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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嗚呼) 선생(先生)이시여! 이천인([[이천서씨]](利川人)으로 신라(新羅) 아간(阿干) [[서신일]](徐神逸)의 아들이로다. 천성(天性)이 청렴(淸廉)하여 학문(學問)을 좋아하고 기개(氣槪)가 과단(果斷)하고 문장(文章)이 수려(秀麗)하였도다. 일찍이 명필(名筆)로서 등용(登用)되어 문서(文書)를 초(草)하는 미관(微官)으로 진출하여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에 이르렀도다. 광종이 금주기(金酒器)를 하사(下賜)하니 신(臣)이 금주기를 쓰면 임금은 장차(將次) 무엇을 쓰시나이까 하고 받지 아니하니, 경(卿)은 능(能)히 보물(寶物)로써 보물을 삼지 아니하니 짐(朕)은 마땅히 경(卿)의 말로써 보물을 삼으리라 하였도다. 또 선생(先生)은 공(功)을 가려 상(賞)을 줄 것과 투화(投化)한 한인(漢人)들에게 신료(臣僚)의 집과 딸들을 빼앗는 것을 극간(極諫)하여 중지(中止)케 하였도다. 정치(情致)에는 이황(理荒)이 있고 사업(事業)에는 선악(善惡)이 있음이라. 선정(善政)의 전형(典型)으로 제왕(帝王)의 이상(理想)이 이에 나타나 있으니, 선생(先生)의 헌책(獻策)은 오직 조강국체(朝綱國體)의 기초(基礎)를 다졌다고 말하리로다. 마침내 선생(先生)은 향년(享年) 六十五세에 졸(卒)하시니 정민(貞敏)이라 시호(諡號)하고 누증(累贈)하여 삼중대광내의령(三重大匡內議令)이 되었도다. 오호(嗚呼) 위대(偉大)하신 선생(先生)이시어! 성두(星斗)가 신(神)을 하강(下降)시켜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시니, 죽음을 따라 그 령명(令名)은 오히려 없어지지 않는도다. 조정(朝廷)은 선생(先生)의 덕(德)을 흠모(欽慕)하여 광종묘정(光宗廟庭)에 배향(配享)하였으나, 사직(社稷)이 바뀜에 미쳐 영대(靈臺)가 해무리를 고(告)함에 이르렀도다. 태묘(太廟)의 사전(祀典)에 힘입지 않는다면 누가 마땅히 그 령명(令名)을 후세(後世)에 전(傳)하리요? 이제 의(義)를 숭상(崇尙)하는 제사(諸士)의 의론(議論)이 제발(齊發)하여 저 익연(翼然)한 대전(大殿)을 통일동산(統一東山)에 세웠도다. 천만성예(千萬姓裔)는 의리(義理)를 같이하여 이에 헌성(獻誠)하고 정부기관(政府機關)은 취지(趣旨)에 찬동(贊同)하여 이에 보조(補助)하도다. 조두(俎豆)는 고법(古法)을 쫓고, 행사(行祀)는 태묘(太廟)에 준(準)하도다. 드디어 고려선양회(高麗宣揚會) 유사(有司)는 정결(淨潔)히 예제(禮齊)를 갖추어 감(敢)히 존령(尊靈)을 치국실(治國室)에 봉안(奉安)하나이다. 바라옵건대 영령(英靈)이시여! 이에 강림(降臨)하사 평안(平安)하소서.
 
오호(嗚呼) 선생(先生)이시여! 이천인([[이천서씨]](利川人)으로 신라(新羅) 아간(阿干) [[서신일]](徐神逸)의 아들이로다. 천성(天性)이 청렴(淸廉)하여 학문(學問)을 좋아하고 기개(氣槪)가 과단(果斷)하고 문장(文章)이 수려(秀麗)하였도다. 일찍이 명필(名筆)로서 등용(登用)되어 문서(文書)를 초(草)하는 미관(微官)으로 진출하여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에 이르렀도다. 광종이 금주기(金酒器)를 하사(下賜)하니 신(臣)이 금주기를 쓰면 임금은 장차(將次) 무엇을 쓰시나이까 하고 받지 아니하니, 경(卿)은 능(能)히 보물(寶物)로써 보물을 삼지 아니하니 짐(朕)은 마땅히 경(卿)의 말로써 보물을 삼으리라 하였도다. 또 선생(先生)은 공(功)을 가려 상(賞)을 줄 것과 투화(投化)한 한인(漢人)들에게 신료(臣僚)의 집과 딸들을 빼앗는 것을 극간(極諫)하여 중지(中止)케 하였도다. 정치(情致)에는 이황(理荒)이 있고 사업(事業)에는 선악(善惡)이 있음이라. 선정(善政)의 전형(典型)으로 제왕(帝王)의 이상(理想)이 이에 나타나 있으니, 선생(先生)의 헌책(獻策)은 오직 조강국체(朝綱國體)의 기초(基礎)를 다졌다고 말하리로다. 마침내 선생(先生)은 향년(享年) 六十五세에 졸(卒)하시니 정민(貞敏)이라 시호(諡號)하고 누증(累贈)하여 삼중대광내의령(三重大匡內議令)이 되었도다. 오호(嗚呼) 위대(偉大)하신 선생(先生)이시어! 성두(星斗)가 신(神)을 하강(下降)시켜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시니, 죽음을 따라 그 령명(令名)은 오히려 없어지지 않는도다. 조정(朝廷)은 선생(先生)의 덕(德)을 흠모(欽慕)하여 광종묘정(光宗廟庭)에 배향(配享)하였으나, 사직(社稷)이 바뀜에 미쳐 영대(靈臺)가 해무리를 고(告)함에 이르렀도다. 태묘(太廟)의 사전(祀典)에 힘입지 않는다면 누가 마땅히 그 령명(令名)을 후세(後世)에 전(傳)하리요? 이제 의(義)를 숭상(崇尙)하는 제사(諸士)의 의론(議論)이 제발(齊發)하여 저 익연(翼然)한 대전(大殿)을 통일동산(統一東山)에 세웠도다. 천만성예(千萬姓裔)는 의리(義理)를 같이하여 이에 헌성(獻誠)하고 정부기관(政府機關)은 취지(趣旨)에 찬동(贊同)하여 이에 보조(補助)하도다. 조두(俎豆)는 고법(古法)을 쫓고, 행사(行祀)는 태묘(太廟)에 준(準)하도다. 드디어 고려선양회(高麗宣揚會) 유사(有司)는 정결(淨潔)히 예제(禮齊)를 갖추어 감(敢)히 존령(尊靈)을 치국실(治國室)에 봉안(奉安)하나이다. 바라옵건대 영령(英靈)이시여! 이에 강림(降臨)하사 평안(平安)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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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통일대전 위패봉안문 태보내사령 장위공 [[서희]]선생 봉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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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統一大殿 位牌奉安文 太保內史令 章威公 徐熙先生 奉安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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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호(鳴呼), 선생(先生)은 이천인([[이천서씨]](利川人)이니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의 아들이로다. 성품(性稟)이 엄격(嚴格)하고 기개(氣槪)가 과단(果斷)하였도다. 일찍이 갑과(甲科)에 등제(登第)하여 광평원외랑(廣評員外郞)을 초수(超綬)하고 누진(累進)하여 내의시랑(內議寺郞)이 되었도다. 광종(光宗) 때 사명(使命)을 받들어 송(宋)에 갔다가 용의(容儀) 법도(法度)에 맞으니 송태차(宋太且)가 가상(嘉尙)히 여겨 검교병부상서(檢校兵部尙書)를 제수(除授)하였도다. 거란(契丹)이 내침(來侵)함에 선생(先生)이 중군사(中軍使)가 되어 봉산(蓬山)으로 출격(出擊)하였는데 소손녕(蕭遜寧)이 항복(降服)을 재촉(再促)함에 성종(成宗)은 서경(西京) 이북(以北)을 양도(讓渡)하려고 하였도다. 선생(先生)은 그것이 양계(良計)가 아님을 강력(强力)히 주장하고 적(敵)과 교섭(交涉)할 사신(使臣)을 자원(自願)하여 적진(敵陣)에 나아갔도다. 소손녕(蕭遜寧)은 고구려(高句麗) 땅이 자기네 땅임을 주장(主張)하고 우리와 접경(接境)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송(宋)과 수교(修交)하는 고로 오늘의 출병(出兵)이 이에 연유(緣由)함이라 하니, 선생(先生)은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곧 고구려(高句麗)의 구지(舊地)이므로 국호(國號)를 고려(高麗)라 칭(稱)하고 평양(平壤)에 도읍(都邑)하였으니 만일 지계(地界)를 논(論)한다면 귀국(貴國)의 동경(東京)은 다 우리 경내(境內)에 있거늘 어찌 침식(侵蝕)이라 하는가? 수교(修交)의 불통(不通)은 여진(女眞) 때문이라. 만일 그 사이에 도거(盜據)한 여진(女眞)을 쫓고 우리 구지(舊地)를 돌리어 성보(城堡)를 쌓고 도로(道路)를 통(通)하게 하면 감(敢)히 수빙(修騁)하지 않으리오 하였도다. 소손녕(蕭遜寧)은 그 강개(慷慨)한 사기(辭氣)에 감복(感服)하여 드디어 거란(契丹)이 이에 응(應)하여 물러났도다. 이후(以後) 여진(女眞)을 격퇴(擊退)하고 장흥(長興)·귀비(歸匕)·곽주(郭州)·구주(龜州)·안의(安義)·흥화(興化)·선주(宣州)·맹주(孟州) 등지(等地)에 성을 쌓아 국토(國土)를 확장(擴張)하니, 성종(成宗)은 그 공업(功業)이 가상(嘉尙)하여 태보내사령(太保內史令)을 제수(除授)하였도다. 아아! 선생(先生)은 오직 담판(談判)으로 거란(契丹)의 대병(大兵)을 물리쳤으니, 실(實)로 국가(國家)의 존망(存亡)에 이만한 대공(大功)을 세우신 분이 선생(先生)을 빼놓고 또 누가 있으리오. 그 은혜(恩惠)는 바다와 같이 깊고, 그 유덕(遺德)은 태산(泰山)과 같이 높으시도다. 이에 유사(有司)는 고례(古禮)를 좇아 감(敢)히 존영(尊靈)을 호국실(護國室)에 봉안(奉安)하나이다. 바라옵건대 영령(英靈)이시어 이에 강림(降任)하사 봉안(奉安)을 누리소서.
  
 
고려통일대전 위패봉안문 삼중대광 내사령 원숙공 [[서눌]]선생 봉안문
 
고려통일대전 위패봉안문 삼중대광 내사령 원숙공 [[서눌]]선생 봉안문

2024년 3월 13일 (수) 05:04 판

고려통일대전(高麗統一大殿)

고려통일대전 위패봉안문 대광내의령 정민공 서필선생 봉안문 (高麗統一大殿 位牌奉安文 大匡內議令 貞敏公 徐弼先生 奉安文)

오호(嗚呼) 선생(先生)이시여! 이천인(이천서씨(利川人)으로 신라(新羅) 아간(阿干) 서신일(徐神逸)의 아들이로다. 천성(天性)이 청렴(淸廉)하여 학문(學問)을 좋아하고 기개(氣槪)가 과단(果斷)하고 문장(文章)이 수려(秀麗)하였도다. 일찍이 명필(名筆)로서 등용(登用)되어 문서(文書)를 초(草)하는 미관(微官)으로 진출하여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에 이르렀도다. 광종이 금주기(金酒器)를 하사(下賜)하니 신(臣)이 금주기를 쓰면 임금은 장차(將次) 무엇을 쓰시나이까 하고 받지 아니하니, 경(卿)은 능(能)히 보물(寶物)로써 보물을 삼지 아니하니 짐(朕)은 마땅히 경(卿)의 말로써 보물을 삼으리라 하였도다. 또 선생(先生)은 공(功)을 가려 상(賞)을 줄 것과 투화(投化)한 한인(漢人)들에게 신료(臣僚)의 집과 딸들을 빼앗는 것을 극간(極諫)하여 중지(中止)케 하였도다. 정치(情致)에는 이황(理荒)이 있고 사업(事業)에는 선악(善惡)이 있음이라. 선정(善政)의 전형(典型)으로 제왕(帝王)의 이상(理想)이 이에 나타나 있으니, 선생(先生)의 헌책(獻策)은 오직 조강국체(朝綱國體)의 기초(基礎)를 다졌다고 말하리로다. 마침내 선생(先生)은 향년(享年) 六十五세에 졸(卒)하시니 정민(貞敏)이라 시호(諡號)하고 누증(累贈)하여 삼중대광내의령(三重大匡內議令)이 되었도다. 오호(嗚呼) 위대(偉大)하신 선생(先生)이시어! 성두(星斗)가 신(神)을 하강(下降)시켜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시니, 죽음을 따라 그 령명(令名)은 오히려 없어지지 않는도다. 조정(朝廷)은 선생(先生)의 덕(德)을 흠모(欽慕)하여 광종묘정(光宗廟庭)에 배향(配享)하였으나, 사직(社稷)이 바뀜에 미쳐 영대(靈臺)가 해무리를 고(告)함에 이르렀도다. 태묘(太廟)의 사전(祀典)에 힘입지 않는다면 누가 마땅히 그 령명(令名)을 후세(後世)에 전(傳)하리요? 이제 의(義)를 숭상(崇尙)하는 제사(諸士)의 의론(議論)이 제발(齊發)하여 저 익연(翼然)한 대전(大殿)을 통일동산(統一東山)에 세웠도다. 천만성예(千萬姓裔)는 의리(義理)를 같이하여 이에 헌성(獻誠)하고 정부기관(政府機關)은 취지(趣旨)에 찬동(贊同)하여 이에 보조(補助)하도다. 조두(俎豆)는 고법(古法)을 쫓고, 행사(行祀)는 태묘(太廟)에 준(準)하도다. 드디어 고려선양회(高麗宣揚會) 유사(有司)는 정결(淨潔)히 예제(禮齊)를 갖추어 감(敢)히 존령(尊靈)을 치국실(治國室)에 봉안(奉安)하나이다. 바라옵건대 영령(英靈)이시여! 이에 강림(降臨)하사 평안(平安)하소서.

고려통일대전 위패봉안문 태보내사령 장위공 서희선생 봉안문 (高麗統一大殿 位牌奉安文 太保內史令 章威公 徐熙先生 奉安文)

명호(鳴呼), 선생(先生)은 이천인(이천서씨(利川人)이니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의 아들이로다. 성품(性稟)이 엄격(嚴格)하고 기개(氣槪)가 과단(果斷)하였도다. 일찍이 갑과(甲科)에 등제(登第)하여 광평원외랑(廣評員外郞)을 초수(超綬)하고 누진(累進)하여 내의시랑(內議寺郞)이 되었도다. 광종(光宗) 때 사명(使命)을 받들어 송(宋)에 갔다가 용의(容儀) 법도(法度)에 맞으니 송태차(宋太且)가 가상(嘉尙)히 여겨 검교병부상서(檢校兵部尙書)를 제수(除授)하였도다. 거란(契丹)이 내침(來侵)함에 선생(先生)이 중군사(中軍使)가 되어 봉산(蓬山)으로 출격(出擊)하였는데 소손녕(蕭遜寧)이 항복(降服)을 재촉(再促)함에 성종(成宗)은 서경(西京) 이북(以北)을 양도(讓渡)하려고 하였도다. 선생(先生)은 그것이 양계(良計)가 아님을 강력(强力)히 주장하고 적(敵)과 교섭(交涉)할 사신(使臣)을 자원(自願)하여 적진(敵陣)에 나아갔도다. 소손녕(蕭遜寧)은 고구려(高句麗) 땅이 자기네 땅임을 주장(主張)하고 우리와 접경(接境)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송(宋)과 수교(修交)하는 고로 오늘의 출병(出兵)이 이에 연유(緣由)함이라 하니, 선생(先生)은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곧 고구려(高句麗)의 구지(舊地)이므로 국호(國號)를 고려(高麗)라 칭(稱)하고 평양(平壤)에 도읍(都邑)하였으니 만일 지계(地界)를 논(論)한다면 귀국(貴國)의 동경(東京)은 다 우리 경내(境內)에 있거늘 어찌 침식(侵蝕)이라 하는가? 수교(修交)의 불통(不通)은 여진(女眞) 때문이라. 만일 그 사이에 도거(盜據)한 여진(女眞)을 쫓고 우리 구지(舊地)를 돌리어 성보(城堡)를 쌓고 도로(道路)를 통(通)하게 하면 감(敢)히 수빙(修騁)하지 않으리오 하였도다. 소손녕(蕭遜寧)은 그 강개(慷慨)한 사기(辭氣)에 감복(感服)하여 드디어 거란(契丹)이 이에 응(應)하여 물러났도다. 이후(以後) 여진(女眞)을 격퇴(擊退)하고 장흥(長興)·귀비(歸匕)·곽주(郭州)·구주(龜州)·안의(安義)·흥화(興化)·선주(宣州)·맹주(孟州) 등지(等地)에 성을 쌓아 국토(國土)를 확장(擴張)하니, 성종(成宗)은 그 공업(功業)이 가상(嘉尙)하여 태보내사령(太保內史令)을 제수(除授)하였도다. 아아! 선생(先生)은 오직 담판(談判)으로 거란(契丹)의 대병(大兵)을 물리쳤으니, 실(實)로 국가(國家)의 존망(存亡)에 이만한 대공(大功)을 세우신 분이 선생(先生)을 빼놓고 또 누가 있으리오. 그 은혜(恩惠)는 바다와 같이 깊고, 그 유덕(遺德)은 태산(泰山)과 같이 높으시도다. 이에 유사(有司)는 고례(古禮)를 좇아 감(敢)히 존영(尊靈)을 호국실(護國室)에 봉안(奉安)하나이다. 바라옵건대 영령(英靈)이시어 이에 강림(降任)하사 봉안(奉安)을 누리소서.

고려통일대전 위패봉안문 삼중대광 내사령 원숙공 서눌선생 봉안문 (高麗統一大殿 位牌奉安文 三重大匡 內史令 元肅公 徐訥先生 奉安文)

오호(嗚呼)! 선생(先生)은 이천인(이천서씨(利川人)으로 태보내사령(太保內史令) 장위공(章威公) 희(熙)의 아들이요 내의령(內議令) 정민공(貞敏公) 필(弼)의 손자(孫子)로다. 성종(成宗) 때 갑과(甲科)에 발탁(拔擢)되어 목(穆)·현(顯)·덕(德)·정(靖)·4조(朝)를 역임(歷任)하시니, 조강국례(朝綱國禮)에 보우(保佑)한 공(功)이 실(實)로 많았도다. 현종조(顯宗朝)에 누천(累遷)하여 국자제주지리부사(國子祭酒知吏部事)가 되었는데 왕(王)이 선생(先生)의 딸을 들이어 비(妃)를 삼았도다. 곧이어 문하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판상서사부사(門下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判尙書史部事)에 오르시고, 덕종조(德宗朝)에 검교태사(檢校太師)를 가(加)하여 문하시랑(門下侍郞)에 승진(昇進)하였도다. 정종시(靖宗時)에 판도병마사(判都兵馬使)를 역임(歷任)하였더니 왕년(往年)에 거란(契丹)이 압록강(鴨綠江), 동편(東便)에 성보(城堡)를 가축(加築)하고, 이제 다시 화친(和親)코자 하였도다. 이에 선생(先生)은 사신(使臣)으로 하여금 표(表)를 부쳐 먼저 그 성보(城堡)를 파(罷)할 것을 청(請)하게 하였도다. 병(病)이 위독(危篤)하자 임금이 삼중대광(三重大匡) 내사령(內史令)을 가(加)하고, 그 자손(子孫)에게 영업전(營業田)을 하사(下賜)하였도다. 급졸(及卒)에 왕(王)이 애도(哀悼)하고 간경(簡敬)이라 증시(贈諡)하였다가 뒤에 정종조정(靖宗朝廷)에 배향(配享)하고 원숙(元肅)이라 개시(改諡)하였도다. 삼대(三代)가 나란히 재상(宰相)에 오르고 시호(諡號)와 묘식(廟食)이 또한 그와 같으니, 그 가문(家門)의 영광(榮光)은 별빛처럼 빛나고, 그 영명(令名)과 훈업(勳業)은 천추(千秋)에 유전(遺傳)하는도다. 이제 의(義)를 숭상(崇尙)하는 제사(諸士)의 의논(議論)이 제발(齊發)하여, 수년(數年)만에 통일(統一)동산에 터를 잡아 고려통일대전(高麗統一大殿)을 장엄(莊嚴)하게 세웠도다. 천만성예(千萬姓裔)는 이에 헌성(獻誠)하고, 정부기관(政府機關)은 이에 찬조(贊助)하였도다. 위로는 우주(宇宙)의 원기(元氣)를 지탱(支撑)하고, 아래로는 산하(山河)의 정기(精氣)를 포섭(包攝)하였도다. 송악(松嶽)은 아련히 구름 위에 솟아있고, 한수(漢水)는 도도(滔滔)히 대(臺)를 안고 흐르도다. 전우(殿宇)가 사위(四圍)에 흘연(屹然)하니, 성충현공(聖忠顯功)의 거동(擧動)이 여재양양(如在洋洋)하도다. 조두(俎豆)는 고법(古法)을 좇고 행사(行祀)는 태묘(太廟)에 준(準)하도다. 이제 고려선양회(高麗宣揚會) 유사(有司)는 정결(淨潔)히 예제(醴齊)를 갖추어 감(敢)히 존영(尊靈)을 치국실(治國室)에 봉안(奉安)하나이다. 바라옵건대 향축(香祝)이 구천(九泉)에 응(應)하거던 이에 강림(降臨)하사 이에 명례(明禮)를 흠격(歆格)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