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신라)"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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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참고문헌'''== |
+ | *정현숙, 「신라하대 보림사 금석문의 서체와 그 서풍」, 『목간과 문자』 제15호, 한국목간학회, 2015, 149-173쪽. | ||
+ | *최완수, "[http://shindonga.donga.com/3/all/13/101253/1 최완수의 우리문화 바로보기 27 - 唐 유학생 출신이 빛낸 신라 塔碑미술]", 『신동아』 2001년 9월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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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 ||
<references/> | <reference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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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류:불교 사찰의 승탑비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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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류:신라]] |
2017년 3월 23일 (목) 14:28 판
정의
신라시대의 서예가.
내용
당나라 유학생 출신으로[1] 문장과 글씨에 능통하여[2]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長興 寶林寺 普照禪師塔碑, 보물 제158호)의 글씨를 쓰고, 양양 선림원지 홍각선사탑비(襄陽 禪林院址 弘覺禪師塔碑, 보물 제446호의 비문을 지었다.
신라시대의 승려 체징(體澄, 804-880)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長興 寶林寺 普照禪師塔碑)의 비문은 김영(金穎)이 짓고 김원(金薳)과 김언경 두 사람이 서로 다른 글씨체로 쓴 특이한 예이다. 비문의 첫머리 부분부터 7행의 '선(禪)'자까지는 김원이 해서체(楷書體)로 썼고, 그 이하는 김언경이 행서체(行書體)로 썼다.[3] 이것은 아마도 김원이 중도에 죽었기 때문에 그의 제자였던 김언경이 이어 쓴 것으로 생각된다.[4]
이 비문의 탁본은 중국 청나라에도 소개되었으며,[5] 청(淸) 말기의 금석연구가 섭창치(葉昌熾)는 이 비에 대하여 그의 저서 『어석(語石)』에서 "일비양인서일칙(一碑兩人書一則: "하나의 비에 두 사람의 글씨가 하나의 법칙을 이루었다"라는 뜻.[6])이라고 평한 바 있다.[7]
또한 이 탑비는 우리나라 서예사상 글씨를 쓴 사람의 이름이 기록된 최고(最古)의 예로서 의의가 크다.[8]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 | 김원, 김언경 | A는 B가 비문을 썼다 | 883년 |
양양 선림원지 홍각선사탑비 | 김원 |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 886년 |
참고문헌
- 정현숙, 「신라하대 보림사 금석문의 서체와 그 서풍」, 『목간과 문자』 제15호, 한국목간학회, 2015, 149-173쪽.
- 최완수, "최완수의 우리문화 바로보기 27 - 唐 유학생 출신이 빛낸 신라 塔碑미술", 『신동아』 2001년 9월호.
각주
- ↑ 최완수, "최완수의 우리문화 바로보기 27 - 唐 유학생 출신이 빛낸 신라 塔碑미술", 『신동아』 2001년 9월호. 2017년 3월 1일 확인.
- ↑ "선림원지홍각선사비(禪林院址弘覺禪師碑)",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 국립문화재연구소. 2017년 3월 23일 확인.
- ↑ "김원(金薳)",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온라인 서비스에서 인용. 2017년 03월 20일 확인.
- ↑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온라인 서비스에서 인용. 2017년 03월 20일 확인.
- ↑ "김원(金薳)",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온라인 서비스에서 인용. 2017년 03월 20일 확인.
- ↑ "보물 제158호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 『문화재청 고객지원센터』. 2017년 03월 23일 확인.
- ↑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온라인 서비스에서 인용. 2017년 03월 20일 확인.
- ↑ "김원(金薳)",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온라인 서비스에서 인용. 2017년 03월 20일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