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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 19일 (월) 17:49 판
한국 최초의 교회는 소래교회입니다 1883년 5월16일 서상륜,서경조 형제가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 소래마을에 초가집 예배당인 소래교회를 세웁니다. 하지만 안타깝게 역사의 격변기 속에 지금은 소래교회는 존재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초기 한국교회에 중요한 3개의 교회가 있는데 바로 인천내리교회와 정동제일교회 그리고 새문안교회입니다. 이들 교회는 창립일을 각자 가지고 있지만, 이들 교회 모두 창립일 이전에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리면서 실질적으로 교회가 시작되는 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새문안교회가 1885년 7월2일, 정동제일교회가 7월17일 그리고 인천내리교회가 7월29일로 며칠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다만, 2년 뒤 새문안교회가 1887년 9월27일 14명의 성도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3명의 성도에게 세례를 베풀고 장로 2인을 세우며 오늘날과 같은 교회조직을 갖추고 정식으로 새문안교회를 창립합니다. 이때가 한국 최초의 조직교회가 세워진 시점입니다.
일반적으로 한국 최초의 교회는 소래교회, 최초의 조직교회는 새문안교회로 얘기하고 있습니다. 경기도 용인시 양지면에 가면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캠퍼스가 있는데, 그 캠퍼스의 생활관 뒷편에는 아늑한 한옥 기와집이 하나 있다. 그러나 이곳은 한옥 개인 주택이 아니라,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 소래교회를 복원해 놓은 곳이다.
아펜젤러와 함께 공식선교사로 최초 입국한 선교사 언더우드는 평양을 거쳐 황해도 소래교회를 방문하면서“우리는 이 땅에 씨를 뿌리러 온 것이 아니라 이미 뿌려진 씨의 열매를 추수하러 왔다”고 소감을 밝혔다. 정말 그랬다. 그는 선교사로 미지의 땅에 첫 발을 내디뎠다 생각했는데 이미 교회가 세워져 있음을 보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서상륜의 한국교회사적 위치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스코틀랜드 선교사 로스(J. Ross)와 매킨타이어(J. MacIntyre)는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면서 조선선교에 대한 꿈을 키워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들은 1874년 고려문을 넘나들며 홍삼장사를 하는 의주청년들을 만났다. 그들은 이응찬, 이성하, 백홍준, 김진기 등과 필담으로 대화를 나누다 장사 수입보다 많은 것을 줄 테니 자신들에게 조선말을 가르쳐 주는 선생이 되어 달라고 부탁했다. 마침내 의주청년들은 로스와 매킨타이어 선교사에게 조선말을 가르쳐 주었고 그 과정에서 성경말씀을 익히고 복음을 받아들여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 사람으로는 최초로 만주에서 세례교인이 되었다.
한편 서상륜(徐相崙 1849~1925)은 양반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나 한문수학을 했다. 그는 한문공부를 많이 했을 뿐 아니라 중국말도 잘 했다. 그런데 고려문을 넘나들며 홍삼 장사를 하던 중 뜻하지 않게 영구에서 장티푸스에 걸려 온몸이 불덩이 같은 고열에 시달리며 사경을 헤매게 되었다. 이때 이미 기독교를 접한 이응찬이 그를 매킨타이어 선교사에게 안내하였다. 전염병으로 생명의 위급함에 처한 서상륜은 서양병원에서 선교사 헌터(Joseph M. Hunter) 의사에게 치료를 받으면서 점차 회복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심양에서 로스 선교사의 한글 성서번역사업에 동참하게 되었고 한문 실력이 출중한 그는 로스 선교사의 성서번역 사업에 오른팔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당시 조선은 대동강변에서 토마스 선교사가 순교한 사건 이후 쇄국정책이 더욱 강화되었다. 하지만 로스와 매킨타이어 선교사는 머지않아 조선에도 선교의 문이 반드시 열릴 것이라 믿고, 조선청년들에게 투자하면서 그들과 함께 성서번역사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마침내 1882년 3월 24일 심양에서 한글성경 누가복음 3천 권이 최초로 발간되었다. 이 최초의 한글성경 번역작업은 서상륜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 성경을 로스와 서상륜의 공동번역이라고도 말한다. 그렇게 성경을 번역한 서상륜은 또 하나의 사명을 갖고 자신이 번역한 복음서를 안고 압록강을 건너 고향 의주로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당시는 성서 반입이 불법인지라 고려문을 통과하다가 국경 관리들에게 적발되어 붙잡혔다. 다행히 먼 친척인 김효순의 도움으로 성경 10여 권만을 챙겨가지고 밤에 도주하는 데 성공을 한다. 이렇게 고향으로 돌아오긴 했으나 위기를 느낀 그는 동생 서경조와 함께 외가가 있는 황해도 장연의 소래(송천, 松泉)로 피신하게 된다. 거기서 그는 자기 가슴속에 몰래 숨겨온 성경을 가지고 외가 친척과 인근 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다. 전도가 점차 활기를 띠면서 가정집에서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이로써 1883년 5월 16일, 한국 최초로 외부의 도움 없이 자생적으로 세워진 소래교회가 탄생하게 되었다.
그 이후 소래교회 예배당을 건축할 때의 일이다. 언더우드 선교사가 건축자금을 미국에 가서 모금하여 지원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서상륜을 비롯한 소래교회 교인들은 “우리가 우리 예배당을 세우는데 외국인의 원조를 받는 것은 본의에도 어긋나며, 후세에 전하는 데도 떳떳하지 못하다”고 정중히 거절하였다. 언더우드는 그 뜻을 존중하면서 미국으로부터 가져온 석유램프 5개를 소래교회에 기증하였다. 그런데 불빛이 얼마나 밝았던지 그 빛이 온 동리를 환하게 밝혔다고 한다. 이렇듯 소래교회는 한국최초 예배당인 동시에 외국의 원조 없이 자생적으로 세운 교회라는 점에서 더욱 큰 의미를 가진다. 한편 1887년 9월 27일 언더우드에 의하여 서울에 설립된 최초 조직교회인 새문안교회가 창립될 때 참여한 14명의 최초교인들도 서상륜과 백홍준이 전도한 교인들이었다. 그 이후 서상륜은 새문안교회의 조사로 세워졌고 언더우드 선교사의 동역자가 되었으며 선교초기 권서인으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복음사역에 놀라운 업적을 남겼다. 한국교회 선교역사에 초석을 놓으며 선구자의 삶을 사신 서상륜은 1925년 12월 16일 76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는 비록 평신도였지만 그의 장례는 장로교총회장으로 엄숙하게 거행되었다. 평신도의 장례를 장로교총회장으로 예우한 것은 전례에 없는 특별한 일이었다. 한편 그의 동생 서경조는 장로교 평양신학교 1회 졸업생 7인 중의 한 명이다. 그의 아들 서병호는 독립운동가로 상해에서 활동하였으며 그의 후손으로는 서원석 장로(전 대한성서공회) 서경석 목사 등이 있다.
이처럼 한국교회는 서상륜과 같은 인물이 자신들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희생과 헌신 위에 세워졌다. 그리고 최초선교사 언더우드 ‧ 아펜젤러 입국 이전에 이미 서상륜은 이 땅에서 사도행전적인 삶을 이루었다고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서상륜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한국기독교성지순례선교회가 주축이 되어 기독교계 인사 및 각 신학대학교총장 교수들의 뜻을 모아 발기하고 추진하여 2006년 6월 20일 용인 총신대학교 신대원캠퍼스에한국기독교선구자 서상륜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1848(헌종 14)∼1926. 기독교 신자.
고려시대 권문세족은 이천 서씨,인주 이씨,해주 최씨,남양 홍씨가 4대 문벌귀족이다. 조선시대에는 이천서씨에서 분파한 대구 서씨(大丘徐氏) 서성(徐渻 증 영의정) 후손이 3대 정승(서종태(徐宗泰 영의정),서명균(徐命均 좌의정),서지수(徐志修 영의정)),3대 대제학(서유신(徐有臣 대제학),서영보(徐榮輔 대제학),서기순(徐箕淳 대제학))을 최초로 6대 연속과 서명응(徐命膺 대제학),서호수(徐浩修 직제학), 서유구 (徐有榘 대제학) 3대 대학자를 연속 배출하여 조선에서는 서지약봉(徐之藥峰)이요.홍지모당(洪之慕堂) 으로 유명했고, 연리광김(延李光金)와 더불어 대구 서씨,풍산 홍씨,연안 이씨,광산 김씨가 조선 최고 4대 양반 가문으로 꼽힌다. 숙종때 이런 일화가 전한다.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비롯한 서씨 성을 가진 참판급 이상 중신이 30여명 이었다. 어느날 조회를 소집한 숙종이 용상에서 가만히 내려다보니, 오가는 대신들이 대부분 서씨들이라, “마치 어미 쥐가 새끼쥐를 거느리고 다니는 듯 하다!” 라고 말해 주변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숙종의 말씀이었으나,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어미쥐로 빗대 그 아래 웅성거리는 서씨대신들의 융성함을 나타내는 기막힌 표현이였다.대구 서씨는 달성 서씨라고도 부른다.
대구 서씨 시조 서한 시제는 충남 예산군 대흥면 하탄방리에서 음력 10월1일에 거행된다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명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목차
내용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13세 때 부모를 잃고 만주에서 홍삼장사를 하였다. 31세 때 만주에서 장티푸스로 사경을 헤맬 때 스코틀랜드 연합장로회의 목사인 매킨타이어(McIntyre, J., 馬勒泰)에게 구호를 받은 후 완쾌되어 신자가 되었다.
몇 달 후에 매킨타이어와 같은 선교회에 소속되어 있는 목사 로스(Ross, J., 羅約翰)를 만나서 세례를 받고 그의 어학선생이 되었다.
그 뒤에 이성하(李成夏)·이응찬(李應贊)·백홍준(白鴻俊)과 함께 신약성서를 번역하기 시작하여 1882년 가을 쪽 복음 형태로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를 간행하였다. 이는 우리나라에 선교사가 들어오기 3년 전의 일로, 민족교회 성립의 기초를 이룬 것이었다.
1884년에는 『예수셩교젼셔 마태복음』과 『말코복음』을 심양(瀋陽)의 문광서원에서 간행하였고, 1887년 이른바 ‘로스 번역 성서(Ross Version)’라고 하는 신약성서 번역본을 『예수셩교젼셔』라는 제목으로 간행하였다.
이는 중국어 성경에서 번역한 것으로 성서 번역뿐 아니라 식자와 인쇄도 모두 그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성서를 만들어내는 데 그치지 않고 국내에 반포하는 것도 시도하였다.
1883년 성서를 가지고 입국을 시도하다가 적발되어 의주(義州)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 때. 의주부 집사이며 교인이었던 김효순(金孝順)의 도움으로 탈출하여 고향인 의주로 돌아왔다.
그러나 상황이 불리함을 깨닫고 동생 서경조(徐景祚)와 함께 황해도 장연군솔내(松川) 마을로 이주, 교회를 세우고 전도활동을 하여 한국 개신교회의 요람지로 발전시켰다. 1887년 서울 새문안교회가 설립될 때 설립교인 14명 중 13명이 그의 전도로 교인이 된 사람들이었다.
말년에는 솔내 교회에서 전도활동에 전념하였다. 1936년 9월 제25회 장로회 총회에서 기념비 건립이 결정되어 1938년 그의 묘지에 기념비가 세워짐으로써 선구자적 선교 사업을 기리게 되었다.
『한국개신교사(韓國改新敎史)』(백낙준, 연세대학교 출판부, 1973)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朝鮮예수敎長老會史記) 상』(차재명 편, 신문로교회당, 1928)
최초 한글성경 번역한 서상륜(徐相崙)
서상륜이 황해도 소래에 세운 한국 최초의 소래교회
한국기독교선구자 서상륜 기념비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이섭대천(利涉大川)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