서 병력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다. 문인 이우·김경·전승업 등의 도움으로 160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는 데 성공하고 7월 초부터 본격적인 의병활동을 전개했다. 당시 조헌은 “귀신과 사람이 다 같이 증오하는 것은 도적이라. 화살이 이 원수들에게 함께해 그들의 고향 땅에 돌아가지 못하게 하리라. 뜻을 굳게 먹는다면 귀신이 감동하고 백성들이 따라나서며, 일을 이루려고만 한다면 천지만물도 도우리라”라는 격문을 써 의병을 모집했다.
조헌은 전라도 의병장 고경명이 1차 금산 전투에서 전사하자 청주성 탈환을 계획했다. 관군 및 영규대사가 이끄는 1000 승병과 합세해 청주를 탈환하였고 전라도로 향하는 왜군을 막기 위해 7백 의병을 거느리고 코바야카와 타카카게가 이끄는 1만 5천 왜군과 2차 금산 전투에서 분전[4]하다가, 아들인 조극관과 영규의 800 승군을 비롯한 전 의병들과 함께 장렬히 전사하였다. 야사에 의하면 비록 패했지만 이들이 죽기살기로 저항했기에 왜군도 수천여명이 죽을 정도로 피해가 커서 우두머리를 난도질했는데, 아들인 조극관을 우두머리로 알고 난도질을 했다고 한다 이들의 분전으로 왜군은 피해를 추스려야 했기에 호남 곡창 지대 방어에 큰 기여를 했다.
다만 금산 전투 항목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실제 일본군 사상자가 얼마나 되는지는 좀 의문이다. 일방적으로 당한 것에 가깝기 때문. 이치 전투 항목에 적혀 있는 것처럼 이치 전투가 웅치 전투보다 일정 정도 시간이 지나서 다시 벌어진 것이라면, 웅치 전투, 이치 전투, 2차 금산 전투의 시간순부터 애매해진다. 이치=웅치->금산이 아니라, 웅치 이후에는 순서가 불분명해지기 때문. 일본군이 조헌을 털어버린 다음에 다시 전주로 진격해서 이치 전투가 벌어졌을 가능성 마저 존재한다. 이 상황이라면 실질피해는 크지 않았을 듯 뒤에 조선군은 반격으로 금산을 탈환하게 된다.
율곡 이이의 제자이기도 했는데, 이이의 제자 중 가장 뛰어났다라는 이야기도 있다.
1조헌의 일생 1544(중종 39)∼1592(선조 25). 조선의 문신이자 의병장이다. 어릴 적부터 강직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으며 학문에 대한 자세도 남달랐다. 당시 정치의 잘못된 점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상소를 자주 올렸다. 일본이 접촉해오자 관계를 끊을 것을 강경히 주장했고, 전쟁이 일어나자 곧 의병을 일으켰다. 승장 영규와 함께 청주성을 탈환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후 관군의 견제로 남은 7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금산으로 향해 일전을 벌였고 장렬히 전사했다.
2시대적, 가문적 배경
선조대는 퇴계 이황(李滉)과 율곡 이이(李珥)가 국왕으로부터 스승대접을 받았으며, 사림들이 본격적으로 조정에 진출하여 그들의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하던 시기였다. 또한 성리학이 성숙하면서 학파도 갈리어 정파로 이어졌고, 그들 간의 갈등도 표면화되던 때였다.
본관은 배천(白川)이다.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峯)·도원(陶原)·후율(後栗)이다. 김포에서 태어났다. 증조부는 황(璜), 조부는 세우(世佑), 부친은 응지(應祉)이다. 어머니는 차순달(車順達)의 딸이다. 처의 부친은 신세함(辛世諴)이다. 이이· 성혼(成渾)의 문인으로서 서인으로 분류된다.
3유년기의 조헌
조헌은 어려서부터 부모를 공손히 섬겼다.
계모가 그를 매정하게 대우하여 외조모가 험담을 하였는데, 몇 달 뒤에야 가서 외조모를 뵈었다. 외조모가 왜 오랫동안 오지 않았느냐고 하자 ‘지난번에 우리 모친의 일을 말씀하셨는데 자식이 된 입장으로서는 차마 듣지 못할 것이었기 때문에 오래도록 오지 못했을 뿐이다.’ 하였다. 외조모가 부끄럽게 여기며 감복하고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조헌이 정성을 다하여 계모를 섬기자 계모도 감동하여 이 아이가 참으로 내 아들이며 다른 사람이 대신해 낳았을 뿐이라고 했다한다. 상세정보
12세에 비로소 김황(金滉)으로부터 학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부친 조응지는 김포현의 교생이었는데 농사를 짓고 살았다. 가난하였으나 겨울에도 헤진 옷과 신으로 추위를 견디며 글을 배웠으며, 밭농사를 돕는 중에도 근처에 책을 두고 쉴 때마다 읽었다고 한다.
4관직생활
1565년에 성균관(조선)(成均館)에 들어갔다. 성균관 유생들과 더불어 보우(普雨)를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다. 1567년에 병과 제9인으로 급제했다. 교서관(校書館) 부정자(副正字)가 되었다. 1570년에 파주목 교수에 임명되었다. 성혼에게 학문을 청하였고, 이듬해 이이를 만났다. 관직활동 초반부터 강직한 상소를 자주 올려 국왕의 노여움을 사기도 했으나, 때문에 조정의 동료 뿐 아니라 백성들로부터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1574년 성절사(聖節使)의 질정관(質正官)으로서 정사 박희립(朴希立), 서장관 허봉(許篈)과 함께 명나라 북경에 파견되었다. 8월 북경에 도착하였고 조회에 참석하였다. 8월17일에 황극전(皇極殿)에서 열린
명나라 시기 자금성의 주 건물로 청나라 때 태화전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화재를 입어 수리를 하기도 했다. 조선에서는 위로의 말을 올렸다. 상세정보
만력제 신종의 성절하례식(聖節賀禮式)에 참석했다. 황제가 아침에 황극전에 나와 앉아 축하를 받았다. 조선사신 일행은 아침일찍 장안문과 통정문을 통해 들어가 기다렸다. 유생들이 와서 고려인이냐고 물어서 ‘고려는 전대이고, 지금은 조선이다’라고 했다. 황제가 나와 앉자 수많은 관원들이 일제히 의식에 따라 장엄한 축하예를 올렸다. 상세정보
국자감과 문묘를 방문하였고 예부에 글을 올려 문묘의 위차에 대해 질문하기도 했다. 조헌은 예부제독 회동관주사에게 글을 올려 주돈이·정호·정이·주희의 위차가 낮은 이유, 공백료 등이 언제 어떻게 파출되었는지, 등등 위차의 상하관계와 문묘에 들지 못한 이유 등에 대해 질문했다. 상세정보
한편으로 양명학이 유행하는 명나라의 학문 현실에 실망하기도 했다. 조헌과 허봉은 명나라 사람을 만나 명나라 학자들의 왕양명에 대한 평가를 물어보았고 그를 비판하기도 했다. 상세정보
11월에 조정에 돌아와 8개조의 상소를 올렸다. 〈質正官回還先上八條疏〉 명나라의 의례, 풍속 등에 대한 최신의 상세한 보고였다. 조헌은 명나라의 문묘배향, 의관(衣冠) 제도, 음식과 연향, 사대부들의 인사예절, 스승과 제자의 예법, 지방의 풍속, 군대의 기강 등에 대해 보고를 올렸다. 상세정보
1575년부터 호조좌랑·예조좌랑 및 성균관전적·사헌부감찰을 거쳐, 경기도 통진현감으로 있을 때, 횡행하는 내노(內奴) 행위를 엄히 다스리다가 죽인 죄로 탄핵을 받아 1577년 부평으로 귀양 갔다가 3년 만에 풀려났다. 이이를 찾아가 몇 달 동안 학문을 배웠다. 동인이었던 이발(李潑), 김우옹(金宇顒) 등과 사이가 벌어졌으며, 이이에게 사론의 분열을 아쉬워하는 시를 올렸다,
공주 교수로 재직하던 1586년과 1587년 정여립(鄭汝立) 등의 흉패한 모의와 간사한 무리를 논박하는 만언소를 지어 올렸다. 당파의 옳고 그름과 정치 풍토의 폐단을 비판하는 장문의 상소. 당시 정치 현황 속에서 서인을 옹호하고 동인을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정여립은 이발, 이길과 함께 스승을 배반한 자로 맹비난하였다. 상세정보
수차례 상소 하였으나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옥천으로 귀향하여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일생을 마치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5일본과의 접촉을 배격하다
이해에 일본에서 사신을 보내 통신사를 요청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한 후, 쓰시마를 시켜 조선의 사신을 일본에 불러오기를 요구했다. 1587년부터 요구가 시작되었고, 조선 조정 내에서는 파견여부를 두고 많은 논의가 펼쳐졌다. 상세정보
조헌은 일본사신을 배척하고 일본과의 관계를 끊을 것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제 임금을 시해하고 왕위에 오른 자이니 의리를 들어 이들의 요청을 거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사신을 구류하고 찬탈을 모의한 자의 머리를 베어 명나라에 보내고, 다른 종자들은 일본으로 돌려보내 일본으로 하여금 예의를 알게 하자고 하였다. 상세정보
1589년에는 시폐를 극론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함경도 길주 영동역으로 귀양을 가기도했다. 백성이주의 문제와 그의 주된 원인인 부역과 조세제도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이산해, 윤탁연, 김응남, 유성룡 등을 비난하였다. 상세정보
조선은 1590년에 통신사(通信使)를 일본에 보냈다. 통신사가 돌아온 후 1591년 조헌은 일본사신 현소(玄蘇)를 목 벨 것을 요청하였으며, 조선의 통신사가 일본을 다녀온 후, 일본의 침략의도가 전국에 퍼져나갔다. 조헌은 빨리 일본사신의 목을 베어 명나라 조정에 보내는 한편 류큐(琉球) 등 이웃나라에 침략위협을 알려 함께 일본에 대응하자는 의견을 올렸다. 상세정보
이 외에도 명나라에 보낼 글, 류큐(琉球)와 쓰시마(對馬島), 일본유민 등에게 보낼 글, 영호남지역의 일본방비책 등에 대한 상소를 연이어 올렸으나 답을 듣지 못했고, 결국 옥천으로 돌아왔다.
6임진왜란의 발발과 의병활동
1592년 4월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발하자, 6월에 의병을 일으켰다. 문인인 이우(李瑀), 김경백(金敬伯), 전승업(全承業) 등과 각지에 의병참여를 호소하였고 사람들이 모였다. 지방관들의 방해가 있자, 자신을 따르는 전참봉 이광륜(李光輪), 선비 장덕개(張德盖), 신난수(申蘭秀), 고격우(高擎宇), 노응탁(盧應晫) 등과 다시 의병을 모집했고 모여든 사람이 1,600명에 이르렀다. 7월 5일 웅진에서 군사들과 국난극복과 진격을 맹세했다.
몰래 군대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 우리를 침략한 왜적은 우리의 원수이다. 왜적을 물리치고자하는 사람들이 떨쳐 모였다. 나를 의병장으로 삼으니 감히 의병을 규합하여 이 자리에서 맹세한다. 죄 없는 백성들을 구하고 한 사람의 왜적도 돌아가지 못하게 할 것이니 하늘은 도와주길 바란다는 내용이다. 상세정보
의병을 이끌고 회덕(懷德)으로 진군했다. 앞서 호남의병장 고경명(高敬命)과 금강 중류인 형강(荊江)을 건너 일본군을 무찌르기로 하였으나 고경명은 이미 1차 금산성 전투에서 전사한 뒤였다.
고경명이 의병 6~7천을 데리고 북상하다가 일본군이 호남을 침입한다는 소식을 듣고 우선 이를 막기로 하였다. 일본군은 금산성에 진을 치고 있었다. 고경명이 방어사 곽영과 금산성 밖에 진을 쳤다. 전투가 시작되어 성을 공격하였는데, 적이 관군의 진이 약한 것을 알고 공격했고, 선봉장이 도망치면서 전열이 무너졌다. 고경명 등이 의병장들이 모두 전사했다. 상세정보
고경명을 위한 추도시를 지었다.동녘 땅 용맹스런 백만 정병이, 이 어려움을 구할 방법이 없을 것인가. 형강으로 기약한 사람 어디로 가버렸는지. 가을바람 노를 치며 혼자만 건너간다. 상세정보
일본군이 청주를 점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조헌은 승장 영규(靈圭)의 군대와 연합하여 8월1일 청주성을 탈환했다. 이후 전투결과를 전승업과 아들 완도(完堵)를 시켜 당시 선조가 머물던 의주의 행재소에 보고하였다.
조헌이 청주성을 탈환한 후 조정에 상소를 올려 보고를 하는 한편, 전쟁이 일어나게 된 시폐에 대해 논했다. 전투 후 남은 700명의 병사를 데리고 영규와 함께 금산으로 향했다. 상세정보
8월15일 조정에서는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을 토벌하는 것을 가상히 여겨 봉상시첨정(奉常寺僉正)의 벼슬을 내렸다.
관군의 방해로 흩어지고 남은 700명의 의병을 이끌고 8월16일 영규의 군대와 함께 청주를 떠나 금산으로 전진했다. 이때 전라도 순찰사 권율(權慄)은 18일자로 약속된 금산성 공격 날짜를 미루자고 하였으나 조헌은 이에 따르지 않고 금산으로 진격했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의 일본군은 후속부대가 없다는 것을 알고 교대로 공격해왔고, 조헌의 700의병은 수에서 밀려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이것을 2차 금산성 전투라고 부른다.
조헌은 700명의 군사만을 이끌고 금산을 공격하려 했다. 권율과 허욱이 만류하며 공격일자를 미루자고 했으나 거부했다. 금산성 밖에 진을 치고 죽음을 각오하고 전투에 임했다. 아들 조완기(趙完基)도 함께 전사했다. 동생 조범(趙範)이 시신을 거두었다. 상세정보
10월에 조정에서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 겸 동지경연 의금부 춘추관사(吏曹參判兼同知經筵義禁府春秋館事)를 증직하였다. 조헌과 김제갑, 남정유, 승장 영규를 증직하였다. 상세정보
1593년 11월에 광해군이 아들 완도를 불러 포상하고 황신(黃愼) 등을 보내 치제하였다. 1604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으로 책록되고, 1734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1883년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1971년에 금산의 순절지 칠백의총이 성역화되었다. 문집으로 〈중봉집〉이 있다.
본관은 백천(白川)이며 중종 39년(1544) 6월28일 김포군 감정리에서 부친 응지와 모친 용성 차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도원·후율이라 했고, 임진왜란때 의병장으로 활약하였기 때문에 시호를 문열이라 하였다. 1565년(명조 20) 성균관에 진학하였으며 24세가 되던 해 문과에 급제하여 잠시 교서관의 부정자직에 있다가 곧 경주, 파주, 홍주의 교수를 역임하였다. 조헌은 파주목의 교수로 있을때 성혼, 이이와 교류했으며, 이로 말미암아 그는 서인으로 지목되었고, 그의 생애에 많은 영향을 끼쳤었다.
1548년(명종 3년) 어느 봄날 김포군 서감정리의 큰 길가에 있는 한 정자에서 마을 아이들이 모여 천자문을 읽고 있었다. 때마침 정자 아래의 대로에 위의(威儀)를 갖춘 높은 벼슬아치의 행차가 지나가다 글을 읽던 아이들이 다투어 이 요란한 행차를 구경하려고 달려나왔다. 그러나 이제 겨우 다섯살이 된 어린아이만은 그대로 앉아 글을 읽고 있었다. 지나가던 벼슬아치가 이를 보고 기특히 여겨 정자에 올라가 "다른 아이들은 모두 나의 행차를 구경하는데 너만은 왜 그냥 있느냐?" 하고 물었더니 "오로지 글 읽기에만 마음 쓰라는 아버지의 말씀이옵니다"라고 의젓이 대답하는 것이었다. 이에 감복한 벼슬아치는 그 아이의 아버지를 만나 "우리나라에 참다운 학자가 또 하나 나오게 되었습니다"하고 칭찬하면서 극진한 예를 올리고 떠났다 한다.
11572년(선조 5)교서관 정자로 있을 때, 왕이 절에 향을 내리는 것을 반대하다 파직되었다가 곧 저작에 등용되고 1574년(선조 7) 성절사 박희립을 따라 명에 질정관으로 다녀왔다. 그 후 호조·예조의 좌랑, 감찰을 거쳐 통진 현감이 되었으나 죄인을 장살한 일로 탄핵되어 2년간 부평에 유배되었다. 1581년 공조좌랑·전라도 도사·종묘서령을 지내고, 1582년 부모 봉양을 위해 보은현감으로 나갔다.
조헌이 이끄는 의병이 최초로 왜군과 싸운 것은 8월1일 청주전투였다. 청주로 가서 죽음으로 싸움을 결심한 의병들과 승병장 영규대사와 함께 싸움에 임하였다. 죽음을 각오한 의병에게 두려움이 있을 수 없었다. 이런 자세로 싸우니 왜적이 성안으로 도망가는 것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대장이 되어 기개를 마음대로 펴보았던 조헌은 마침내 금산 벌판에서 49세를 일기로 장렬한 죽음을 맞이 하였다. 조헌의 시신은 옥천으로 옮겨져서 장례를 지냈고, 이해 12월에 무계 성혼의 상소에 의하여 조정에서는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경영춘추관 의금부사의 벼슬을 추증했고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는 선무원종 일등공신에 봉하였으며 그 부친과 함께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그의 묘소는 옥천군 안남면 도농리에 있다. 1656년 신도비를 세웠는데 청음(淸陰) 김상헌이 글을 짓고 동춘당(同春當) 송준길이 글씨를 썼다. 중봉의 묘소가 현재의 장소로 옮겨진 것은 그가 죽은지 44년만에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이 아늑한 곳을 택하여 편히 모시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옥천의 표충사, 금산의 성곡서원, 보은의 상현서원 등에서 그의 충절을 받들어 제향하고, 금산에는 비를 세웠으며 7백의총이 있다. 그의 저서로는 『중봉집』『중봉동환봉사』가 있다. 그는 고경명, 김천일, 곽재우와 함께 임진사충신의 한 사람이다.
연보
저서
상훈과 추모
작품
池塘에 비 뿌리고 楊柳에 내 끼인 제 沙工은 어디 가고 빈 배만 매였는고 夕陽에 짝 잃은 갈매기는 오락가락 하더라
평가
유학자로서의 면모는 아래와 같다.
1572년(선조 5년)에 왕의 불공(佛供)을 반대하다가 파면되었다. 1574년 질정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그곳 문물제도 중 따를 만한 것을 적어 《동환봉사》(東還封事)를 내놓았다. 1581년(선조 14년) 공조좌랑에 임명, 전라도사로 나가 연산군 때 정해진 공안(貢案)의 개혁을 청하였다. 1582년 보은현감으로 소를 올려 단종의 후사(後嗣)를 세울 것과 사육신의 정문을 세워 표충할 것을 청하였다. 1589년 대궐에 엎드려 시정(時政)의 득실을 극론(極論)하다가 귀양갔다. 1589∼1591년 도요토미(豊臣秀吉)가 보낸 사신을 죽일 것을 청하고 왜적 대비책을 상소하였으나 거부되었다. 금산 전투에서 700의사(義士)와 함께 전몰하니 그 충성심은 길이 추앙받았다. 고경명·김천일·곽재우와 함께 임진 4충신(壬辰四忠臣)의 한 사람이다.
민족기록화와의 연관성
최대섭의 1979년 민족기록화 작품 최대섭-화포와 화약을 제조하는 최무선의 중심 인물로 등장한다.
고려 말 왜구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적극적으로 화약을 비롯한 무기 연구 및 제조에 힘썼으며, 우리나라 무기제조사와 전쟁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이향견문록에서의 김정호
노드 및 관계
노드 | 관계 | 노드 | 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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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 | isTheSubjectOf | 김태-김정호의 대동여지도 | 김태-김정호의 대동여지도는 김정호를 소재로 그려진 민족기록화이다. |
김정호 | creates | 대동여지도 | 대동여지도는 김정호에 의해 제작된 기록이다. |
김정호 | isMentionedIn | 이향견문록 | 이향견문록은 김정호가 언급된 기록이다. |
김정호 | isMentionedIn | 청구도제 | 청구도제는 김정호가 언급된 기록이다. |
김정호 | isMentionedIn | 금당초고 | 금당초고는 김정호가 언급된 기록이다. |
김정호 | creates | 청구도 | 청구도는 김정호에 의해 제작된 기록이다. |
김정호 | isMentionedIn | 오주연문장전상고 | 오주연문장전상고는 김정호가 언급된 기록이다. |
김정호 | hasFriendshipWith | 최한기 | 최한기는 김정호와 친분관계가 있는 인물이다. |
김정호 | hasFriendshipWith | 김정희 | 김정희는 김정호와 친분관계가 있는 인물이다. |
함께 보기
- 《왕의 여자》 (SBS, 2003년, 배우:한상혁)
- 《징비록》 (KBS1, 2015년, 배우:강인기)
- 칠백의총
- 금산 전투
- 중봉 조헌 신도비
- 이이
- 정철
- 성혼
- 안방준
- 김장생
- 김자점
-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 안코쿠지 에케이
- 우저서원(牛渚書院)
참고문헌
각주
- ↑ 김양선(金良善)의 주장.
- ↑ 청도 김씨 대동보에 따르면 청도 김씨 봉산파는 현재 한국 전쟁으로 실계(失系; 가계가 끊김)되었으며, 한국 전쟁 이전에 편찬된 예전 족보에도 김정호는 실려 있지 않다. 이를 근거로 김정호의 집안이 청도 김씨 봉산파이기는 하나 매우 한미한 집안이었음을 추측된다.
- ↑ 정인보(鄭寅普), 〈대동여지도〉, 《창원국학산고》 제2편 조선고서해제; 동아일보 1931년 3월 9일자와 16일자.
- ↑ 원문은 “金友正浩 年自童冠 深留意圖志”이다.
- ↑ 5.0 5.1 《글로벌세계대백과》, 〈실학의 융성〉, 김정호.
- ↑ 6.0 6.1 6.2 6.3 6.4 소준섭. 《조선인물실록 1》, 256~264쪽.
- ↑ 7.0 7.1 틀:서적 인용
- ↑ 유재건, 《이향견문록》, “癖於輿地之學 博攷廣蒐”.
- ↑ 《조선어독본(朝鮮語讀本)》제5권 4과.
- ↑ 역사를 새로 쓰게 한 발견 - 대동여지도 목판, 문화유산채널
- ↑ 또한 흥선대원군은 애로호 전쟁이나 두 차례의 강화도 군사분쟁 등 서구 열강의 쇄도가 동양을 죄어오는 문제에 대해서 경계를 하기는 했지만, 청나라에 다녀온 사신을 통해 서양의 회중시계를 구해오게 하여 그것으로 시간을 맞추며 알뜰히 썼던 일이나, 대동강에서 통상을 강요하면서 횡포를 부리다가 소각된 제너럴 셔먼호의 잔해를 수습하여 연구하라 명령한 일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새로운 문물 흡수에 적극성을 갖고 있었다.
- ↑ 〈대동여지도〉 등을 연구했던 김양선도 그 판목을 소유하였고, 국립중앙박물관에도 판목이 15매 남아 있다.
- ↑ 13.0 13.1 틀:서적 인용
- ↑ 인용 오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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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가 잘못되었습니다;kjh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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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자료
- 정명목 서용선 진행, 「작가와의 대담」, 『김태, 1952–1972』,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1996.
- “김정호, 20년 동안 골방에서 대동여지도 만들었다” - 김정호의 전국답사설을 비판하는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