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국의 편지"의 두 판 사이의 차이
(→부연설명) |
(→부연설명) |
||
28번째 줄: | 28번째 줄: | ||
==부연설명== | ==부연설명== | ||
− | + | [[김광찬]]의 아내인 [[진성이씨]]가 자결하려고 하자 시아버지인 [[김주국]]이 몸을 아끼고 후사와 가정을 생각하기를 타이르는 내용을 담은 편지이다. '수명의 장단이 정해져 있으니 인력으로도 못 하고 사생의 경중이 현현하니 일편되이 생각할 바가 아니다.', '가장(김광찬)이 남긴 유언이 범연하지 않거늘 네가 또 그리 하려 하니 어찌 그리 후일을 아니 생각하는가?', '청상과부 중에 실로 살아서 부질없는 이도 있지만' 과 같은 부분을 살펴보면 김광찬이 죽은 후 아내인 진성 이씨가 여러 차례 자진을 시도한 것을 알 수 있다. | |
+ | <!-- | ||
+ | 또 편지에는 '자녀, 특히 아들인 귀룡(김종수의 아명)을 잘 길러 가문의 재부흥을 도모하라'는 내용이 실려 있는데 이를 보아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 몸을 | ||
+ | --> | ||
<br/> | <br/> | ||
진성이씨의 자결 시도는 조선 후기까지 꾸준히 유지되어온 유교적 여성관이 드러난 것으로 열녀전의 전형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조선 후기 열녀전을 통해 유교적 여성관에 대한 교육이 이뤄지고 있었다. 열녀전 중 양반가 열녀의 입전 경우를 살펴보면 조상 중에 뛰어난 인물에 대해 설명하고 열녀의 정숙한 몸가짐과 남편이 죽은 후 정절을 지키기 위해 자결하거나 자결을 시도하지만 실패한 후 후사를 잘 기르고 시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와 같은 열녀전은 사회가 바라는 유교적 여성상을 내재화, 재생산하여 암묵적으로 조선 후기의 여성들에게 죽음이 권장되는 결과를 낳았다. <ref>홍인숙, 「朝鮮 後期 烈女傳 硏究」,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00 </ref> | 진성이씨의 자결 시도는 조선 후기까지 꾸준히 유지되어온 유교적 여성관이 드러난 것으로 열녀전의 전형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조선 후기 열녀전을 통해 유교적 여성관에 대한 교육이 이뤄지고 있었다. 열녀전 중 양반가 열녀의 입전 경우를 살펴보면 조상 중에 뛰어난 인물에 대해 설명하고 열녀의 정숙한 몸가짐과 남편이 죽은 후 정절을 지키기 위해 자결하거나 자결을 시도하지만 실패한 후 후사를 잘 기르고 시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와 같은 열녀전은 사회가 바라는 유교적 여성상을 내재화, 재생산하여 암묵적으로 조선 후기의 여성들에게 죽음이 권장되는 결과를 낳았다. <ref>홍인숙, 「朝鮮 後期 烈女傳 硏究」,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00 </ref> |
2017년 4월 23일 (일) 04:15 판
김주국의 편지 | |
영문명칭 | A letter of Kim Juguk to his daughter-in-law, Yi of Jinseong |
---|---|
작자 | 김주국 |
작성시기 | 1765년 |
소장처 | 의성김씨 학봉종택 |
유형 | 고문서 |
크기(세로×가로) | 35.0×53.0㎝ |
판본 | 필사 |
수량 | 1장 |
표기문자 | 한글 |
정의
1765년 6월 14일에 시아버지 김주국(金柱國)이 며느리 진성이씨(眞城李氏)에게 보낸 간찰(簡札)이다.
내용
1765년에 김광찬이 30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김주국은 진성이씨를 위로하고 손자를 당부하기 위해 이 편지를 작성하였다. 김주국은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인력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니 과도하게 슬퍼하여 건강을 잃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당부와, 남편의 유언을 받들고 어린 자녀를 잘 양육해야 할 막중한 책임이 있음을 강조하였다. 끝으로 가문의 존망이 진성이씨에게 달려 있으니 집안을 잘 보전하고 건강을 잘 돌보라는 내용으로 마무리하였다. [1]
부연설명
김광찬의 아내인 진성이씨가 자결하려고 하자 시아버지인 김주국이 몸을 아끼고 후사와 가정을 생각하기를 타이르는 내용을 담은 편지이다. '수명의 장단이 정해져 있으니 인력으로도 못 하고 사생의 경중이 현현하니 일편되이 생각할 바가 아니다.', '가장(김광찬)이 남긴 유언이 범연하지 않거늘 네가 또 그리 하려 하니 어찌 그리 후일을 아니 생각하는가?', '청상과부 중에 실로 살아서 부질없는 이도 있지만' 과 같은 부분을 살펴보면 김광찬이 죽은 후 아내인 진성 이씨가 여러 차례 자진을 시도한 것을 알 수 있다.
진성이씨의 자결 시도는 조선 후기까지 꾸준히 유지되어온 유교적 여성관이 드러난 것으로 열녀전의 전형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조선 후기 열녀전을 통해 유교적 여성관에 대한 교육이 이뤄지고 있었다. 열녀전 중 양반가 열녀의 입전 경우를 살펴보면 조상 중에 뛰어난 인물에 대해 설명하고 열녀의 정숙한 몸가짐과 남편이 죽은 후 정절을 지키기 위해 자결하거나 자결을 시도하지만 실패한 후 후사를 잘 기르고 시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와 같은 열녀전은 사회가 바라는 유교적 여성상을 내재화, 재생산하여 암묵적으로 조선 후기의 여성들에게 죽음이 권장되는 결과를 낳았다. [2]
퇴계의 후손으로서 평소 모범적인 여성의 몸가짐을 배우며 자랐을 진성이씨의 자진 행위에는 위와 같은 조선 후기의 열녀관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관련 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김주국 | 김주국의 편지 | A는 B를 저술했다 | 1765년 |
김광찬 | 김주국의 편지 | A는 B와에 언급된다 | |
김광찬 | 진성이씨 | A는 B의 남편이다 | |
김주국 | 김광찬 | A는 B의 어버이이다 |
시간정보
시간 | 내용 |
---|---|
1765년 | 김주국이 며느리에게 아들의 죽음을 위로하는 편지를 부쳤다. |
공간정보
위도 | 경도 | 내용 |
---|---|---|
36.609771 | 128.669643 | 의성김씨 학봉종택에 김주국의 편지가 소장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